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시 산책] 고진하 <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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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리뷰

[명시 산책] 고진하 <빈들>

by 브린니 2022. 12. 17.

빈들

 

 

늦가을 바람에

마른 수숫대만 서걱이는 빈들입니다

희망이 없는 빈들입니다

사람이 없는 빈들입니다

내일이 없는 빈들입니다

아니, 그런데

당신은 누구입니까

아무도 들려 하지 않는 빈들

빈들을 가득 채우고 있는 당신은

 

―고진하

 

 

【산책】

 

가을걷이가 끝난 빈 들판을 바라보면 어떤 생각(느낌)이 드는가?

빈들엔 바람만이 불어왔다가 머물지도 않고 흘러간다.

 

여름과 가을, 그렇게 풍성했던 벌판이, 푸르고 생명력 넘치던 들판이 지금이 마치 아무것도 없었던 양 텅 비어 있다.

그런 빈들을 보고 있으면 마치 텅 빈 자신의 마음을 보는 것 같기도 하다.

 

마음에도 빈자리가 있고, 구멍이 뚫려 있는 것 같고, 황량하고 고독하다.

어쩌면 당신도, 우리들 모두 마음에 빈곳이 있고, 아픔이 있고, 슬픔이 있고, 고통과 불행을 겪으며 살고 있다.

 

그래서 빈 들판을 보고 있으면 더더욱 마음이 쓸쓸해지고 황량하고 세상에 혼자 있는 느낌이 드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게 홀로 들판에 서 있으면

빈들이 오히려 너무나 평온해보고 여유있어 보인다.

 

모든 것을 다 내어준 뒤 텅 빈 채 마치 무욕無慾의 상태로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빈들!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는 사실이 오히려 무언가를 갖고자 했던 모든 욕망들을 물리치는 느낌이 든다.

아무것도 없고, 아무것도 아닌 상태를 빈들이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이 갖고 모든 것들을 다른 사람에게 다 내어주고 나면 저렇게 텅 빈, 마치 해탈하는 느낌에 도달하는 것일까.

 

 

프랑스의 철학자 시몬 베유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언제나 모든 개별적인 대상들을 넘어서서 빈 채로 바랄 것, 빈자리를 바랄 것. 우리가 그려볼 수도 정의할 수도 없는 선善은 빈자리다. 하지만 그 어떤 충만함보다도 가득 찬 빈자리다.

 

텅 빈 마음의 빈자리 그 자체를 인지하고, 느끼고, 그것을 응시하는 것, 그것이 선으로 가는 첫걸음인지도 모른다.

비어 있다는 것은 그 자체로 절대적 선, 즉 신을 기대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시몬 베유는 빈자리를 바라는, 그러니까 아무것도 아닌 상태를 소망 없이 바라는 것에 대해 이렇게 덧붙인다.

 

그 상태에 이르면 모든 게 해결된다. 신이 빈자리를 채워주기 때문이다.

 

 

빈들을 가득 채우고 있는 당신

빈들을 채우는 당신은 신인가?

 

선善인가?

진리眞理인가?

미美, 아름다움 그 자체인가?

 

그 무엇이든 그것은 비어 있음으로부터 비롯된다.

 

 

늦가을, 바람에 마른 수숫대만 서걱거린다.

빈들이 무방비상태로 펼쳐져 있다.

 

더는 희망이 없어 보이고, 사람들 인적도 매우 드물다.

씨앗을 뿌리고 열매를 거두고 하는 일들이 그려지지 않을 정도로

내일이 없어 보인다.

 

오로지 텅 빈 벌판일 뿐이다.

 

그런데 이 들판이 뭔가 가득 차 보인다.

 

눈에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데 어떤 기운이, 어떤 의지가 이 텅 빈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아무도 없는데 빈들을 가득 덮고 채우는 느낌은 무엇일까.

 

자연을 넘어선 초자연의 느낌.

 

그때 우리는 비로소 신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한다.

한 번도 여기 있다고 느낀 적 없는데 갑자기, 이 공간에 지금 이 순간에

여기 계신 누군가의 존재를!

 

그래서 우리는 묻는다.

당신은 누구입니까?

 

아무도 들려 하지 않는 빈들을 가득 채우고 있는 당신은 누구이십니까?

 

신의 존재에 대해 관심이 생기고 신의 존재를 묻는 이 시간,

모든 것이 비어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빈들에 눈이 내려 쌓인다.

어쩌면 신이 눈의 모습을 하고 내려오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파트단지 공원에서 아이들이 놀면서 크리스마스다! 하고 외친다.

아이들은 눈이 내리면 모든 날이 크리스마스라고 느끼는 것이다.

 

그렇다. 축복처럼 눈이 온다.

 

인류를 구원할 메시아가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온 것처럼.

모든 날들이 축복이 넘치는 성탄절이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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