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리뷰' 카테고리의 글 목록 (3 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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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리뷰330

아니 에르노 <한 여자> Annie Ernaux 는 죽은 어머니에 대한 진혼곡이다. 자신이 경험한 것만을 쓴다는 작가에게 어머니의 죽음은 가장 특별한 경험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아니 에르노는 이미 아버지의 죽음에 바치는 글을 쓴 적이 있다. 그때부터 자신이 쓴 글에 소설이란 타이틀을 붙이지 않았다고 한다. 에르노는 어머니의 죽음에 대해 글을 쓰면서 가 “내가 하려는 것은 가족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의 접점에, 신화와 역사의 접점에 위치”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어쩌면 그저 자전적인 글쓰기일 뿐인데 가족적이면서 사회적이며 신화와 역사가 만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좀 지나친 말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한 개인의 삶과 죽음은 가족과 사회, 국가와 민족, 종교와 문화 모든 것과 관련되어 있고, 그 자체로 하나의 역사인 .. 2023. 8. 26.
아니 에르노 <여자아이 기억> Annie Ernaux 이 소설은 일종의 메타픽션이라고 할 수 있다. 글을 쓰는 나와 글쓰기의 대상이 되는 나(그녀)가 상호작용을 통해 하나의 서사를 완성하는 것이다. 나는 현재 2014년의 어느 날들에서 1958년의 나(그녀)를 본다. 그리고 그녀에 대한 인상과 기억과 기록들을 되새김질한다. 그런데 되새김의 방식이 단순히 내가 그때 어땠는지를 기억을 통해 재구성하기보다는 현재의 나가 과거의 나(그녀)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면서 현재의 시점에서 그 상황이나 장면, 사건들을 복원시켜 나가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녀가 된다. 내가 보는 것은 내가 아니라 그녀이다. 나인 그녀이다. 아니 어쩌면 현재의 나와는 다른 과거의 그녀이다. 나는 끊임없이 그 시절의 그녀가 진정 지금의 나인가 회의한다. 의심당하는 것이 현.. 2023. 8. 19.
듀안 마이클 <듀안 마이클(사진집)> 듀안 마이클 사진가나 화가는 자신과 모델을 가끔 동일시할 수 있다. 혹은 너무나 욕망한 나머지 모델의 욕망을 모방할 수도 있다. 모델이 작가의 분신일 수도 있다. 그 모델이 진짜 예술가이고 작업을 대신하는 것은 또 다른 나일 수 있다. 내가 하나 더 존재할 수도 있고, 여럿일 수도 있다. 사진가의 시선만큼 모델의 수도 많고, 모델의 욕망도 여러 개이며 모델 속으로 들어가 모델이 되고자 하는 작가의 분신도 여럿일 수 있다. 어딘가 또 다른 내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은 죽은 뒤에 남아 있을 나와 세상을 떠난 나로 나뉠 수 있다. 영혼이 죽은 육체를 바라보는 장면은 사진이나 회화, 영화에서 자주 볼 수 있다. 자기자신이 자신과 분리되어 다른 존재가 되는 듯한 상상. 다른 누군가가 되어서 그 존재 속으로 들어.. 2023. 8. 6.
대실 해밋 <몰타의 매> 대실 해밋 대실 해밋의 는 하드보일드 탐정 소설이다. 하드보일드 문체의 특징은 등장인물의 외관과 행동, 발언만 묘사하고 심리적인 묘사가 없다는 것이다. 대실 해밋은 사실적이면서도 개성 넘치는 인물들, 현실감이 물씬 풍기는 대화, 탄탄하게 구성된 플롯, 정밀한 묘사를 통해 탐정 소설을 한 차원 높이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어느 날 탐정 샘 스페이드에게 원덜리라는 미모의 여성이 찾아와 서스비란 건달과 달아난 여동생을 찾아달라고 부탁한다. 서스비는 호텔에 머물고 있으니 자세한 상황을 알아봐달라는 것이다. 동료 탐정 아처가 서스비를 미행해서 자초지종을 알아보겠다고 나서지만 의문의 살인을 당하고 만다. 경찰은 샘 스페이드가 아처의 부인 아이바와 불륜이었다는 것을 알아내고 샘을 범인으로 생각하고 조사를 시.. 2023. 8. 1.
[명시 산책] 여성민 <비밀> 비밀 이 정원에선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아요 이미 모든 일이 일어난 것처럼 내 몸의 뼈가 피리였다는 것을 나에게만 말해요 이국적인 습관을 갖기 위해 밤에는 뜨거운 불을 삼키고 구멍마다 불이 들어오면 빛이 새어나오는 몸을 이끌어 밤의 정원으로 갑니다 정원은 기이한 소리로 가득해지고 세상에 없는 슬픈 소리를 냈다는 중국 피리에 대해 생각하죠 숲에 혼자 서 있죠 내가 알지 못하는 얼굴의 윤곽들이 떠올라요 얼굴은 모두 축축해요 흐르지 않고 코발트로 있어요 내 발은 허파보다 부드러워요 피리의 구멍처럼 코발트 얼굴은 늘어나고 아름답고 따듯한 코발트를 하나씩 밟아 나는 정원을 가로지릅니다 누군가의 얼굴에 푹푹 빠졌던 발에는 향기가 남아요 달콤한 코발트 코발트에 발이 물들며 모르는 죽음에게 가요 정원에선 아무런 일도.. 2023. 7. 22.
편혜영 장편소설 <홀> 편혜영 장편소설 ◆ 홀이란 구멍을 뜻한다. 골프를 즐기는 분들은 홀에 대한 느낌이 특별할지도 모른다. 홀은 작은 구멍에서부터 싱크홀이라고 부르는 거대한 구덩이에 이르기까지 모든 곳에 생겨나는 구멍을 말한다. 요즘처럼 장마가 심한 경우 하늘에 구멍이 뚫렸다고 말하기도 한다. 실연을 당하면 마음에 구멍이 난 것 같다고 말한다. 마음이 텅 비어 버린 느낌을 그렇게 말한다. 지나가다 어느 곳에 구멍이 뚫려 있고 “들여다보지 마시오” 라고 쓰여 있으면 정말이지 구멍 안을 들여다보고 싶은 충동이 강하게 든다. 그러나 들여다보면 아무것도 없다(별 것 없다). 도넛을 다 먹으면 무엇이 남을까?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그렇지 않다. 도넛을 다 먹고 나면 구멍이 남는다. 도넛은 도넛과 구멍으로 이루어져 있으니까. 새 옷을.. 2023. 7. 16.
[명시 산책] 여성민 <연애의 국경> 연애의 국경 정글은 손과 손 사이에 있다 내가 너에게 손을 내밀 때 사실은 뿌리를 내미는 것이다 대개 잠복기를 갖지만 잠복기 없는 케이스가 발견되기도 하는데 그런 경우 정글은 순식간에 확장된다 이때 국경이 발생한다 국경은 외부에 있지 않다 정글의 국경은 정글의 내부에 있다 국경은 생태학적으로나 지리학적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손과 손이 맞닿는 순간의 일 그러니까 정글의 국경은 사건이다 언젠가 한번 정글을 여행한 적이 있다 정글을 걸으며 사람의 몸에서 먼저 사라지는 것은 말이다 우리는 느낌을 확장한다 뿌리를 더듬으며 걷지만 뿌리를 내리지는 않는다 손을 내밀어 서로의 국경을 더듬는다 그러니까 연애는 국경과 국경이 만나는 일이다 네 쪽으로 국경을 확장하는 일이다 나도 너처럼 정글의 빗소리가 그리워지는 순간이 있다.. 2023. 7. 10.
뒤라스 X 고다르 대화 ◆ 장-뤽 고다르 (Jean-Luc Godard) 프랑스 문화원에서 프랑스 영화를 공짜로 틀어주던 시절, 장 뤽 고다르의 를 본 적이 있다. 처음엔 그 영화의 제목도 모르고 감독이 누군지 배우가 누군지도 몰랐다. 프랑스어는 지금도 잘 모른다. 나중에서야 그 영화가 그 유명한 ‘네 멋대로 해라’인지 알게 됐다. 그때 아무것도 모르면서 ‘세상에 이런 영화도 있구나’ 하면서 너무나 재미있게 보았었다. 그 뒤 감독 이름을 알게 되었고 란 책을 읽었다. 어쩌면 책을 영화보다 먼저 읽었는지도 모른다. 누벨바그라는 영화 스타일을 만들어낸 천재 감독, 장 뤽 고다르. 그의 영화는 가식 없는 현실을 보여주었고, 동시에 완벽하게 연출된 현실을 보여주었다. 그의 영화는 영화라기보다는 소설에 가까웠고, 카메라로 쓰는 소설이라.. 2023. 7. 8.
시몬 베유 <중력과 은총> 중력과 은총 ―시몬 베유 어떤 영적인 영감이나 깨달음이 진정으로 빛을 발하기 위해서는 그 영적 깨달음이 어떤 식으로든 실천(현실화)되어야 할 것입니다. 어떤 영적 지도자의 삶이 그의 신학적 이론과 별개일 때 우리가 느끼는 당혹감은 몹시 큽니다. 영적 지도자의 가치는 그의 이론적 깊이나 깨달음의 높이에 따라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즉 그의 말이나 글에 따라서가 아니라 그가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결정되어야 합니다. 결코 깨달음과 실천적 삶은 별개의 것이 아니라 우리의 존재 안에서 하나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시몬 베유는 그의 영적 깨달음의 높이와 깊이뿐만 아니라 그의 삶도 매우 가치 있음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고등학교 철학교사였던 그는 노동조합에 가입하고, 직접 노동 현장에서 투쟁에 앞장섰고, .. 2023. 5.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