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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뤽 고다르 (Jean-Luc Godard)
프랑스 문화원에서 프랑스 영화를 공짜로 틀어주던 시절, 장 뤽 고다르의 <네 멋대로 해라>를 본 적이 있다. 처음엔 그 영화의 제목도 모르고 감독이 누군지 배우가 누군지도 몰랐다. 프랑스어는 지금도 잘 모른다. 나중에서야 그 영화가 그 유명한 ‘네 멋대로 해라’인지 알게 됐다. 그때 아무것도 모르면서 ‘세상에 이런 영화도 있구나’ 하면서 너무나 재미있게 보았었다. 그 뒤 감독 이름을 알게 되었고 <장 뤽 고다르>란 책을 읽었다. 어쩌면 책을 영화보다 먼저 읽었는지도 모른다.
누벨바그라는 영화 스타일을 만들어낸 천재 감독, 장 뤽 고다르. 그의 영화는 가식 없는 현실을 보여주었고, 동시에 완벽하게 연출된 현실을 보여주었다. 그의 영화는 영화라기보다는 소설에 가까웠고, 카메라로 쓰는 소설이라는 별명도 붙었지만 영화의 미장센이나 스펙터클 대신에 몇 명의 사람들이 떠들고, 엉뚱하게 행동하고, 주인공의 내면을 설명하지 않고 그냥 보여주었다.
고다르의 영화가 없었다면 짐 자무시의 <천국보다 낯선>이란 영화는 탄생할 수 없었을 것이다. 영화는 고다르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는 말처럼 고다르는 현대 영화의 선구자이다. 소위 예술영화라고 불리는 그런 영화에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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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그리트 뒤라스 (Marguerite Duras)
<연인>이라는 책은 로맨스을 넘어선 에로틱한 스토리를 들려준다. 그러나 그보다 한 소녀가 숙녀로 여자로 인간으로 성숙해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영화와 함께 소개되어 예쁜 사진과 엽서가 첨부된 책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읽혔다. 하지만 뒤라스는 열렬한 마니아를 빼고는 아직도 읽기 어려운 작가 중 한 명이다.
누보로망 작가 클로드 시몽이 노벨문학상을 받았을 때 사람들은 뒤라스가 받았어야 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뒤라스처럼 독특한 작가에겐 노벨문학상을 받지 못한 제임스 조이스나 프란츠 카프카, 마르셀 프루스트와 같은 길을 걷는 것이 더 어울릴 것이다.
뒤라스는 알렝 레네의 영화 <히로시마 내 사랑>의 각본을 썼다. 그 뒤로 자신이 직접 영화를 만들었다. 고다르와는 반대로 펜으로 영화를 쓰려고 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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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라스와 고다르가 만나서 대화를 나누다
1979년, 1980년, 1987년 뒤라스와 고다르는 세 번에 걸쳐 영화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물론 영화 말고 다른 이야기도 한다.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나 개인적인 삶과 생각들.
영화를 매개로 하는 대화인 이상 영화를 만드는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요소 ‘말과 이미지’에 대한 생각이 전면에 등장할 수밖에 없다.
누벨바그가 무성영화 시절의 스타일을 복원하려는 생각을 가졌을지라도 말 없이 영화를 만들 수는 없었다. 또한 스펙터클과 같은 이미지의 과잉이 영화를 헤친다고 해서 이미지 없는 영화를 만들 수도 없다.
말이 철저하게 절제된, 의미와 주제와 서사가 거의 생략되고, 이미지 또한 사진 몇 장으로 축소되어 주인공(사람)의 존재와 행위가 부각되고 소위 인생 컷처럼 관객의 인상에 깊이 박히는 이미지를 보여주는 것이 누벨 바그의 영화가 추구한 것(혹은 결과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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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대화는 고다르의 영화 <할 수 있는 자가 구하라(인생)>의 촬영이 계기였다. 1979년 10월 고다르는 뒤라스에게 자신의 영화에 출연해달라고 요청하지만 거부당한다. 대신 뒤라스와 대화를 나누며 이를 녹음해서 몇 문장을 영화의 사운드 몽타주로 사용했다. 대화는 고다르가 거주하던 스위스 로잔에 위치한 어느 학교와 고다르가 운전하던 차 안에서 이루어졌다.
대화를 나눈 장소가 어느 학교의 계단이나 자동차 안이라는 점에서 인터뷰 자체가 어떤 상식을 벗어난 것이었다. 이 대화를 영화로 찍었다면 소란스러운 소리들(말) 속에서 서로의 말을 들으려고 애쓰고, 또 자기 생각을 말하려고 애쓰는 남녀주인공들의 비껴가는 말들을 보여줄 것이다. 말들이 서로 겹치지만 결국 제대로 들리는 말은 없는 그런 이미지, 매우 역설적인, 말의 홍수와 알아들을 수 없음(결국엔 침묵에 가까운), 너무 소리가 많아서 말이 정지하는 순간을 보여주는 장면일 것이다. 결국 무성영화처럼 보이는 단순한 이미지.
고다르는 영화에 너무 말이 많다고 생각한다. 뒤라스는 영화에서 텍스트들을 접히도록 한다고 말한다. 말(설명)이 많이 필요한 장면들 대신에 이미지 몇 컷으로 하여금 텍스트를 대신하는 것이 두 사람의 영화의 공통점일 수도 있다.
고다르는 말이 지나치게 권위를 가지고 있다고 믿고 이것이 영화의 이미지를 방해한다고 생각한다. 뒤라스는 낱말의 무한한 증식을 이미지가 대신할 수 없다고 맞선다.
두 사람의 생각이 다르지만 영화의 결과물은 어느 정도 유사하다. 말의 서사가 부정되고 이미지의 과잉도 절제된다. 침묵으로 말을 보여주고, 서사가 이미지로 대체되는 것. 그리고 두 사람 모두 배우가 재현하는 것을 몹시 싫어한다. 배우가 어떤 현실 상황을 재현함으로써 서사를 전달하려는 영화 스타일은 늘 배제된다. 왜냐하면 이를 통해 주제와 의미를 부각하려는 시도를 현대적이지 못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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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고다르는 ‘근친상간’이라는 테마를 두고 뒤라스와 공동 작업을 하려 했다. 두 사람은 근친상간과 이를 재현하는 문제에 대한 생각을 교환하지만 실제 공동 작업으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근친상간 테마를 이야기하면서 뒤라스는 이런 말을 한다.
“여자아이는 남아에 비해 쓸모없는 아이라고 여길 거야. … 가부장에게는 잉여라 할까. 어쩌면 딸은 가부장에게 유희적 측면이겠지. 물론 열정적인 유희라 할 수 있겠지. 어린 시절부터 딸은 아들처럼 조종할 수 없으니까.”
딸은 아버지에게 쓸모없는 잉여이다. 그러므로 실용이 아닌 유희적인 측면이며 그것도 매우 열정적인 유희이다. 왜냐하면 딸은 아들처럼 조종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딸의 특성은 쓸모없는 잉여이자 유희이며 조종할 수 없는 (욕망의) 대상이다. 라캉이 말하는 대상 a처럼 들린다. 딸이 아버지에게 근친상간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이유라면 이유일 것이다.
오이디푸스 신화에서는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근친상간을 하게 된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가부장 아버지가 딸과 근친상간을 할 가능성이 높다. 아버지가 많은 여자들을 독차지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아들은 아버지를 죽이고 자신의 자리를 차지해야 할 이유가 있는지도 모르겠다.
뒤라스는 근친상간을 다루면 영화는 완전히 닫힌 영화가 된다고 말한다.
“근친상간은 집 문턱을 넘지 못해. … 자기 자신에게도 닫혀 있지. 가족 내에서 일어나는 아주 폐쇄적이고, 가족이라는 게토에 완전히 갇혀 있는 거야. … 내가 이 주제를 다루어야 한다면 관능과, 근친상간의 등식이 지닌 관능적인 폭력에 휩쓸려 버릴 걸세.”
뒤라스는 실제 남자 형제들이 있었기에 근친상간적 관능을 폭력적으로 경험했다고 한다. (실제로 경험했다기 보다는 그것이 무엇인지 안다는 뜻일 것이다.)
그러나 고다르는 자신은 딸도 아들도 없으니 근친상간이란 테마는 경험할 수 없기에 표현할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대꾸한다.
“영화는 저 혼자는 갈 수 없는 장소로 데려가는 이동 수단이라고 여겨져요. 그게 흥미롭습니다. 저 자신의 연장 혹은 저 자신을 연장하는 방식이 이런 것이라고 느껴져요.”
뒤라스는 “불가능한 삶을 경험한다는 건가?”하고 묻는다.
고다르는 “가능한 삶을, 경험하지 않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건, 그걸 살아내면 사람은 이미 달라져 버리기 때문입니다. 불가능을 창조할 수밖에 없어요." 하고 대답한다.
고다르의 말은 의미심장하다. 어떤 사람이 어떤 상황이나 사건을 살아내면 그 뒤로 그 사람은 다른 사람이 된다는 것이다. 즉 인생을 살면 그 경험 때문에 사람은 어떤 식으로든 변화된다는 것이다. 사람은 절대 변하지 않는다는 옛말에 대한 완강한 부정이다.
고다르의 말은 경험은 창조와 성격이 다르다는 것이다. 경험한 것에 대해 말하는 것은 불가능을 창조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2022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에니 아르노는 자신은 오로지 경험한 것만을 쓴다고 말한 적이 있다.)
뒤라스는 ”행복은 행복 이전에 있다, 관능은 오르가슴이 해소하는 것 이전에 있다”는 말로 대꾸한다.
대화 끝에 고다르가 근친상간과 관련된 금기에 대해 말하자 뒤라스는 이렇게 대꾸한다.
“한데 감정의 원천, 관능의 원천은 법의 위반에 있지 않네. 그런 법은 존재하지 않으니까.”
뒤라스는 법의 금기에 대한 위반이 아니라 “불가항력의 금기”가 있다고 덧붙인다. 저항할 수 없는 어떤 것, 그것에 대한 금기. 근친상간 욕망이 인간이 저항할 수 없는 어떤 것이라면 그것 자체에 대해 금기가 존재하는데 이는또 하나의 저항할 수 없는 불가항력이라는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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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세 번째 대화는 고다르의 <오른쪽에 주의하라> 개봉과 뒤라스의 『에밀리 엘』의 출간을 즈음하여, TV 프로그램 <오세아니크>의 기획으로 이루어졌다.
고다르는 그동안 텔레비전 영화에 몰두했었다. 두 사람은 영화와 텔레비전에 대한 제작 방식이나 매체의 성격 등에 이야기를 나눈다.
뒤라스 : 이미지나 줄거리 또는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내용을 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필름의 물질성을 보네. 텍스트를 담은 종이가 투명한 것과 마찬가지야.
필름의 물질성이란 무엇일까? 텔레비전 영화가 필름 대신에 비디오카메라를 쓰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일까. 그 당시엔 비디오카메라에도 테이프를 장착했겠지만 21세기엔 영화나 텔레비전이 대부분 디지털로 촬영하기에 카메라 말고는 물질성을 느낄 수 없다. 더 이상 필름이 없으니까. 아무튼 영화 제작은 물질성으로 가득 차 있다. 영화 촬영장은 기계들의 집합소니까 말이다.
고다르는 텍스트의 어려움에 대해 이야기한다.
“텍스트에는 무언가 무자비한 것이 있어요. 작가가 되려는 의지가 없을 경우에는요. 존재하는 의지가 있고, 존재함에 의해 종지부를 찍고, 당신이 그걸 발견하는데, 그것은 뭔가 극단적으로 어려운 것입니다. 색채, 프레임, 실행의 저항조차 없지요.”
어쩌면 영화 제작은 소설이나 논픽션이 가지고 있는 언어의 힘을 상당히 덜어내고 그것을 이미지로 바꾸는 작업이랄 수 있다. 언어는 직접 말할 수 있고, 의미를 전달하고, 설명하고 분석하고 설득하고 논쟁할 수 있다. 그러나 이미지는 항상 간접적으로 주제와 의미를 전달할 수밖에 없고, 절제된 언어만을 사용해서 서사를 끌고 갈 수밖에 없다.
누벨바그는 카메라로 쓴 소설이란 별칭이 붙을 정도로 오히려 이미지가 절제되어 있다. 반영화적 요소가 많다고 할 수 있다. 누벨바그 영화는 문학도나 인문학자들 사이에서 인기가 많았다. 그러나 종이에 펜으로 쓴 것이 아니기 때문에 언어로 쓴 텍스트가 지닌 풍성함이 거의 없었다. 메마른 언어 텍스트이며 인과성 부족한 이미지 텍스트였다.
뒤라스가 소설 대신 영화를, 펜 대신 카메라를 선택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보이스 오프 장면을 영화에 삽입한 것도 텍스트가 지닌 언어 대신 이미지를 통해 인간의 내면이나 현실에 대한 다른 인식을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뒤라스는 자신의 영화는 결국 모두 책이라고 고백한다. 대신 고다르에게 영화는 사람들이 말하지 않는 영화라고 말한다. 고다르는 뒤라스의 영화가 아름다운 것은 영화로는 만들지 못하는 진짜 책에서 나온 작품이기 때문이라고 응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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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다르이든 뒤라스든 그 어떤 영화작가들이라도 자신의 생각을 관객들에 전달하고 싶어서 영화를 만든다. 물론 돈을 벌고, 대중들의 호응을 얻기 위해 만든 기획상업영화도 있다. 하지만 소위 감독이라는 사람들은 자기가 누군가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나 이미지를 보여주기 위해 영화를 만든다.
영화에 대한 생각은 조금씩 달라도 영화를 만들고자 하는 그들의 욕망은 다 같을 것이다. 어떤 생각이나 이야기를 전달할 때 어떤 방식으로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각기 다른 결과물을 만들어낸다.
그때 가장 중요한 것은 말과 이미지를 어떻게 조작할 것인가일 것이다.
여기서는 말을 하고, 여기서는 침묵하면서 이미지만으로 이야기해야 한다. 이 두 가지 요소를 어떻게 배합하느냐에 따라 영화는 서사를 만들고, 놀라운 이미지 미학을 완성한다.
고다르는 영화가 가지는 이미지의 풍성함을 극도로 자제하고 펜으로 소설을 쓰듯 간략한 이미지만으로 오히려 아주 인상적인 이미지 텍스트를 만들어낸 거장이다.
뒤라스 역시 언어만으로는 보여주지 못하는 영화 장면들을 보여줌으로써 소설에서는 굳이 설명하고 묘사하고 말을 덧대야 할 것을 몇 개의 시퀀스로 요약하고, 텍스트 이면의 텍스트를 보여주었다.
두 사람의 대화는 영화에 대한 것 말고도 인생과 예술에 대한 고민들을 풀어놓고 있다. 하지만 영화는 이미 그것들을 다 품고 있다. 어쩌면 두 거장의 대화는 일부러 영화라는 핵을 직접 건드리지 않고 주변부를 맴돌면서 영화의 본질을 탐색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두 사람의 대화 자체가 그냥 그대로 인생을 담은 짧은 3부작 영화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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