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시 산책] 보르헤스 <비>
본문 바로가기
독서 리뷰

[명시 산책] 보르헤스 <비>

by 브린니 2022. 11. 7.

 

 

가랑비가 내리니

갑자기 오후가 갠다.

내리다인지 내렸다인지.

분명 비는 과거에 일어나는 일이지.

 

빗소리를 듣는 이는

그지없는 행운이

장미라 부르는 꽃과 유채색 신기한 색조를

현현시켰던 그 시간을 회복하였네.

 

유리창을 눈멀게 하는 이 비가,

상실된 아라발의 지금은 가 버린 어느 정원 포도 덩굴

검붉은 알갱이에 생기를 돋우리.

 

젖은 오후는 내가 갈망하던 목소리,

죽지 않고 회귀하는

아버지의 목소리를 돌려주네.

 

 

보르헤스

 

 

 

산책

 

흐렸던 하늘이

잠시 비가 내리니까

곧바로 환하게 밝아온다.

 

봄날 혹은 가을날 오후에 이런 현상은 자주

때론 가끔 볼 수 있다.

 

카페 창밖으로 혹은

거실 창을 열고
비가 내리는 모습을 보거나

빗소리를 듣고 있으면

 

옛 기억이 떠오르고

기억의 끝을 좇아 회상에 잠기곤 한다.

 

장미와 다른 꽃들로 가득했던 그 시절

나는 무엇을 했던가

 

자동차 안에서는

비가 좀 더 세차게 내리면

유리창에 뿌옇게 김이 서리고

사물들이 흐릿하게 보이기도 한다.

 

기억도 흐려진다.

아주 어렸을 적 시골마을에서 벌거벗고 뛰놀았던 적이 있었던가.

 

비에 젖은 봄날 혹은 가을날 저녁에

빗소리는 잊었던

혹은 잊고 싶었던

아니 다시 듣고 싶은

아니 지금도 귀에 생생한

 

죽은

그러나 여전히 살아 있는

아버지의 목소리를 들려준다.

 

아버지의 감정과

아버지의 생각과

아버지의 행동과

아버지 그 자신을.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