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찬호 <달빛은 무엇이든 구부려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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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리뷰

송찬호 <달빛은 무엇이든 구부려 만든다>

by 브린니 2020. 6. 21.

달빛은 무엇이든 구부려 만든다

 

 

달빛은 무엇이든 구부려 만든다

꽃의 향기를 구부려 꿀을 만들고

잎을 구부려 지붕을 만들고

물을 구부려 물방울 보석을 만들고

머나먼 비단길을 구부려 낙타 등을 만들어 타고 가고

입 벌린 나팔꽃을 구부려 비비 꼬인 숨통과 식도를 만들고

검게 익어 가는 포도의 혀끝을 구부려 죽음의 단맛을 내게 하고

여자가 몸을 구부려 아이를 만들 동안

굳은 약속을 구부려 반지를 만들고

 

오랜 회유의 시간으로 달빛은 무엇이든 구부려 놓았다

말을 구부려 상징을 만들고

달을 구부려 상징의 감옥을 만들고

이 세계를 둥글게 완성시켜 놓았다

 

달이 둥글게 보인다

달이 빛나는 순간 세계는 없어져 버린다

세계는 환한 달빛 속에 감추어져 있다

달이 옆으로 조금씩 움직이듯

정교한 말의 장치가 조금씩 풀리고 있다

오랫동안 말의 길을 걸어와

처음 만난 것이 인간이다

말은 이 세계를 찾아온 낯선 이방인이다

말을 할 때마다 말은

이 세계를 더욱 낯설게 한다

 

                                                ―송찬호

 

 

 

【산책】

달이 둥근 것은 달빛이 달을 구부려 놓았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을 구부려 둥글게 만드는 힘을 지닌 것이 달의 빛이다.

 

빛은 생명을 탄생시키는 힘이다.

빛은 모든 것에 생명을 부여한다.

 

달빛은 세계를 둥글게 완성시킨다.

말에게 생명을 부여하고

말은 세계를 낯설게 만든다.

 

송찬호의 시 <달빛은 무엇이든 구부려 만든다>는

세계를 낯설게 만드는 달빛의 신비한 힘이 말을 자유롭게 풀어놓는다고 말한다.

 

말은 이 세계를 찾아온 이방인으로서 인간에게 온다.

인간의 말을 만나 소통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상을 낯설게 만든다.

아니 세상이 낯설게 다가온다.

 

그러나 세상이 낯설다는 것이 마냥 나쁜 것이 아닌지도 모른다.

낯설게 세상을 느낀다면 지루하고 답답한 일상을 새롭게 받아들일 수 있다.

일상 속에 신화 같은 시간을 옮겨 올 수도 있다.

 

낯선 것은 익숙한 것을 다시 보게 만들고, 익숙한 것들에 생명력을 불어넣는다.

늘 오가는 출퇴근길에서 날씨에 달라지는 가로수.

그 길에서 만나는 사람들.

늘 같은 것 같지만 뭔가 다른 어떤 것들이 익숙한 것들 틈 사이로

살짝,

보일 것이다.

 

영화 <스모크>에서 주인공 오기는 매일 같은 날 같은 시간에 자기 집 앞 거리를 사진 찍는다.

매일 매일 똑같은 시간, 같은 거리지만 그 공간과 시간을 찍은 사진이지만 사진은 모두 다 다르다.

 

영화 '스모크'에서 주인공 오기 역 하비 카이텔

 

낯선 것은 익숙한 것들에 생기를 불러일으킨다.

그것을 만드는 것이 달빛이든, 말(언어)이든.

혹은 낯선 사람이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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