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에르노 <한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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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리뷰

아니 에르노 <한 여자>

by 브린니 2023. 8. 26.

Annie Ernaux <Une Femme> 

 

 

<한 여자>는 죽은 어머니에 대한 진혼곡이다.

 

자신이 경험한 것만을 쓴다는 작가에게 어머니의 죽음은 가장 특별한 경험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아니 에르노는 이미 아버지의 죽음에 바치는 글을 쓴 적이 있다. 그때부터 자신이 쓴 글에 소설이란 타이틀을 붙이지 않았다고 한다.

 

에르노는 어머니의 죽음에 대해 글을 쓰면서 <한 여자>내가 하려는 것은 가족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의 접점에, 신화와 역사의 접점에 위치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어쩌면 그저 자전적인 글쓰기일 뿐인데 가족적이면서 사회적이며 신화와 역사가 만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좀 지나친 말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한 개인의 삶과 죽음은 가족과 사회, 국가와 민족, 종교와 문화 모든 것과 관련되어 있고,  그 자체로 하나의 역사인 것만 분명하다.

 

이런 글쓰기를 통해 아니 에르노는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저 단순한 자전소설이 아니라 한 사람의 삶을 통해 그가 살았던 시대와 사회를  환기함으로써 많은 사람들의 공감대를 형성했기 때문일 것이다.

 

아니 에르노는 삶의 진실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에르노는 소설과 같은 허구로는 온전한 진실에 가닿지 못한다고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는 자기 자신과 가족과 사회와 역사에 대해 말한다. 거기에 삶의 진실이 있기 때문이다.

 

나의 계획은 문학적인 성격을 띤다. 말들을 통해서만 가닿을 수 있는 내 어머니에 대한 진실을 찾아 나서는 것이기 때문이다.”

 

 

 

소설은 이렇게 시작한다.

어머니가 47일 월요일에 돌아가셨다.”

 

알베르 카뮈의 소설 <이방인>의 첫 구절도 이렇게 시작한다.

오늘 어머니가 죽었다. 어쩌면 어제였는지도 모른다.

 

어머니의 죽음에 별 감흥이 없는 현대인을 다룬 <이방인>과 달리 <한 여자>는 어머니의 죽음을 애통해하는 딸의 마음과 작가로서 어떻게든 어머니에 대해, 어머니의 삶의 진실에 대해 글을 쓰고자 하는 작가의 자의식이 과할 정도로 드러나 있다.

 

아니 에르노의 소설은 작가가 한 개인으로서 주인공으로서 작가 자신으로서 강하게 드러난다. 그것은 내가 쓰는 것은 내 존재와 삶과 명예를 건 진실이라고 대놓고 말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무엇을 쓰든 진실이 아니면 아무것도 쓰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 에르노의 글쓰기 철학인 것 같다.

 

소설의 첫머리는 장례에 관한 자질구레한 묘사로 가득하다. 그러나 작가는 자신이 기억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고 안타까워 한다.

 

소설은 과거 사건을 다룬다. 그리고 기억에 의존에 그 사건을 서술한다. 하지만 기억은 왜곡되고 변형될 수도 있고, 다 기억하지는 못한다는 한계도 있다.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어쩌면 잊혀져 가는 기억을 되찾는 과정으로써 글쓰기가 큰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시간은 기억으로서 다시 존재한다고 볼 수 있다.

 

 

작가는 <한 여자>를 쓰면서 어머니가 어떤 분이었는지 재확인한다. 글쓰기를 통해 결코 어머니를 재구성하지 않는다.

 

기억나는 만큼, 딱 그만큼만, 부풀리거나 덧붙이거나 수정하지 않고, 어머니와 같이 살면서 겪었던 사실들과 그것에 대한 기억만으로 단순하게 서술한다. 어쩌면 어머니에 대한 추억이 이것밖에 없을까, 할 정도 에피소드가 많지 않다.

 

어머니와 그녀의 삶의 진실을 보여줄 만큼만 서술한다.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뜻이다. 정확하고 정밀하고 단순하면서 생선의 뼈처럼 골자가 뚜렷하고 날카롭다.

 

독자들은 어느 어머니의 삶을 엿보는 동시에 자신이 어머니와의 추억과 어머니 대해 갖는 생각들을 떠올려보게 된다. 여기서 글쓰기 혹은 책읽기는 문학에서 사회학으로 이행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소설이 사회학적 주제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창작과 독서의 과정을 통해 사회적 행위들을 발생하는 것이다.

 

 

 

이브토는 루앙과 르아브르 사이의 바람 부는 고원에 세워진 추운 도시이다.”

 

이브토는 아니 에르노가 태어나고 유아기와 청소년기를 보낸 도시다. 에르노는 루앙에서 대학을 다녔다. 소설에서는 실제 지명을 쓸 이유도 없고, 설령 실제 도시명을 쓰더라도 그것이 작품의 배경일 뿐 소설 자체에는 큰 영향을 주지 못할 수도 있다.

 

김승옥의 <무진기행>은 지명과는 상관이 없고, 이청준의 <당신들의 천국>이 소록도를 염두에 두고 썼다고 한들 소록도 자체에 대해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아니 에르노의 이브토는 따르다. 자신이 경험한 것들 중에 고향에서 살았던 경험처럼 치명적인 것도 없다. 에르노는 자신이 파리나 대도시가 아니라 시골 출신이라는 것을 숨기지 않는다. 이브토에서 산다는 것은 계층적인 한계를 지닌다.

 

이브토에서의 삶은 파리나 런던에서 사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고, 구체적인 삶의 정황도 완전히 다르다. 어머니는 그곳에서 생의 대부분을 보냈다. 공장노동자로서, 서민층 상점 주인으로서.

 

 

장갑을 쥐고 있는 넓적한 손과 고개를 꼿꼿하게 쳐들고 있는 자세만이 그것이 내 어머니라고 말해 준다.”

 

에르노는 어머니의 결혼사진을 본다. 잔뜩 치장한 어머니는 영화 속 의상을 빌려 입은 아가씨일 뿐이다. 그러나 넓적한 손(외모), 고개를 꼿꼿하게 쳐들고 있는 자세(태도)”를 통해 어머니의 진실을 본다.

 

늘 일하는 넓적한 손과 억척스럽게 삶을 이어오면서도 당당한 태도를 견지하려고 애썼던 어머니의 진실을 보는 것이다.

 

갓 결혼한 아버지와 어머니는 뭔가 다른 삶을 꿈꾸기도 했을 테지만 결국 전과 다를 바 없는 똑같은 삶, 두 사람은 삶을 서로 다른 방식으로 겪어 냈다.” 전과 다를 바 없는 삶이란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서민층 삶이다. 어머니는 “<어떠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가난에서 탈출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해야 한다는 신념이강했다.

 

어머니는 여공에서 라 발레의 상점 주인 되었지만 여공보다 고작 조금 더 벌 뿐이라는 씁쓸함과 <잘 해내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강박관념을 가졌지만 나름의 권력(외상)”과 손님들과 말하고 들어주는 즐거움을 갖고 살았다.

 

어머니는 여러 사람들을 상대해야 했기 때문에 원피스 하나 살 때에도 세련되어 보이는지 신경썼다.더는 <촌티 내지> 않겠다는 바람, 그 다음에는 그렇게 되었다는 확신이 뒤섞였다.

 

부부는 첫째 아이를 잃었고, 아니는 둘째였다.

 

어머니가 아니를 낳은 것처럼 아니는 글쓰기를 통해 어머니를 세상에 알린다.

 

내가 어머니를 세상에 내어놓기 위해서 그녀에 관한 글을 쓰고 있는가 보다.”

 

어머니라는 한 개인이 글을 통해 세상에 알려지는 것이다. 그녀의 존재와 삶과 그 삶의 진실이 다른 사람들과 공유되는 것이다.

 

독일 점령기 동안 식료품점이 식량 보급 창구 구실을 했기에 그녀는 모든 사람들을 먹여 살리려고 애썼다.

 

착하고 유용한 존재가 되고자 하는 그녀의 열망, 그녀의 자부심.”

 

 

 

그 시절의 그 여자는 아름다웠고, 머리카락을 다갈색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어머니는 커다란 목청을 지녔고 종종 무시무시한 목소리로 소리를 질러 댔다. 또한 웃기도 잘 했는데, 이와 잇몸이 다 드러나고 목젖이 다 들여다보이는 웃음이었다.”

 

이것이 어머니의 성품이었고, 생활 태도였다.

 

코르셋을 잠글 때면 벽을 향해 돌아섰다. 교차되어 내려오는 코르셋 끈들은 아랫부분에서 팔자 매듭으로 묶였는데, 끈들 사이로 살이 빠져 나왔다. 그녀의 육체 그 어느 부분도 내 분길을 피해가지 못했다. 나는 크면 나도 그렇게 되리라고 생각했다.”

 

아니 에르노의 소설엔 여성성이 두드러진다. 그러므로 여자로서 어머니와의 친연성은 불가피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어느 일요일, 세 사람이 숲 근처 언덕 밑자락에서 피크닉을 하고 있었다. 목소리, 따뜻한 살, 끊임없는 웃음소리로 지어진 둥지 속에 자기들끼리만 들어앉아 있던 기억. 돌아오는 길에 폭격을 만났다. 나는 아버지의 핸들 위에 앉아 있고, 그녀는 엉덩이 사이로 비집고 들어갈 듯한 안장 위에 꼿꼿이 앉은 채 우리보다 앞서 언덕을 내려가고 있다. 나는 포탄이 무섭고, 어머니가 죽을까 봐 겁이난다. 그때 아버지와 나, 우리는 둘 다 어머니와 사랑에 빠졌던 것 같다.”

 

아마도 이때가 아니 에르노에게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 아니었을까.

 

 

아니의 가족은 라 벨라를 떠나 이브트로 돌아가서도 가게 건물과 가게에 인접한 나지막한 작은 집 한 채의 소유주"가 되는 데 성공한다.

 

어머니는 시누이와 홍합을 따며 웃는다. 그리고 성모에게 바치는 성가를 (온 힘을 다해) 부른다. 이런 모습을 보고 나는 울고 싶었고, 그녀가 미웠다.”

 

그만큼 아이에게 어머니의 존재는 자기 자신만큼 소중하고 사랑의 대상이다.

 

내가 지나치게 뚫어져라 바라보면 그녀는 신경질을 냈다. 왜 날 사려고?

 

어머니는 성질이 나면 딸을 때렸지만 “5분 뒤엔 나를 꼭 껴안았으니, 나는 그녀의 <인형>이었다.”

 

그녀의 가장 깊은 욕망은 자신이 누리지 못했던 것 전부를 내게 주는 것이었다.”

 

모든 어머니들은 다 같은 욕망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암사자들은 자기 자식 일이라면 포효하면서 세상과 싸운다.

 

나는 어머니의 폭력, 애정 과잉, 꾸지람을 성격의 개인적 특색으로 보지 않고 어머니의 개인사, 사회적 신분과 연결해 보려고 한다. 그러한 글쓰기 방식은 내 보기에 진실을 향해 다가서는 것이며, 보다 일반적인 의미의 발견을 통해 개인적 기억의 고독과 어둠으로부터 빠져나오게 돕는 것이다. 하지만 내 안의 무언가가 뻗대고 있고, 어머니에 대해 순수하게 감정적인 이 미지들을, 온기 혹은 눈물을 의미 부여 없이 그대로 간직하고 싶어 함을 느낀다.”

 

개인의 특색을 개인사와 사회적 신분과 연결시키려는 노력은 글쓰기의 지평을 여는 행위가 될 수도 있지만 딸로서 어머니를 기억하고 추모하는 데 있어서는 별다른 효과가 없다. 아니 에르노는 그저 딸로서 어머니를 있는 그대로 간직하고 싶은 감정을 느낀다.

 

우리 사이에는 독서, 내가 그녀에게 읊어주는 시, 루앙의 찻집에서 파는 케이크를 둘러싼 은밀한 공모의 느낌이 있었고,” 아버지는 축제와 서커스, 페르낭델의 영화로 나를 이끌었고, 자전거 타는 법과 채마밭의 야채들을 구별하는 법을 가르쳐 줬다. 그와는 재미나게 놀았고, 그녀와는 <대화들>을 나눴다. 둘 중에 그녀가 주도권을 쥔 인물, 바로 법이었다.”

 

어머니는 경제적 주도권을 쥐고 가족 생활을 이끌어갔다. 대부분 서민층 가정에서 어머니가 경제적인 역할을 주도하는 경향이 있다. 왜냐면 가장인 남편이 경제 능력이 뛰어나면 서민층에 머물러 있지 않을 테니까. 그래서 어머니는 딸의 교육에 열을 올렸고, 모든 것을 주려고 애썼다.

 

 

 

아니가 청소년기에 접어들고, 성에 대해 알게 되자 두 사람 사이에는 투쟁이 존재했다.

 

내게 생리대를 내밀 때 그 얼굴에 떠오른 홍조. 그녀는 내가 자라는 것을 보고 싶어 하지 않았다.”

 

자식이 그저 예쁜 아이로 머물러 있기를 원하는 부모의 마음.

 

이 글을 쓰면서 때로는 <좋은> 어머니를, 때로는 <나쁜> 어머니를 본다.”

유년기의 행복이 사춘기의 투쟁으로 바뀌기 때문이다. 다른 소설에서 아니 에르노는 어머니의 감시의 눈을 벗어나는 데 온 힘을 기울인다.

 

어머니의 요란스런 말과 태도는 아니에게 부끄러움을 일으킨다.

 

나는 그녀가 말하고 행동하는 거친 방식이 부끄러웠는데, 내가 얼마나 그녀와 닮았는지 느끼고 있는 만큼 더더욱 생생한 부끄러움을 느꼈다.”

 

서민층 부모, 그리고 그런 사회적 신분이 만들어내는 문화적인 천박함은 사춘기 소녀를 부끄럽게 하는데 아니 에르노는 이를 소설 <부끄러움>에 표현하고 있다.

 

대학생이 된 나는 떠날 수 있기만을 꿈꿨다.”

 

자식은 자라서 부모의 둥지를 떠나는 것이 자연스럽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어린 시절과 결별을 뜻한다.

 

딸은 어머니의 희생 때문에 자신이 대학에서 공부하고 있다는 것에 대해 양가감정을 갖는다. 부모에 대한 부끄러움과 그에 대한 대가로 자신이 교양인으로 바뀌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의 부당함.

 

학기가 끝나고 돌아가면 우리 사이에 존재하는 것은 더 이상 함께 살지 않는 사람들 사이에서 보이는 친절, 거의 수줍음이라고 할 만한 것들. 여러 해 동안 나와 그녀의 관계는 떠났다가 돌아감의 반복에 머물렀다.”

 

 

아니 에르노에게 있어 어머니에 대해 글을 쓰는 것은 어머니가 살아 있는 시간과 장소에서 어머니와 함께 살아간다는 느낌이다.”

 

이것이 글쓰기의 위력인지도 모른다. 글로 쓰는 시간 동안 그것을 생생하게 체험하는 것!

 

 

 

딸이 성장해서 대학에서 공부하고 교양인이 되어가는 동안 어머니는 자기 자체로는 사랑받지 못할까 봐 두려워하며, 자신이 주려는 것으로 사랑받기를 바랐다.”

 

사람은 존재로서 사랑받아야 한다. 그러나 자신의 존재 가치가 낮다고 생각하는 순간 뭔가 주려고 하고, 그것으로 인정받으려고 한다. 사랑은 그 자체로 주고받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나 사람 사이의 관계가 존재만으로 유지되는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아이가 어릴 때 부모는 존재만으로 절대적인 사랑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자식이 성장해서 부모의 사회적, 경제적 모습을 통해 부모를 판단할 경우 그 절대성은 위협받는다.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어머니는 몹시 힘들어했다. 그리고 결혼한 딸과 함께 살고 싶어 했다.

 

안느 시에 살던 딸의 집에서 어머니는 두 아들을 돌보고 집안 일을 도맡아 했다. 딸에겐 집안 일보다 더 나은 일을 하라고 부추겼다. 그러나 어머니는 스스로를 하찮은 존재로 여겼다.”

 

어머니는 한쪽으로는 자신을 받아들이면서 다른 쪽으로는 자신을 내쫓는 세계 속에서살고 있었다.

 

 

아니의 가족이 외곽 신도시로 이사를 가자 어머니는 견디지 못하고, 단칸 아파트를 구해 집을 나간다. 그러나 늘 딸을 그리워한다.

 

그러나 교통사고를 당해 일주일 동안 의식을 잃고 병원에 누워 있었다.

 

나는 생전 처음 보게 된, 고통 속에 내맡겨진 어머니의 육체를, 그리고 벗은 어깨를 바라봤다.”

 

어머니는 억척스러웠고 강건한 몸을 갖고 있었는데 이제 서서히 그 육체가 무너지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어머니가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경악했다.”

 

모든 자식들이 느끼는 느낌일 것이다. 부모가 늙고 병들어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매우 실체적으로 드는 순간.

 

 

그녀의 이야기는, 세상에 그녀의 자리가 있었던 시기의 이야기는 여기에서 멈춘다.”

 

어머니는 치매에 걸렸고, 이전의 그녀와는 다른 그녀가 되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나는 내 딸이 행복해지라고 뭐든지 했어. 그렇다고 해서 걔가 더 행복한 건 아니었지.”라고 말한다.

 

어쩌면 이것이 그녀가 온전한 정신으로 말한 마지막 말인지도 모른다.

 

아니 에르노는 그녀를 다시 만날 때마다 매번 전보다 덜 <인간다운> 모습을 보게 될지도 모른다는 고뇌에 빠진다.

 

그리고 면회를 다녀올 때마다 어머니를 그곳에 놔뒀다는 죄책감에 시달린다.

 

마지막 일요일 면회를 마치고, 다음날 어머니가 숨을 거둔다.

 

 

 

그녀는 시몬 드 보부아르보다 일주일 앞서 죽었다. 그녀는 받기보다는 아무에게나 주기를 좋아했다. 글쓰기도 남에게 주는 하나의 방식이 아닐까.”

 

시몬 드 보부아르의 책 <2의 성>은 아니 에르노가 여성으로서 각성? 하는데 큰 역할을 한 책이다. 그래서 같은 여성인 어머니의 죽음과도 연관을 짓고 싶었던 모양이다.

 

이것은 전기도, 물론 소설도 아니다. 문학과 사회학, 그리고 역사 사이에 존재하는 그 무엇이리라.”

 

<한 여자>뿐만 아니라 아니 에르노의 대부분의 소설은 이런 위치에 놓인다. 그러나 매우 예술적이며 문학적인 그녀의 글은 소설과 가장 가깝다.

 

 

앞으로는 그녀의 목소리를 듣지 못할 것이다. 여자가 된 지금의 나와 아이였던 과거의 나를 이어 줬던 것은 바로 어머니, 그녀의 말, 그녀의 손, 그녀의 몸짓, 그녀만의 웃는 방식, 걷는 방식이다. 나는 내가 태어난 세계와의 마지막 연결 고리를 잃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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