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난두 페소아 <불안의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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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리뷰

페르난두 페소아 <불안의 서>

by 브린니 2023. 9. 9.

페르난두 페소아 Fernando Pessoa

 

불안의 서 Livro do Desassossego

 

 

페르난두 페소아의 산문 <불안의 서>는 페소아가 생각하고, 느끼고, 본 것들에 대한 기록이다.

페소아는 철학자도, 몽상가도, 탐험가도, 환상을 보는 자도 아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에 해당하기도 한다.

페소아는 하나가 아니고 여럿이며 여럿인 동시에 한 사람이다.

그는 자신이 자신이라는 사실을 믿지 못하고, 자신이 자신이 아닌 다른 자기 자신이라고 느낀다. 그렇게 생각하고 그렇게 인식한다.

자신이 다른 이라는 것이 아니고, 자신이 아닌 다른 자기 자신이라는 것이다.

 

그에게 모든 것은 나 자신에 집결되어 있다. 그의 관심은 오로지 나 자신에 집중되어 있고, 나를 느끼고 내가 누구인가묻고 답하고 되묻고 회의하고 의심한다.

 

페소아는 본명이 아닌 여러 개의 필명으로 시를 발표한다. 그는 각기 다른 이름의 자기 자신이 해당 시를 썼다고 여긴다. 그 시들은 페소아 하나가 쓴 것이 아니고, 여럿인 페소아가 번갈아 쓴 것이다. 이 시를 쓸 때는 이런 이름을 지닌 페소아가, 저 시를 쓸 때는 저런 이름을 쓰는 페소아가, 그 시를 쓸 때는 그런 이름을 사용하는 페소아가 각기 쓴 것이다.

 

모든 시는 페소아의 작품이지만 각각의 작품은 다른 이름을 쓰는 페소아가 썼다. 말하자면 철학할 때의 페소아, 몽상가 페소아, 환상을 보는 페소아, 몽유병자 페소아, 산책하는 페소아, 잠든 페소아, 시를 쓰는 페소아와 산문을 쓰는 페소아가 각기 다르다. 어쩌면 페소아의 자아는 열두 개쯤 되는지도 모른다.

 

 

<불안의 서>를 쓴 페소아는 어떤 페소아일까. 어쩌면 <불안의 서>를 쓴 페소아는 가장 일상적인 페소아, 보통 페소아에 가까울 수 있다. 산문이란 환상이나 몽상, 몽유보다는 일상과 깨어있는 삶에서 나온 것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불안의 서>를 쓰면서 페소아는 늘 잠들어 있거나 비몽사몽일 때가 많다. 그러나 글쓰기의 측면에서 산문이란 일상생활에서 느끼는 것들을 별다른 문학적 장치 없이 기록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가 잠들었다고 말하더라도 잠든 자신을 바라보는 깨어 있는 상태인 것이 분명하다. 비몽사몽이라고 하더라도 그때의 환상이 아니라 깨어 있는 자신이 자신의 비몽사몽을 바라보는 것을 기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불안의 서>는 의도했든 그렇지 않든 보통의 페소아가 일상적 삶을 통해 느낀 것들을 기록한 것이다. 페소아가 쓴 페소아라고 할 수 있다.

 

페소아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탈주하고자 하는 욕망으로 가득 차 있다. 자신이 자기 자신이라는 상태를 견딜 수 없어 할 때가 많다. 그렇다고 해서, 벽을 치거나 이불을 걷어차는 식으로 자신을 미워하기 때문이 아니다. 페소아가 자신을 경멸하거나 부끄러워하기 때문에 자신으로부터 달아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자신이 다른 누구도 자신이라는 사실 자체로부터 도망치고자 하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페소아가 아닌 페소아, 내가 아닌 나 자신이 되고자 한다. 어쩌면 정체성으로부터 벗어난 실제가 되고자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페소아라는 이름 붙은 존재가 아니라 그냥 페소아가 되려는 것이다. 페소아가 아닌 페소아. 그런데 그것이 가능한 것일까.

 

 

<불안의 서>에서도 페소아의 관심은 오로지 자기 자신이다. <불안의 서>는 자기 자신의 기록이다. 내가 쓰는 나 자신을 오래도록 관찰한 기록이자 보고서. 다른 누구에게 읽히려는 것이 아닌 오직 자기 자신이 읽기 위하여. 자신이 자신을 읽은 기록!

 

타자나 공동체나 이웃에 대한 그 어떤 관심도 없는 오직 자기 자신에 대한 보고서!

과연 이런 책이 이전에도 이후에도 있기나 했었던가.

 

이것이 <불안의 서>가 불편하면서도 매혹적인 이유이리라. 이 책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당신도 당신 자신을 향해 깊이 들어가 보라.

내 속에 있는 또 다른 나, 너무나 많은 나, 그러나 오직 진짜인 하나뿐인 나.

아니면 두 개의 진짜 나, 혹은 그 이상. 

 

 

<불안의 서>의 서문에서 페소아는 어느 식당에서 어느 남자를 본다. 그 남자는 페소아의 관심을 끌고,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드디어 페소아는 그에 대해 보고 그를 기록한다.

나라는 자아를 가진 누군가가 그와 마주쳤고

나는 그다. 혹은 나라는 자아를 가진 그가 그의 자아를 지닌 나를 만난 것이다.

 

 

 

<불안의 서>를 처음부터 끝까지 읽을 필요는 없다. 어느 쪽을 펴서 그냥 읽으면 된다. 다른 날은 다른 쪽을 읽어라. 시간의 순서나 이야기의 흐름 따위는 없다. 생각의 전개도 없다. 서론 본론 결론은 더더욱 없다. 그저 파편적인 생각들뿐이다. 파스칼의 <팡세>와 같이 여러 생각들을 주제 없이 묶은 책이다.  <팡세>가 기독교적 열망으로가득 차 있고, 본의 아니게 어떤 목적성을 띨지라도.

<불안의 서>는 아무런 목적도 어떤 사실도 없다. <불안의 서>는 사실 없는 자서전이니까.

 

 

페소아는 자신을 그저 존재하는 사람, 삶을 살 줄 모르는 사람으로 칭한다. 그는 우리가 영혼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란 단지 삶을 미학적인 대상으로 관조하는 것뿐이다.”라고 말한다. <불안의 서>가 바로 삶을 미학적인 대상으로 관조한 기록인 것이다.

 

그는 만물을 우리의 본질로 내면화하겠다는 생각으로 모든 것을 몽상.

그러므로 독자는 그의 몽상을 아무런 생각 없이 따라가 보기만 하면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인생이 집과 같다고 본다. 명부로부터 올라온 우편마차가 나를 데리러 오기가지 그 안에서 일정 시간을 보내야 하는 집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인생이라는 집에 갇힌 시간들을 즐기면 되는 것인가.

 

 

낮 동안 거리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그런 북적거림은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밤이 되면 거리는 부재하는 북적거림의 공간이다. 그런 북적거림 역시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밤이면 나는 내가 된다.”

 

밤은 잠과 꿈을 품고 있다. 밤의 잠과 꿈에서 영혼이 깨어난다. 나는 내가 된다.

 

의미도 생각도 없는 무의식과 재앙이 한꺼번에 뒤섞여 있다. 이것이 삶이다.”

 

 

예술은 인생과 같은 거리, 하지만 다른 번지에서 산다. 예술은 인생의 무게를 가볍게 해주지만, 예술 덕분에 인생을 살기가 실제로 더 쉬워지는 건 아니다. 예술은 인생만큼이나 단조롭다. 단지 다른 번지, 다른 장소에 놓여 있을 뿐이다.”

 

 

어쩌면 작가는 두 개의 영혼을 가지고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나는 인생을 위하여, 다른 하나는 예술을 위하여. 

그 사이에도 거리, 간격이 있다. 

두 개의 심연 사이의 거리, 간격, 공백, 그것이 영혼을 불안하게 만드는지도 모른다. 

 

 

내 안의 모든 요소들은 항상 어디로든 향하고 있으며 뭔가 다른 것으로 변화하려는 성질이 있다. 내 영혼에는 마치 성가신 아이와 같은 짐스러운 조급함이 달라붙어 있다, 그것은 쉬지 않고 자라나는 동일한 성질의 불안이다. 모든 것이 나를 옭아매지만, 아무것도 나를 붙들어주지는 못한다. 나는 이 모두를 의식하면서 끊임없이 몽상에 잠긴다. 나는 대화를 나누는 상대방의 미세한 표정의 움직임도 놓치지 않고, 목소리의 아주 사소한 변화도 알아차린다. 나는 상대방의 말을 들으면서도 그에게 귀를 기울이지 않은 채 속으로는 뭔가 전혀 다른 것을 생각한다.”

 

누구나 이런 경험을 한다. 어떤 것에 집중하면서도 다른 것에 멍하니 빠져 있는 상태!

그러므로 이런 결론에 도달하기도 한다.

 

 

나는 둘이다. 두 개의 나는 간격을 두고 떨어져 있다. 그들은 서로 몸이 붙어 있지 않은 샴쌍둥이와 같다.”

 

또한 이런 고백도 하게 되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결코 우리 자신을 실현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두 개의 아득한 심연입니다. 하늘을 응시하는 우물입니다.”

 

서로 떨어져 있는 두 개의 나, 두 개의 자아, 두 개의 심연, 두 개의 영혼, 하늘을 응시하는 우물, 하늘을 품은 우물. 둘 사이의 간격. 간격이라는 공백. 텅 빈.

 

 

<불안의 서>의 앞부분에서 불안이 왜 생겨날 수밖에 없는지 단초를 읽을 수 있다.

불안이란 결국 나 자신, 나의 자아가 흔들리기에 발생하는 상태이다.

하나의 자아, 하나의 정체성, 분리되지 않는 자아를 가진 인간은 불안에 휩싸일 경우가 드물 것이다.

그러나 두 개의 자아를 지닌 인간은 그 둘 사이의 간격에 불안을 느낄 수밖에 없다.

내가 나라는 증명을 스스로 할 수 없는 상태.

무의식, , , 환상, 몽유, 비몽사몽, 이런 것들에 속해 있는 자아를 문득 발견할 때, 이때 불안은 소용돌이친다.  

페소아가 아닌 페소아, 여럿인 페소아.

명료한 의식으로 자아를 인식하는 상태가 아니라면 불안은 언제나 영혼을 잠식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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