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시 산책] 게오르크 트라클 <고독자의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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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리뷰

[명시 산책] 게오르크 트라클 <고독자의 가을>

by 브린니 2022. 11. 5.

고독자의 가을

 

 

어두운 가을이 가득 품고 돌아오는 열매와 풍요,

이는 누렇게 바래버린, 아름다웠던 여름날의 광채.

순결한 푸름이 퇴락한 껍데기에서 튀어나오고;

새들의 비행에서는 오래된 전설의 소리가 난다.

포도주는 이미 빚어졌으니, 부드러운 고요는

어두운 물음들에 대한 조용한 답변으로 충만하다.

 

그리고 여기저기 외딴 언덕에 꽂혀 있는 십자가;

붉은 숲에서 양 떼 하나가 길을 잃는다.

구름은 호수의 거울을 스치며 지나가고;

농부의 차분한 몸놀림 또한 쉬고 있다.

아주 조용히 저녁의 푸른 날개가 어루만지는

메마른 초가지붕, 시커먼 흙.

 

머지않아 피로한 자의 눈썹에 별들이 둥지를 튼다;

서늘한 방에는 고요한 만족감이 찾아들고

천사들이 저버리는 푸른 눈들은

부드럽게 고통받는 연인들의 것.

갈대밭을 스치는 바람; 뼈만 남은 음울이 엄습한다,

헐벗은 풀밭에서 이슬이 검게 방울질 때.

 

 

게오르크 트라클 Georg Trakl, (오스트리아 1887~1914) 독일 표현주의 시인.

 

 

산책

 

시인은 풍경을 읊었을 뿐인데

풍경은 시가 된다.

 

새들의 비행에서는 오래된 전설의 소리가 난다.

 

아마도 시인의 입술은 혹은 시인의 손끝은 그리고 시인의 가슴은

그가 내뱉은 모든 말들은, 그가 생각하는 모든 언어는 곧 시인지도 모른다.

새들이 하늘을 날면서 얻은 모든 것들이 전설이며 이야기이듯이.

 

포도주는 이미 빚어졌으니, 부드러운 고요는

어두운 물음들에 대한 조용한 답변으로 충만하다.

 

어쩌면 와인 한 잔을 앞에 두고 아무말 없이 고요하게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숱한 질문들, 인생에 대한 의문들에 대한 해답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시인의 침묵조차 삶에 대한 깊은 혜안이 될 수 있다.

그러니까 침묵도 시다.

 

 

우리나라 무덤엔 비석이 있다. 간혹

비석조차 없는 이름 없는 자의 무덤도 있다.

 

그리고 여기저기 외딴 언덕에 꽂혀 있는 십자가;

 

서양의 무덤에도 비석이 있다.

다만 십자가만 꽂혀 있는 무명의 무덤도 있다.

 

무덤 곁은 그 어디든 쓸쓸한 고독이 깃들어 있다.

죽은 자들을 찾아오는 사람이 드물어서 그런 것인지

그 죽은 자들이 이름조차 없는 사람이어서인지 알 수 없다.

 

아주 조용히 저녁의 푸른 날개가 어루만지는

메마른 초가지붕, 시커먼 흙.

 

저녁은 붉은 노을로 기억되지만

그 저녁은 푸른 날개로 초가지붕과 흙을 쓸고 지나간다.

아주 조용히.

어쩌면 아무도 모르게.

 

 

머지않아 피로한 자의 눈썹에 별들이 둥지를 튼다;

서늘한 방에는 고요한 만족감이 찾아들고

 

저녁이 가도 밤이 온다.

눈이 스르르 감기고

감은 눈 사이에 별이 떠오른다.

 

홀로 누운 방에 하루를 잘 보냈다는 뿌듯함이 깃든다.

 

천사들이 저버리는 푸른 눈들은

부드럽게 고통받는 연인들의 것.

 

연인들은 사랑의 고통에 잠을 뒤척인다.

부드럽지만 달콤한 잠, 혹은 꿈.

천사들로부터 버림받은 받은 듯한 느낌이 들 수 있지만

사랑하고 있다는,

그 때문에 아파하고 있다는 것은

살아 있는 사람이 느끼는 황홀한 고통일 수 있다.

 

 

아마도 고독이란 이런 느낌일 것이다.

 

갈대밭을 스치는 바람; 뼈만 남은 음울이 엄습한다,

헐벗은 풀밭에서 이슬이 검게 방울질 때.

 

갈대밭을 스치는 스산한 바람이거나

뼈만 남은 야윈 몸에 들이닥치는 우울!

 

가을이 짙어서 싱그러움을 잃은 벌판의 풀들 사이에

이슬이 방울이 졌다가 곧 사라지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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