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스 피카르트 <인간과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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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리뷰

막스 피카르트 <인간과 말>

by 브린니 2023. 9. 12.

인간과 말

 

 

사람과 쇠파리의 유전자 구조는 생각보다 그렇게 큰 차이를 나타내지 않는다고 한다. 그럼에도 인간과 파리의 삶은 하늘과 땅만큼 크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인간은 어떻게 해서 지구상의 다른 생명체와 다르게 지금과 같은 문화와 문명을 이룩하며 살 수 있었을까.

 

지능으로 말한다면 사람은 개와 고릴라와 돌고래와 같은 포유류 동물들과 그렇게 큰 차이를 보인다고 말할 수 없다. 그런데도 인간이 이룩한 것과 동물들의 삶에는 너무나 큰 차이가 존재한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인간과 다른 생명체와의 근본적인 차이는

 

그것은 바로 인간은 말을 할 수 있고, 다른 생명체는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다. 인간이 말을 한다는 것이 단지 의사소통할 수 있다는 데 그치지 않는다.

 

 

인간은 말을 할 줄 알기에 지식을 전달할 수 있고, 지식을 축적하고 다른 세대로 전할 수 있다. 말에 따르는 문자를 개발해서 지식을 기록하고 후대에 남겼다. 이렇게 축적된 지식은 인문학과 과학을 발전시켰고, 예술과 종교를 가지게 되었고, 현재의 문화와 문명을 이룰 수 있었다.

 

인간은 생각하는 동물이다, 라는 말이 있다. 사람은 어떻게 생각할 수 있는가. 바로 언어가 있기 때문이다. 언어가 없다면 단순한 생각을 할 수 있겠지만 하나의 생각에 다른 생각이 이어지고, 그 생각에 옷을 입히고, 설계도를 그리고 집을 지을 수 없다.

 

생각이 생각되어지는 방식은, 인간의 외부에 있으면서 인간의 일에 참여하는 무엇인가가 있음을 암시한다.”(34)

 

배가 고프다고 느낄 수 있고, 무엇을 먹을까 생각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나는 여전히 배고프다라고 말할 때 그것은 단순히 배고프다는 현상을 넘어 어떤 의미를 지닌다. 2002년 거스 히딩크가 그 말을 했을 때 그것은 나는 항상 승리에 목마르다는 뜻이었다.

 

이처럼 배고프다는 느낌을 넘어 그것을 발화했을 때의 의미는 다를 수 있다는 것이다. 말은 단순히 어떤 현상이나 존재를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말 자체는 의미와 상징 등을 지닌다.

 

말이 뭐가 중요해, 마음이 중요하지, 하고 말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말을 하지 않는다면 알 수 없는 것이 너무나 많다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지만 말하지 않는다면 아내는 남편이 나를 사랑하는지 알 수 없을 때가 많다. 사랑은 늘 표현해야 하는 것이고, 그 첫 번째는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소위 썸을 타고 있는 연인들이 자주 하는 말이 있다. 아직 사랑 고백을 받지 못했다고. 사랑 고백이란 결국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의 창가에서 사랑의 노래 세레나데를 부른다고 할 때 그것은 말로 하는 것이다. 노래가 없는 악기 연주만으로 사랑하는 마음을 제대로 표현하기는 어렵다. 결국 가사가, 말이 필요한 것이다.

 

 

언어가 없다면 인간의 세상은 없다. 말이 없는 인간 사회는 죽은 사회이다. 말을 못하는 분들은 수화로 의사를 전달할 수 있다. 그러나 수화가 가능한 것도 보통의 말, 언어 자체가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말을 못하는 분들도 수화나 문자로 소통하고 지식을 습득하고 축적할 수 있다. 인간을 결정하는 것은 언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왜 인간만은 다른 생명체들과 달리 언어를 사용할 수 있을까. 아무리 인간을 포유류에 속하는 고등동물의 하나라고 규정하더라도 그것이 인간을 규정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동물을 넘어, 인간만이 다른 생명체들과 달리 문명을 만들고 사는 원인을 밝히기는 어렵다. 결국 인간만이 가진 언어 사용 능력에 주목할 수밖에 없다.

 

 

말은 인간에게 주어진 것일까, 아니면 인간이 지능으로 터득한 능력이나 지식 가운데 하나인 것일까. 늑대인간은 말을 하지 못한다, 사회와 격려되어 동물처럼 살면 언어능력을 잃는다, 맞는 말이긴 하지만 꼭 그렇다고 할 수 없다. 늑대인간처럼 동물처럼 살던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그를 인간사회로 데려와 사람으로 살게 한다면 그는 곧 언어를 습득하고 언어를 구사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러나 늑대를 인간 사회로 데려와 길들인다고 해서 늑대가 말을 할 수는 없다.  

 

말은 배우는 것이라고 할지라도 언어를 배울 수 있는 능력은 인간에게 주어진 것이다. 인간이라면 언어를 지니고 태어난다고 할 수 있다. 

 

인간이 언어를 사용한다는 것은 인간은 언어를 사용해 뭔가 다른 것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고, 인간이 창조적 행위할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을 뜻한다

 

창조 행위가 가능하다는 것은 인간이 어떤 신적인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말이다. 우리가 신을 정의할 때 신은 인간을 비롯한 세상의 모든 것을 창조했다는 것을 전제한다. 신만이 창조행위가 가능하다.

 

인간이 뛰어난 정신으로 신을 창조했다는 생각도 있지만 대체로 신이 인간을 비롯한 모든 피조물을 창조했다는 기존의 생각을 존중한다면 인간이 창조행위를 할 수 있고, 그리고 그것이 언어에 근거한다면 인간이 신으로부터 이런 능력을 부여받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언어는 인간에게 미리 주어져 있다. 인간이 말을 시작하기 이전부터 언어는 인간 속에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인간은 처음부터 말을 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인간은 자신 속에 선험적으로 내재하는 언어를 사용해서 말을 하는 것이다. 선험성은 인간 외부에서 왔지만 원래부터 인간을 위해 존재한다. 선험성은 신의 의지다.”(16-17쪽)

 

성경에서 보면 신은 인간에게 자신의 형상을 부여했다. 형상을 단순히 겉모습으로만 볼 수 없다. 겉모양에서부터 성품, 성질 모든 것을 뜻한다. 신은 자신의 언어를 통한 창조적 능력을 인간에게 부여한 것이다.

 

성경은 신이 세상을 언어로 창조했다고 말한다. 신이 창조한 인간은 인간으로 진화할 어떤 배아 상태가 아니라 완성된 인간이었다.

 

인간이 만들어내는 모든 창조행위에는 바로 언어가 필수적이다. 그 어떤 것도 언어 없이 이루어지는 것은 없다. 인간이 바벨탑을 하늘에 닿게 세우려고 하자 신은 인간들의 언어를 다양하게 흩으려뜨려 이를 막았다. 인간이 이룩한 과학과 기술 문명은 언어 없이는 불가능했다. 

 

첨단과학이라고 할 수 있는 컴퓨터와 사이버스페이스, 인공지능 등 이 모든 것 역시 언어로 이루어져 있다. 단순한 프로그래밍 언어에서부터 아주 복잡한 AI까지 모두 말이 없다면 불가능한 것이다.

 

언어의 선험성은 이 세계를 창조한 신의 어휘의 흔적이다.”(22쪽) 

 

말이란 소리 언어다. 문자는 소리 언어에서 파생한 기호 언어이다. 모든 기호와 상징 등도 소리 언어를 대체하고 새로운 의미를 생성하는 표기된 언어이다. 특히 악보의 음표는 문자 언어를 초월하는 기호 언어이다. 인간이 만든 것들 중에서 음악만이 언어를 초월하는 특성을 지닌다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인간은 언어구사능력을 타고 나는 것이 분명하다. 이것은 일차적인 창조이며 이런 일차적인 창조는 인간에게는 불가능한 것이다. 물론 사이버인간, 복제인간을 만들어 인간처럼 말하고 행동하게 할 정도로 과학기술이 발전하고는 있지만 이것 역시 이차적인 창조이지 인간 자체를 만들어내거나 인간에게 어떤 능력을 선천적으로 부여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어쩌면 인간이 신 앞에 겸손할 수밖에는 없는 이유가 이 때문인지도 모른다. 백번 양보해서 우주가 신의 창조물이 아니라면 최소한 자연 그 자체 앞에 겸손해야 한다. 인간 역시 자연이 자연발생적으로 만들어낸 것일 테니까 말이다.

 

인간은 스스로를 창조하지 않았다. 부모가 자식을 낳는 것과는 별개로 인간이란 종 자체, 태초의 인간은 누군가로부터 창조되지 않는 한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이 신이든, 자연 자체이든.

 

어쩌면 인간에게 말이란 단순히 언어 이상의 것이다. 말이란 인간 존재 그 자체와 같다고도 할 수 있다. 내가 그의 이름의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하나의 몸짓에 불과했다, 라는 싯구처럼 언어란 존재 자체를 규정하고, 의미를 부여하고, 존재가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다

 

 

막스 피카르트의 <인간과 말>은 인간에게 말이란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인지 여러 챕터를 통해 차근차근 이야기 하고 있다.

 

그는 첫 번째로 언어의 선험성, 말이란 인간에게 주어진 것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그래서 기독교적 세계관에 편중되어 있다고 비난을 듣기도 한다. 그러나 언어를 설명하기 위해서 언어의 선험성은 필요불가결한 것이다. 언어가 우리 밖에서 왔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며 우리가 언어를 구사할 수 있는 능력 또한 개발한 것이 아니라 타고 난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래서 언어가 어디서 온 것인지를 밝히려 한다면 결국 언어의 선험성, 언어가 인간에게 주어진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다.

 

"죽음이 미리 주어지지 않았다면, 죽음은 개인을 기습하는, 훨씬 더 격렬한 사건일 것이다."(36쪽) 

 

막스 피카르트는 말이 인간에게 종속된 것이 아님을 강조한다. 그것은 말이 말 자체로 존재하며 그것이 인간에게로와서 말해지는 것임을 강조한다

 

"인간은 매순간 말을 통해서 자신의 구조와 자신의 과거를 넘어설 수 있다."(86쪽)

 

말은 말로서 존재하며 인간에게로 와서 자신의 빛, 힘 등을 자유롭게 구사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말은 인간에게 주어지는 동시에 인간으로 하여금 말하게 하여서 그 말을 통해 인간이 새로운 영역으로 들어설 수 있게 한다. 즉 신의 창조 행위에 참여할 기회를 얻게 되는 것이다. 

 

인간이 자신을 넘어 '신에게로 가는 통로' 그것이 언어인 것이다. 

 

"인간은 자기를 초월하여 더 높은 곳으로, 자신이 원했던 것보다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간다."(101쪽)

 

여기서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언어가 진리를 말할 수 있는가,이다. 우리는 말이 얼마나 많이 거짓을 말하는지 잘 알고 있다. 사랑한다는 말조차 헛되고 헛된 결과를 가져오는 경우가 무지 많다. 인간이 자기를 초월할 수 있는 것이 언어로부터 온다면 그 언어는 반드시 진리에 기초해야 할 것이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작가 마르셀 푸르스트는 "진리는 스스로를 드러내기 위해 말해질 필요가 없다"고 썼다. 

 

예수는 빌라도가 진리가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침묵했다. (예수 자신이 그 자체로 진리이기 때문에?) 

 

진리란 말해지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진리가 말로써 선포되지 않는다면 진리를 알 수 있는 길이 또 어디 있을까. 

 

막스 피카르트는 신으로부터 온 진리와 신의 사랑의 창조행위를 같은 선상에서 이야기한다. 신이 언어로 인간을 창조할 때 진리는 언어라는 전체성과 함께 그 속에 내재한다. 또한 신이 인간을 창조했다는 사실 자체가 신의 무한한 사랑의 발현인데 신은 인간이 언어를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하여 자신(신)의 사랑을 알 수 있도록 했다. 

 

"인간의 공동체는 진리에 기반을 두어야 한다.  그래야만 사랑이 공동체를 구축하느라 스스로 소모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공동체가 이미 단단한 진리 위에 서 있다면, 거기서 사랑은 과잉이다. 사랑은 과잉이 됨으로써 비로소 자기 자신으로 머물 수 있다. 온전하게, 오직 그것, 단지 사랑이라는 자신으로."(98쪽) 

 

사랑은 언제나 무언가를 창조한다. 그러므로 사랑은 늘 과잉이다. 언어 또한 그러하다. 언어 역시 인간 이전부터, 인간 창조에 관여하고, 이제는 인간의 창조를 가능케 한다. 언어는 인간을 넘어서고 흘러넘치고 세상에 가득하다. 

 

사랑과 언어는 그 속성상 이미 선험적으로 존재하며 인간 속에서 혹은 인간과 더불어 더 나은 것들을 창조한다. 진리에 기초한 사랑과 언어는 하나의 전체(총체)로서 신과 함께 인간을 통하여 창조를 계속한다. 

 

"사랑 안에서는 분리된 상태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듯하다.  … 내면의 언어는 사랑 안에서 가장 완벽한 전체성을 가진다."(119쪽) 

 

 

 

막스 피카르트는 언어가 인간 이전에 존재했으며, 신의 흔적으로서 인간에게 왔으며, 인간은 언어를 통해 신을 향해 나아가며 그 과정에서 모든 창조적 행위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인간은 말(언어)을 통해 신의 계획에 동참하고 신의 일을 맡아 행한다. 이것이 신으로부터 온 인간 삶의 목적인지도 모른다. 진리에 기초한 신의 창조에 동참하여 신의 사랑을 다른 인간들과 서로 나누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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