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시 산책] 김기택 <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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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리뷰

[명시 산책] 김기택 <낫>

by 브린니 2023. 9. 11.

 

 

안쪽으로

날이 휘어지고 있다

 

찌르지 못하는

뭉툭한 등을 너에게 보이면서

심장이 있는

안쪽으로 구부러지고 있다

 

팔처럼

날은 뭔가를 껴안으려는 것

푸르고 둥근 줄기

핏줄 다발이 올라가는 목이

그 앞에 있다

 

뜨겁고

물렁한 것이 와락 안겨올 것 같아

날은 몸을 둥글게 말아

웅크리고 있다

 

김기택

 

 

 

산책

 

안쪽으로

날이 휘어지고 있다

 

낫 놓고 기억자도 모른다고 했던가.

ㄱ자는 바로 서 있고, 낫은 좀 구부러져 있으니 모를 수밖에.

 

낫은 누군가를 찌르지 않게 안쪽으로 살짝 구부러져 있다.

아주 미세하게 안쪽으로 말려 있어서 곧게 뻗어 있다고 착각할 수도 있다.

 

낫은 안쪽에만 날이 서 있다.

그러나 벼를 벨 수도 있고, 물론 사람의 목을 벨 수도 있다.

 

그러나 칼이 있는데 낫은 무기로서는 점수가 낮다.

낫은 날이 안으로 향한다.

 

찌르지 못하는

뭉툭한 등을 너에게 보이면서

심장이 있는

안쪽으로 구부러지고 있다

 

너를 향해 가는 것이 아니라

나를 향해 깊이 들어선다.

 

팔처럼

날은 뭔가를 껴안으려는 것

푸르고 둥근 줄기

핏줄 다발이 올라가는 목이

그 앞에 있다

 

낫은 밖을 모른다.

낫은 자기 안에 있는 것만을 자른다.

그것이 낫을 든 사람의 목인지도 모르고.

혹은 낫의 끝이 주인의 심장을 향하고 있는 줄도 모르고.

 

낫은 벼의 목을 자를 때만 써야 한다.

 

뜨겁고

물렁한 것이 와락 안겨올 것 같아

날은 몸을 둥글게 말아

웅크리고 있다

 

낫은 팔처럼 무언가를 안을 수 있지만

무언가를 안았을 때 일어날 수 있는 붉은 비극을 예상하고는

몸을 사린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은

그 사람을 나에게로 끌어당기는 행위다.

 

보듬고, 키스하고, 애무하고, 어루만진다.

 

그러나 나의 팔이 낫이라면?

나의 팔에 안긴 그대가,

그대의 목이, 그대의 가슴이 잘리고, 찔린다면?

 

김기택의 <>은 사랑한다는 이유로

상대방을 내쪽으로 끌어당기는 행위가

자칫 낫처럼 위험천만할 수 있다는 것을 일깨우려는 듯하다.

 

그러나 동시에

상대가 다칠까봐

상처 받을까봐

지레 몸을 웅크리는

한 남자의 애닯은 사랑의 마음과 행위를 그리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가끔 무서운 낫이 되곤 한다.

그러나 그것이 상대를 자르고, 찌를 수 있다는 것을,

심지어 자기 심장을 찌를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깜짝 놀란다.

 

나의 팔이 낫이 되지 않도록…… 부드러워지자.

말랑말랑한 사랑.

 

모차르트의 피아노협주곡 23번 2악장의 피아노 연주처럼

조심스럽고 부드럽고 애잔하면서도 깊은 사랑이 

그리운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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