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르만 헤세 <데미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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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리뷰

헤르만 헤세 <데미안>

by 브린니 2020. 5. 29.

데미안은 누구일까?

이 책을 읽고 나서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다면, 작가의 의도에 근접한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헤르만 헤세는 기독교 선교사 아버지 밑에서 자라나면서 인도 여행을 통해 동양의 종교와 가치관을 접했습니다. 기독교 가치관과 동양 종교의 가치관을 동시에 접하면서 세상을 이해하는 두 가지의 가설을 바라보았을 것입니다.

 

서구 기독교의 직선적 세계관, 선과 악을 둘로 나누는 이분법적 세계관에 비해서 동양의 세계관은 윤회를 바탕으로 한 원형적 세계관이며 선과 악이 명확히 구분되지 않아 탄생과 죽음이 하나로 이어지는 생명사상입니다.

 

기독교의 신은 전적으로 선한 신이며 악한 마귀를 굴복시키는 속성을 갖지만, 동양의 신은 그 자체로 선과 악을 함께 내포하여 생명과 탄생, 죽음과 파괴가 반복되는 영원 회귀의 속성을 갖습니다.

 

아마도 인도에서의 헤세는 밝고 선한 세계, 지혜와 사랑이 강조되는 기독교 가정에서 예배를 드리다가 문득 문을 열면 문밖에서 펼쳐지는 생명 탄생의 신이며 동시에 파괴와 죽음의 신인 시바에게 드려지는 예배를 보며 두려움을 느꼈을지 모릅니다.

 

마치 밝고 따뜻한 세계 속에서 사랑을 받으며 자라던 싱클레어가 어둠의 세계 속 크로머를 만나 두려움의 동굴 속으로 빨려 들어가듯이 말입니다.

 

서구 기독교 세계는 1,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선한 신의 보호와 섭리 아래 마침내 잃어버린 낙원을 회복하리라는 낙관론에 대해 심각한 회의를 느낍니다.

 

잔인한 전쟁 속에 죽음의 파티를 벌이면서 과연 이천년 가까이 자신들의 삶을 이끌어오던 기독교 신앙의 힘이 이것뿐인가, 좌절하고 절망합니다.

 

전쟁에 참전하였던 헤세뿐 아니라 이 시기의 수많은 작가와 철학자들이 동시다발적으로 같은 고민을 하면서 기독교 신앙의 한계에 대해서 의문을 던지고 새로운 길을 모색합니다.

 

세계관이 무너진다는 것은 인간 존재의 기반이 흔들리는 것과 같습니다. 온 마음과 정신과 영혼이 찢어지는 고통 속에서 그들은 살기 위해 기독교 신앙의 한계를 극복하는 길을 찾습니다.

 

헤세는 그 길을 그가 경험한 동양적인 신적 개념과 세계관에서 찾습니다. 마치 새가 알 껍질을 깨고 날아가듯이 기독교 신앙의 부서진 한계를 뚫고 날아올라갑니다. 그 새가 향하는 곳은 선과 악이 하나인 신 아브락사스입니다.

 

수많은 어린 청년들이 죽어간 전쟁터에서 그 참혹함을 견디지 못해 헤세는 그 죽음에 의미를 부여하고 싶었을지 모릅니다. 그 개죽음이 의미가 있기를, 새로운 의미의 시작이기를, 데미안이 전쟁터에서 죽지만 싱클레어의 영혼에서 영원히 살아 싱클레어가 데미안이 되기를 바랐는지 모릅니다.

 

각 개인이 단 한 번의 인생으로 심판을 받아 각자 개별적으로 천국과 지옥에 이르는 형태의 직선적 기독교 세계관의 한계를 깨고, 헤세는 데미안과 같이 전사한 이들이 영원히 우리 안에 남아 있기를 원했을지도 모릅니다.

 

헤세는 나아가 모든 기독교적 이분법의 한계를 극복하려 합니다. 선과 악, 여성과 남성, 어머니와 애인으로 구분되는 이분법이 헤세에게서 무너집니다. 데미안의 어머니 에바 부인이 여성이면서 남성 같고, 어머니이면서 애인 같고, 선하면서도 악해 보이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 모든 것이 통합될 때 아브락사스와 같은 새로운 존재가 됩니다. 밝음과 어둠을 모두 내포하여 다스리며, 시간과 공간의 제약에 휘둘리지 않으며, 시대와 사명을 두려워하지 않고, 마침내 죽음도 굴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데미안과 같은 존재가 됩니다.

 

데미안은 크로머와 같은 어두운 존재를 다스리고, 시간과 공간의 제약이 없이 마치 싱클레어의 부름을 알고 있다는 듯 나타나며, 전쟁의 기운을 미리 예감하고, 기꺼이 전쟁터에 나아가 죽습니다.

 

전쟁을 통해 자신은 죽지만 그렇게 세계는 파괴를 통해 또다시 태어나는 거라는 믿음 속에서 싱클레어에게 입 맞추고 싱클레어 속에 데미안이 있다고 말하고 죽습니다.

 

아까도 이야기했듯이 이 시대의 격변 속에서 많은 사상가들이 헤세와 비슷한 길을 모색합니다.

 

정신분석가 칼 구스타프 융(C. G. Jung)은 헤세처럼 목사 아버지 밑에서 자랐으나 기독교 신앙을 넘어서서 자아를 넘어선 ‘자기(Selbst)’라는 개념을 상정하고, 인간 성숙은 ‘자기’를 발견하여 성숙시키는 과정이며, 그 안에서 헤세와 마찬가지로 선과 악, 탄생과 죽음, 자아와 타아를 넘어선 집단무의식이 발생한다고 이야기합니다.

 

데미안은 싱클레어의 본질적 ‘자기’와 같으며 어린 싱클레어가 성숙해져가는 과정은 데미안적 ‘자기’를 발견하고 처음에는 두려움을 느끼지만 그와 동일화되어가는 과정을 의미합니다.

 

우리나라에도 이와 같은 사상가가 있으니 바로 함석헌입니다. 함석헌 역시 끝까지 자신을 기독교인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인도와 중국의 사상을 연구하여 동양적 세계관과 기독교를 융합하였습니다. 그에게도 융의 ‘자기’가 발현한 집단무의식과 헤세의 데미안이 있으니 바로 ‘얼’입니다.

 

우리가 개인을 넘어선 깊은 성숙의 지경에 이르면, 그가 살았든 죽었든 하나님의 속성과도 같은 ‘얼’을 지니며, 이는 존재의 처음과 끝을 포괄하는 ‘바른 생명의 힘’을 지닙니다.

 

데미안은 싱클레어의 깊은 내면 속에서 추구하는 ‘얼’이며, ‘옳고 바르며, 어둠을 다스리고, 세상을 읽고, 미래를 예지하고, 자기의 작은 할 일을 다하는’ 성숙한 ‘자기’이고, 모든 사람들의 내면에 자리한 ‘집단무의식’입니다.

 

격변의 세계대전은 사상적으로 서양의 기독교 세계관과 동양의 세계관이 융합되는 기적을 낳았습니다. 동시에 창조론에 대한 회의로 진화론과의 융합을 시도한 학자들도 있습니다.

 

테이야르 드 샤르댕 신부는 <인간현상>에서 고고학 연구로 진화론과 창조론을 융합하려 했지만 가톨릭에서 파문당했습니다. 반면 앙리 베르그송은 <창조적 진화>에서 생물학 연구를 통해 진화가 창조적이라고 주장하여 노벨상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아직도 수많은 이분법 속에 살고 있습니다. 동양과 서양, 선과 악, 남성과 여성, 탄생과 죽음, 창조론과 진화론......

 

평온한 시대에는 그 분리가 아무렇지도 않게 느껴지지만, 인생의 격랑이 다가오면 그 인지적 부조화가 우리를 견디지 못하게 합니다. 그것을 미리 경험한 선배들인 헤세, 융, 함석헌 등이 우리에게 알려준 교훈을 다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아직도 <데미안>을 읽는 이유인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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