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몬 베유 <중력과 은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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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리뷰

시몬 베유 <중력과 은총>

by 브린니 2023. 5. 30.

중력과 은총 시몬 베유

 

어떤 영적인 영감이나 깨달음이 진정으로 빛을 발하기 위해서는 그 영적 깨달음이 어떤 식으로든 실천(현실화)되어야 할 것입니다.

어떤 영적 지도자의 삶이 그의 신학적 이론과 별개일 때 우리가 느끼는 당혹감은 몹시 큽니다.

영적 지도자의 가치는 그의 이론적 깊이나 깨달음의 높이에 따라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즉 그의 말이나 글에 따라서가 아니라 그가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결정되어야 합니다.

결코 깨달음과 실천적 삶은 별개의 것이 아니라 우리의 존재 안에서 하나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시몬 베유는 그의 영적 깨달음의 높이와 깊이뿐만 아니라 그의 삶도 매우 가치 있음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고등학교 철학교사였던 그는 노동조합에 가입하고, 직접 노동 현장에서 투쟁에 앞장섰고, 레지스탕스 운동에도 가담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배우고 깨닫고 믿는 바를 실천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가 쓴 글들은 머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삶에서 나온 것이며 몸이 체득한 것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중력과 은총>은 시몬 베유가 살면서 깨달은 영적인 감동을 짧은 글들로 표현한 책입니다.

그는 영혼의 모든 자연적 움직임은 물질계의 중력 법칙과 유사한 법칙들에 의해 지배된다. 은총만이 예외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물질계의 중력 법칙 즉 과학 법칙에 따르면 원인과 결과에 따라 어떤 사건이 발생하고 종결됩니다. 부실 공사를 하면 건물이 무너지고, 죄를 지으면 벌을 받고, 파멸하게 됩니다.

 

그러나 은총은 다릅니다. 은총은 모든 사람에게 햇빛과 물과 공기를 내립니다. 그가 선하든 악하든 상관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은총은 악인과 죄인을 막론하고 구원에 이르게 합니다.

 

동시에 은총은 아주 특수한 환경과 상황에서 매우 특이한 방식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은총이 내리지만 다른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을 평생 경험하지 못하기도 합니다. 은총은 언제 임할지 예측할 수 없으며 결과를 알 수도 없습니다. 그것의 의미와 가치 또한 측량하기 어렵습니다. 은총이 중력 법칙을 거스르는 것이라면 그것의 깊이와 넓이와 높이를 가늠할 수 없는 것입니다. 중력 법칙이 일상이라면 은총은 초월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은총이 초월이라고 해서 그것을 변화산에서 일어나는 어떤 것, 전적으로 영적인 어떤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은총은 우리 삶 가운데 역사하는 하나님의 뜻인 동시에 우리가 선택하고 감당하는 어떤 것입니다.

중력의 법칙 속에서도 우리는 선과 악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은총의 영역에서도 선을 선택하고 짊어질 수 있습니다.

 

중력과 은총을 반대되는 것으로 읽을 필요가 없습니다. 중력 법칙을 통해 살아가는 우리가 은총이라는 뜻밖의 선물을 알 수 없는 시간과 장소에서 만나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영화에서처럼 크리스마스의 기적을 은총으로 생각합니다.

우리가 어려움을 당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겨 우리를 그 어려움으로부터 구해내시는 것, 그것을 은총이라고 부릅니다.

암에서 고침을 받거나 경제적 어려움에서 벗어나는 것 등, 우리는 고통이 행복으로 변하는 것을 은총으로 생각합니다.

 

또한 우리는 이 세상이 너무나 고통스럽고, 악이 선을 이기는 모습을 많이 보았기 때문에 악이 패배하고 선이 승리하고 이 땅에 정의가 실현될 때 마치 그것을 신의 은총으로 여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그것 또한 중력 법칙이 잘 작동한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은총은 우리가 전혀 예상할 수 없는 방식으로 우리에게 닥칠 수 있습니다.

고난이 은총이라는 말처럼 말입니다.

고난을 통해 배운다, 고난을 통해 정금 같이 빚어진다, 이런 말처럼 행복이 아닌 고난이 은총이라는 이름으로 우리에게 퍼부어질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시몬 베유는 우리가 생각하는 행복한 은총과는 다른 은총을 이야기합니다.

불행이나 고난이 닥칠 때 그것을 신의 은총으로 인식하고 그 은총에 합당한 삶을 사는 것을 권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고난이 올 때 우리는 그것을 결코 신의 은총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만약 우리가 아무런 죄도 없는데 고난을 당한다고 한다면 그것은 중력 법칙의 영역이 아니라 은총의 영역으로 들어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십자가 죽음이 바로 그것입니다.

아무런 죄도 없는 분이 모든 죄를 뒤집어 쓰고 고난 당하고 죽는 것, 그것이 대표적인 신의 은총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은총과 관련지어 생각할 때 우리는 인간 예수의 모습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 즉 메시아로서의 사명을 갖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것은 인간을 대속하기 위해 대신 죽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으로 오셨기에 십자가의 극심한 고통과 죽음의 두려움 때문에 괴로워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신의 아들이었기 때문에 십자가의 고통이나 죽음의 두려움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고통의 잔을 기꺼이 받아 마셨습니다. 신의 은총에 십자가의 죽음으로 화답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난을 오로지 인간으로서 담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성육신은 하나님이 인간과 하나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너희도 나처럼 하라고 말씀하신 것은 당신이 인간으로 사셨기에 가능한 말씀입니다.

 

성육신은 하나님과 인간이 하나가 되는 사건이었고,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의 계획에 인간 예수가 전적으로 동의하고 합력한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은총은 전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난 것인 동시에 인간이 전적으로 행하는 사건입니다.

 

그래서 은총의 대표 사건이 십자가인 것입니다.

 

 

예수의 제자로서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현재는 성경에 기록된 말씀)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삶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사랑하셔서 세상으로 오셨고, 사람들과 어울려 사셨고, 사람들과 사랑을 나누셨고, 사람들을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마지막으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부탁하셨습니다.

내가 산 것 같이 너희도 그렇게 살라고 부탁하신 것입니다.

 

기독교를 사랑의 종교라고 부릅니다.

그렇다면 누구를 사랑하라는 것입니까?

그 사랑의 대상은 누구입니까?

그것은 바로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사람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교회를 오래 다니신 분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더 먼저라고 주장할 수도 있습니다.

당연히 맞는 말씀입니다. 예수님도 그것이 첫째 계명이라고 말씀하셨으니까요.

그런데 기독교를 사랑의 종교라고 할 때 그 대상이 하나님이라고 하면 좀 이상하지 않나요?

기독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종교다. 그게 틀린 말은 아니지만 기독교가 사랑의 종교라고 할 때 그것은 기독교가 세상에 사랑을 전하는 종교,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실천하는 종교라는 뜻이 아닐까요.

 

그러므로 사랑이 기독교의 최종 가치이며 덕목이자 그것을 실천하는 것이 기독교의 사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기독교인으로서 사랑을 실천해야 하는 대상은 누구일까요?

그것은 바로 나 말고 다른 사람, 소위 이웃으로 지칭되는 세상 모든 사람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로서 우리가 행해야 하는 첫 번째는 사명은 서로 사랑하는 것,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독교를 믿는 것과 교회 나가서 예배하는 것을 동일시합니다.

그래서 교인의 첫 번째 사명을 교회 나가서 예배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주일성수를 목숨처럼 여기고, 코로나 시대에도 예배를 강행합니다.

이단들이 그렇게 예배하다 많은 어려움을 겪는 것을 뻔히 보고도 주일성수와 예배사수를 외치기도 합니다.

 

교회에 나가서 예배하는 것을 목숨보다 중히 여기시는 분들은 이사야나 예레미야서를 다시 한 번 읽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선지서에는 수많은 제사가 있었지만 결국 망하게 될 것이라는 예언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제사는 백성들에게 정의와 평화와 사랑을 베푸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성전에 헌금하기 전에 친구와 화해하라고 말씀하셨고, 선한 사마리아 사람 비유를 통해 이웃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제사에 매달리는 제사장과 율법사들을 비판하셨습니다.

 

평생 예수를 믿었다는 한 권사님이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순교할 수도 있지만 과연 이웃을 사랑하는지 확신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반쪽짜리 믿음일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첫째 계명이라면 둘째 계명은 이웃을 사랑하라이며 이것은 첫째 계명과 같은 것이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누군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한다면 그는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세상 사람(이웃)들을 미친 듯이 열렬히 사랑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우선시 하기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법은 결국 예배뿐이라고 여기게 되었고, 주일성수와 예배에 목숨을 걸고 있습니다.

주일 낮밤, 새벽기도, 수요, 금요기도, 구역예배, 각종 성경공부, 제자훈련 등 예배와 유사 예배를 통해 성도들을 예배에 매달리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예배와 성경공부, 제자훈련이 예수님의 삶과 말씀과 가르침에 따라 살기를 원해서라면 우리는 어떻게 하면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서 살 수 있을 것인가에 초점을 맞춰야 합니다.

 

다시 돌아가 기독교가 사랑의 종교라면 그 대상은 누구입니까?

바로 우리 이웃입니다.

그런데 현재 우리 교회에는 사람이 없습니다.

사랑의 종교라는데 사랑의 대상인 사람에 대한 생각1도 없습니다.

 

전도와 선교가 그리스도인의 사명이라면 왜 전도하고 선교하는 것입니까?

그들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되어 서로 사랑하며 살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모두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선한 백성으로 사는 것이 우리 인생의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선한 백성이 이 땅에 살면서 이루어야 할 사명이 있다면 바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중력과 은총>은 약하고 가난하고 핍박당하는 이웃들과 함께 고통당하면서 투쟁했던 시몬 베유의 삶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책입니다.

 

그는 우리에게 알 수 없는, 근거 없는, 부당한 고통이 올 때 이유를 찾거나 거부하거나 이후에 위로나 보상을 원하지 말고 그저 묵묵하게 그 고통을 담당하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은총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는 알 수 없는 일들이 많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 아름다운 여성이 불의의 사고로 아름다운 모습을 잃고 고통 속에 살고 있지만 그녀의 간증을 들으면 그것이 하나님의 은총이라는 것입니다.

믿을 수도 없고, 믿고 싶지도 않습니다.

불행과 고통이 어떻게 신의 은총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을까요.

 

그러나 기독교는 십자가의 종교입니다.

누군가의 고통이 신의 은총이라면 그것은 다른 사람의 대속을 위한 것일 수 있습니다.

나의 고통이 다른 사람을 구원하는 것이라면 그것을 은총이라고 부를 수 있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은총임을 우리가 모두 다 알고 믿듯이.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로서 그리스도의 고난은 은총이라고 말하면서 우리의 고통은 빨리 벗어나야 할 어려움이라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에게 죄가 있어서 고난을 당하는 것이라면 아무런 유익도 없고, 은총이라고 부르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것이 은총이 아니라고 부정할 수도 없습니다.

만약 죄가 있어 고난 당하는 사람이라도 그가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그는 구원의 길에 들어선 것이며 고난 후에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로 그의 고난도 은총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보다 차원 높은 고난은 죄없이 당하는 억울하고 부당한 고난일 것입니다.

중력 법칙을 벗어나는 초월적인 은총은 합리적인 이론을 넘어섭니다.

이 때 우리는 그 은총이 고난이든 행복이든 죽음이든 담담히 받아들이고 그 은총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시몬 베유가 <중력과 은총>에서 말하는 핵심입니다.

 

 

신이 십자가에 못 박혔다.

생각하는 유한한 존재로서 내가 십자가에 못 박힌 신임을 알 것.

십자가에 못 박힌 신을 닮을 것.

너무 순수하고 또 신들을 너무 많이 사랑해서 벌 받은 인간, 인간적인 것과 신적인 것이 가까워지면 형벌을 초래한다.

 

우리 존재 속에서 신이 찢긴다.

우리는 신이 겪는 십자가형이다.

신의 사랑은 우리에게 수난이다.

어떻게 선이 고통없이 악을 사랑할 수 있겠는가.

신과 인간이 서로 사랑하는 것은 고통이다.

 

찢김 없이는 신이 인간을 향해 내려오는 것도 인간이 신을 향해 올라가는 것도 생각할 수 없다.

 

우리는 신이 우리에게 오기 위해 지나온 시간과 공간의 무한한 두께를 지나야 한다. 신과 인간의 관계에서 가장 큰 것은 사랑이다.

 

대속의 고통은 고통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순수한 상태 그대로 실제로 존재하게 하는 고통이다. 존재를 구원한다.

 

죄 없이 고통 받는 자는 악 위에 구원의 빛을 퍼뜨린다. 죄 없이 고통 받는 자는 우리가 볼 수 있도록 드러난 죄 없는 신의 형상이다. 따라서 인간을 사랑하는 신과 신을 사랑하는 인간은 고통 받아야 한다.

 

시몬 베유 <중력과 은총> 십자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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