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시 산책] 이병률 <꽃 때> (feat. 길병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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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리뷰

[명시 산책] 이병률 <꽃 때> (feat. 길병민)

by 브린니 2022. 11. 29.

꽃 때

 

 

저 달이 기울면

한 사람이 가네

아직 전하지 못한 맘

눈 감으면 아파오네

 

꽃 피기도 전에

내 한 사람이 가네

언제 꽃 피면 꽃 보자던 그때

난 기다리네

꽃 때

 

부를 수도 닿을 수도

잡을 수도 없는 사람이여

때 아닌 봄날의 눈보라에

무너지듯 숨어버린 이름

이 아픔이 마지막이 아니기를

처음 사랑이길

 

내 가슴을 잘라

이 눈물로 묻고

조금 쓸쓸히 꽃물이 들어도

나 괜찮겠네

 

나 햇살이 되어

저 달을 보내고

꽃잎 시들어 쌓이는 이때를

나 견디겠네

꽃 때

 

이병률

 

 

 

산책

 

 

저 달이 기울면

한 사람이 가네

아직 전하지 못한 맘

눈 감으면 아파오네

 

 

달을 보면서 추억에 잠기는 것은 시대를 막론하고 흔히 있는 일인가보다.

달을 보면 떠오르는 사람이 있는가.

어쩌면 달과 관련해서 생각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달을 보면서 자신의 생각을 달에 투영한다.

달이 참 밝다.

달이 참 둥글다.

이것은 달을 묘사하는 말이 아니다.

자기 심정을 달을 보면서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것이다.

달이 밝거나 둥글다는 것은 하나의 자연현상일 뿐 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달에 빗대 말하는 것을 즐긴다.

왜일까.

달은 동경이면서

달은 소망이면서

달은 이상향이면서

달은 이룰 수 없는 꿈이나 사랑을 떠올리기 때문이다.

달이 기울 때는 왠지 서글퍼지고

달이 차면 왠지 마음이 뿌듯해지는 것도

흔한 자연현상에 내 마음을 얹히는 집단무의식이다.

 

달이 기울 때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나는 그 사람에게 내 마음을 전하지 못했고,

이유를 알 수도 없이 그 사람은 떠나고 지금 여기 없다.

달이 기울어 다 없어지는 것처럼

마음은 아프고 슬프다.

 

 

꽃 피기도 전에

내 한 사람이 가네

언제 꽃 피면 꽃 보자던 그때

난 기다리네

꽃 때

 

 

휴대전화가 없었을 때

어쩌면 전화조차 없었을 때

편지를 보내면 며칠 기다려 답장을 받았을 때

그때는 사람이 어떻게 소식을 전하고,

어떻게 약속을 하고,

어떻게 만났을까.

 

어디 어디서 몇 시에 만나자고 약속을 하고,

그날 하루 종일 그곳에서 누군가를 기다려본 적이 있는가.

 

오늘에는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누군가를 기다린다는 것!

 

꽃 피면 만나자는 약속

이런 약속은 정말 할 수 없는 것일까.

 

옛적 농경사회에서,

눈이 오면 길이 막혀 갈 수 없고,

눈이 녹는 봄까지 기다려야 길이 열리고,

꽃이 필 때에서야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 자유롭게 왕래하던 시절에나 가능한 일

 

꽃 피면 꽃 보러 가자던 약속!

 

꽃이 피기도 전에 사랑하는 사람은 어디론가 가고 있다.

꽃이 피면 꽃 보러 가자던 사람이.

 

그러나 나는 꽃이 피는 때를 기다린다.

대개는 봄이지만

꽃이 피는 때는 봄일 수도

여름일 수도 가을일 수도 있다.

 

산에는 꽃 피네,

꽃이 피네

갈 봄 여름 없이

꽃이 피네

 

소월은 꽃피는 시절이 가을 봄 여름이 없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내가 꽃 피는 때는 기다리는 것은

어느 계절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일년 열두 달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리는 것이다.

 

 

부를 수도 닿을 수도

잡을 수도 없는 사람이여

 

부를 수도 닿을 수도 잡을 수도 없는 사람이란 어떤 사람일까?

혹시 이 세상엔 없는 사람일까?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

허공 중에 헤어진 이름이여!

불러도 주인 없는 이름이여!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앞의 연이 소월의 산유화를 연상케 한다면

이 연은 소월의 초혼을 떠올리게 한다.

 

때아닌 봄날의 눈보라에

무너지듯 숨어버린 이름

 

봄날엔 꽃이 피어야 하는데 눈보라가 친다.

 

달에 마음을 싣듯이

봄날의 눈보라는 뭔가 예기치 못한 사건이 발생했음을 뜻한다.

 

무슨 일일까.

 

사랑의 장애물은 사랑을 방해하는 것이지만

장애는 사랑에 더욱 강렬한 열망을 불어넣는다.

 

장애가 클수록 사랑은 더 불타오른다.

 

이 아픔이 마지막이 아니기를

처음 사랑이길

 

봄날의 눈보라에 숨어 버린 사람이기에

이름조차 부를 수 없지만

사랑은 더 절절하다.

 

이것으로 사랑이 끝나지 않는다.

이것은 오히려 사랑의 시작일 뿐이다.

 

마지막이 아니라 처음

꽃 피고 함께 꽃을 보며 사랑을 나누지 않은,

그러니까 사랑이 시작조차 하는 처음이라는 것이다.

 

 

내 가슴을 잘라

이 눈물로 묻고

조금 쓸쓸히 꽃물이 들어도

나 괜찮겠네

 

이 구절은 소월의 진달래꽃을 떠오르게 한다.

 

가시는거름거름

노힌그ᄭᅩᆺ츨

삽분히즈려밟고 가시옵소서

 

자신의 몸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내어주어서라도 사랑을 지키겠다는

불타는 사랑의 열망이 드러나고 있다.

 

진달래꽃에서 시적 화자가 자신의 몸과 진달래꽃을 동일화하여 그 몸을 밟고 가라는 것처럼

꽃 때의 화자는 자신의 몸을 잘라(피를 내어) 그것을 땅에 묻고 거기서 꽃이 피기를 기다리겠다는 것이다.

 

자신이 꽃이 되어 사랑하는 사람이 밟으면 꽃물이 퍼질 것이다.

마찬가지로 자기 가슴을 잘라 묻으면 자신의 몸은 꽃물()로 물들 것이다.

 

그만큼 사랑은 깊고, 아프다.

 

 

나 햇살이 되어

저 달을 보내고

꽃잎 시들어 쌓이는 이때를

나 견디겠네

꽃 때

 

처음에 시인은 달을 보면서

가는 사람을 그렸지만

 

이제 화자는 스스로 햇살이 되어 꽃을 피우려고 한다.

꽃이 피려면 먼저 꽃이 져야 하고 꽃이 시들어 거름이 되어야 한다.

 

아름답던 꽃이 썩고 흔적 없이 사라지는 모든 날들을 견디고

다시 꽃이 피는 날을 나는 기다릴 것이다.

 

사랑은 아픔이며 고통이지만

그것을 견디고 이겨내면서

사랑이 꽃피는 것을 견디는 것은

사랑의 믿음이다.

 

이 믿음 속에서

사랑은 다시 꽃처럼 필 것이다.

 

꽃 때!

사랑이 피는 어느 날,

봄날이든

가을날이든

한여름이든.

 

길병민(Gil, Byeong-Min) - 꽃 때(A Time to Blossom) - 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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