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블로 네루다 <산보>
본문 바로가기
독서 리뷰

파블로 네루다 <산보>

by 브린니 2020. 6. 24.

산보

 

 

때때로 사람 되기가 힘들다는 걸 느낀다.

때때로 양복점이나 영화관에 들어가 풀죽은 자신을 발견한다.

솜뭉치로 만든 백조처럼 어쩔 수 없이

잿더미와 원시밖에 없는 물속을 헤엄치는.

 

이발관의 냄새는 날 소리쳐 울게 한다.

내가 바라는 건 돌이나 양털의 휴식,

건물들이니 정원이니,

상점들이니 안경이니, 승강기만 보지 않았으면 좋겠다.

 

때때로 나는 내 발이니 손톱이 싫을 때가 있다.

내 머리칼이며 나의 그림자가 지겨울 때가 있다.

때때로 사람 되는 것이 지겨울 때가 있다.

 

그러나 사실 그건 통쾌한 일일 수도 있다

그러니까 백합꽃 한 송이를 꺾어 공증인 따위를 놀라게 해준다든지

귀로 때려서 수녀 하나쯤 죽여 놓는다든지 하는 거.

그건 아름다울 수도 있다.

가령 파란 칼을 들고 길에 나가

추워 죽을 지경이 될 때까지 소리를 지르며 돌아다닌다는 거.

 

이 암흑 속에 나는 계속 뿌리가 되는 게 싫다.

젖은 흙담 속에 안절부절 밑으로 늘어뜨려진 꿈에 떠는 뿌리.

무엇이든 흡수하고 생각하고 또 날마다 식사를 하는.

 

나는 그 많은 불행이 정말 싫다.

결국 홀로 지하에 갇혀 시체밖에 없는 술창고에서 떨며 고통에 죽어가는

뿌리와 무덤의 신세가 되는 게 이젠 싫다.

 

그래서 월요일은 석유 유전처럼 불타고

감옥 같은 얼굴로 나는 도착한다.

월요일은 상처 난 바퀴처럼 하루가 가면서 계속 울부짖고

밤을 향해 뜨거운 피의 발자국 소리를 낸다.

 

그리고는 어느 구석이나 어느 습기진 집안으로 밀어붙인다.

뼈다귀가 창으로 기어 나오는 병원이라든지,

식초 냄새가 나는 이상한 구둣방이라든지,

땅이 갈라진 것처럼 무서운 거리 같은 곳으로.

 

내장이 소름끼치는 유황색 새들이 있다,

내가 증오하는 집들의 문에 걸려 있는 그 새들,

커피포트에 잊고 온 의치 같은 것들이 있다,

거울들이 있다.

수치와 경악으로 흠뻑 울고 난 것 같은 거울이 있다,

사방에 우산이 있다, 독약과 배꼬막이 수두룩하다.

 

나는 침착하게 산보를 한다, 두 눈과 구두를 더불고,

분노와 망각을 더불고,

사무실과 의족 의치 상점을 스쳐 지나간다 :

철사 줄에 옷이 걸려 있는 뜰을 지나간다.

팬티며 수건이며 와이셔츠 같은 것들이

서서히 더러운 눈물을 흘리며 울고 있다.

 

                                         ―파블로 네루다(칠레, 1904-1978) *1971년 노벨문학상 수상

 

 

【산책】

산책을 하면서 이런저런 생각을 한다.

가벼운 생각을 떠올리기도 하고, 뭔가 심각한 고민에 빠지기도 한다.

걸어가면서 일종의 성찰의 시간이 함께 지나간다.

원초적인 질문들과 대답들,

 

예를 들어

“때때로 사람 되기가 힘들다는 걸 느낀다.”

“때때로 사람 되는 것이 지겨울 때가 있다.”

 

이런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누구나 한 번쯤 이런 생각에 빠져 고개를 축 늘어뜨리고 걸었던 적이 있을 것이다.

양복점, 영화관, 이발관을 지나며 갖가지 생각과 이미지가 떠올랐다가 사라진다.

 

“이발관의 냄새는 날 소리쳐 울게 한다.” 무슨 추억이 떠오른 것일까.

건물들과 정원과 상점들이 보인다.

발과 손톱이 싫고, 머리칼과 그림자가 지겹다.

가끔은 신체의 일부분이 거추장스럽기도 하다.

 

산책을 하면서 심각한 생각들만 떠오르는 것은 아니다.

장난기 어린 생각들도 떠오른다.

공증인을 놀라게 하고, 수녀를 골려주고, 칼을 들고 소리를 지르며 돌아다닌다는 것과 같은.

 

산책은 그 뒤로도 계속 된다.

산책은 아무런 목적도, 이루자하는 것도, 결과를 원하는 것도 아니다.

그냥 돌아다니는 것, 그냥 걸어다는 것이다.

 

숨을 쉬며, 쉼을 얻고, 자연과 호흡하면서 긴장했던 몸을 풀고, 마음에 쌓였던 감정의 찌꺼기를 내보면서 뭔가 텅 빈 느낌으로 걷는 것. 텅 빈 가슴으로 바람이 들고나는 것을 가만히 바라보는 것.

 

때로는 뒷골목이나 쓰레기장, 병원 뒤편을 걸을 수도 있다.

아름다운 풍경만 펼쳐지는 것이 아니라 도시의 추한 뒷모습이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산책은 그저 눈에 들어온 것을 마음으로 흘려보낼 수 있다.

 

산책이 끝나면 어떤 느낌이 남을까.

어떤 앙금도 남아 있지 않는다면 산책은 베리 굿!

 

이 시는 다소 우울한 산책인 것처럼 보인다.

산책을 하면서 인생에 대한 깊은 사색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끔은 이런 산책이 인생을 더 풍요롭게 한다는 것은 우리는 알고 있다.

 

인생에는 밝은 면만 있는 것이 아니라 어둠도 있다.

마찬가지로 산책에는 그늘이 있다.

생의 어둠이 깃든 그늘이.

 

'독서 리뷰' 카테고리의 다른 글

파블로 네루다 <난 내 이름을 모른다>  (0) 2020.06.25
한강 <몇 개의 이야기 12>  (0) 2020.06.25
김기택 <틈>  (0) 2020.06.24
김영승 <아름다운 폐인 >  (0) 2020.06.23
옥타비오 빠스 <연인들>  (0) 2020.06.23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