한강 <피 흐르는 눈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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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리뷰

한강 <피 흐르는 눈 4>

by 브린니 2020. 6. 22.

피 흐르는 눈 4

 

 

이 어스름한 저녁을 열고

세상의 뒤편으로 들어가 보면

모든 것이

등을 돌리고 있다

 

고요히 등을 돌린 뒷모습들이

차라리 나에겐 견딜 만해서

되도록 오래

여기 앉아 있고 싶은데

 

빛이라곤

들어와 갖힌 빛뿐

 

슬픔이라곤

이미 흘러나간 자국뿐

 

조용한 내 눈에는

찔린 자국뿐

피의 그림자뿐

 

흐르는 족족

 

재가 되는

검은

 

                     ―한강

 

 

【산책】

고요히 시를 다시 읽어보자.

 

이 어스름한 저녁을 열고 세상의 뒤편으로 들어가 보면 모든 것이 등을 돌리고 있다

고요히 등을 돌린 뒷모습들이 차라리 나에겐 견딜 만해서 되도록 오래 여기 앉아 있고 싶은데

 

이런 적이 있는가.

있다.

무수히 많다.

 

세상이 등을 돌리고 앉은 느낌.

불러도 불러도 그 어디에서도 대꾸 한 마디 없는.

구원은 어디에도 없는, 구원자도 없고, 구원의 손길은 아, 멀리 어디 있는 줄도 모르고.

 

“고요히 등을 돌린 뒷모습들이 차라리 나에겐 견딜 만해서”

시에는 이렇게 쓰여 있지만

세상이 등을 돌린 뒷모습을 보기 싫다.

볼 수가 없다.

등을 세게 쳐서 이쪽으로 되돌리고 싶다.

이렇게 버려지는 것은 너무도 싫다.

 

담담한 시인의 어투가 너무 마음 아프다.

어떻게 세상의 등짝을 견딜 만하게 바라볼 수 있는가.

 

그러나 상처는 남아 있다.

슬픔이 흘러나간 자국, 찔린 자국, 그것 때문에 생긴 상처.

피의 그림자가 선명하게 남아 있다.

 

눈물이 흐른다. 피눈물이.

그런데 흐르는 족족

검은 재가 되고 만다.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다.

가슴이 먹먹할 때는 조용히 일어서서 천천히 걸어보자.

 

세상의 끝까지, 세상의 등짝이 보일 때까지.

아주 천천히.

 

먹먹해진 가슴이 풀어질 때까지 산책을 하자.

드라이브도 좋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목적도 없이 희망도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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