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에르노 <부끄러움>
본문 바로가기
독서 리뷰

아니 에르노 <부끄러움>

by 브린니 2023. 9. 3.

부끄러움 La Honte

 

아니 에르노 Annie Ernaux

 

“6월 어느 일요일 정오가 지났을 무렵, 아버지는 어머니를 죽이려고 했다.”

소설의 첫머리는 이렇게 시작한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말다툼 끝에 밥상머리 앞에 앉았지만 어머니는 연신 아버지에게 비난을 퍼부었다. 아버지는 창가 쪽으로 고개를 돌린 채 식탁에 묵묵부답 앉아 있었다. 그러나 돌연 발작적으로 몸을 부르르 떨고 숨을 가쁘게 내쉬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한번도 들어본 적 없는 탁한 목소리로 악을 쓰고는, 내가 보는 앞에서 어머니를 붙잡고 식당으로 질질 끌고 나왔다.”

 

어두컴컴한 지하실에서 아버지는 어머니의 어깨인지 목덜미인지를 틀어쥐고 있었다. 아버지 손에는 나무둥치에 박혀 있던 전지용 낫이 들려 있었다.”

 

나는 아빠가 내 불행을 벌어놓은 거야.” 하고 말했고, 어머니는 , 이젠 끝났다라고 말했다. “그러고 나서 우리 셋 모두 자전거를 타고 근처에 산책을 나갔다. 돌아오자 아버지는 여느 일요일 저녁과 마찬가지로 다시 식당 문을 열었다. 그리고 그 일은 더 이상 문제 삼지 않았다.”

 

1952615.

 

나의 인생에서 한 획을 그은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어쩌면 좀 심한 부부싸움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사건 이후로 가족은 이전의 가족과 다른 가족이 된다.

 

이 사건은 다른 사람들에게는 결코 말할 수 없고, 가족끼리도 더 이상 말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훗날 몇몇 남자들에게 나는 내가 열두 살쯤에 아버지가 어머니를 죽이려고 했었어라고 말한 적이 있다. 내가 이 문장을 말하고 싶었다는 것은 그들을 무척 사랑했다는 의미였다. 그 남자들은 이 말을 듣고는 모두 입을 굳게 다물었다. 나는 내가 실수했고, 그들은 이 말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런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연인들에게 가끔 일어나는 일이다. 자신의 어린 시절이나 청소년기의 비밀스런 경험담을 들려주는 것. 그러나 그 사건이 정말 치명적일 경우 그것을 들은 상대방은 의아해하거나 거짓말처럼 느끼거나 도저히 공감할 수 없는 상태가 되기도 한다.

 

나의 치명상은 다른 사람과 공유하기 어렵기 때문일까?

지나칠 정도로 자기 이야기를 과감하게 하는 사람을 우리는 받아들이기 어려워하는 경향이 있으니까.

 

그 일 이후 나는 건성으로 살았다. 수업도 대충 듣기 일쑤였다.

자기 능력을 믿는 학생이었던 나의 시큰둥한 태도는 그 어느 것에도 집중하지 못하는 일종의 초의식으로 대체되었다." 

 

 

이 소설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죽일 듯한 부모의 부부싸움이 아니다.

왜 아버지가 어머니를 죽이려 했는가에 대한 추리나 분석도 아니다.

이 소설은 나에 대해 말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이 사건 이후 나의 인생이 어떻게 달라졌는가, 이다.

겉으로의 변화보다는 나의 의식과 삶의 태도나 방식이 어떻게 달라졌는가, 이다.

 

한 마디로 나는 이때부터 가족의 사랑이나 인간적 본능에 가까운 감정에 치우치지 않는 시큰둥한 태도와 집중하지 않는 초의식을 갖게 된 것이다.

 

이 사건은 더 이상 부모를 존경하거나 애틋하게 생각하기보다는 부끄러워하게 되는 결과를 낳게 된다.

 

이 소설은 이후부터 그 부끄러움의 정체를 밝히는 데 열과 성을 다한다.

 

 

19526, 나는 우리 동네를 벗어나 본 적이 없다. 그곳은 아니 에르노의 고향 이브토를 말하고 있다. 나는 그 너머를 꿈꿀 수도 없었다. 그러나 그 사건 이후로 이브토는 떠나야 할 어떤 곳이 되고 만다. 이브토에서 일어난 가족 내 사건 때문이다. 가족이 깨지고 그 가족을 둘러싸고 있던 고향이라는 장막이 벗겨지는 것이다.

 

 

그 사건 이후 부모 사이의 애정 표현은 오로지 그것이 표현되는 순간에만 의미가 있을 뿐 미래에 대해선 어떤 것도 보장할 수 없음을 알게 되었다.”

 

가족과 가족을 둘러싼 사회가 영원할 것이라는 믿음이 깨진 것이다. 그것들은 이제 순간에 불과하며 미래에는 어떤 모습으로 바뀔지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바뀐 것은 세계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다.

 

사랑과 행복으로 가득 찬 유년 시절과의 결별과 동시에 자신의 세계에 대한 부정. 그것은 바로 부끄러움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1995년 이 글을 쓰기 시작한 때로부터 되돌아보는 그때는 아직도 여전히 부끄러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시절인 것이다.

 

아니 에르노는 루앙에서 대학을 다녔는데 대학을 다니기 전부터 루앙에 가면 시대나 지성, 행동이나 말의 여유로움 같은 면에서 뒤쳐졌다라는 막연한 느낌을 받았다. 내게 루앙은 연재소설이나 패션잡지처럼 미래의 한 얼굴이었다.”

 

아니 에르노는 이 소설에서 이브토라는 고향 이름을 말하지 않고 그냥 Y라고만 쓴다. “이곳은 내가 돌아갈 때마다 나에게서 모든 사고력, 거의 모든 분명한 추억을 박탈하여 다시금 나를 궁지에 옭아 넣을 듯한 마비감으로 사로잡는 이름 없는 원초적 장소이기 때문이다.

 

어떤 사건을 경험한 뒤 시간은 흐른다.

그러나 그 사건의 장소는 늘 거기 있다.

 

그래서 그 장소가 거기 있는 한 고향 이브토는 내게 금지된다.

그 이름을 말해서도 안 되고 다시 돌아가서도 안 되는? 곳인지도 모른다.

 

그 도시에는 두 연못이 있는데 두 연못 사이에는 좁다란 맨 땅의 길이 있다. 거기가 여행자의 늪이라 알려진 Y의 죽음의 장소 같은 곳인데, 도시 끝에 사는 여자들이 와서 투신자살하는 곳이다.”

 

아니 에르노가 이야기를 하는 것은 단순히 Y시의 풍경을 소개를 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죽음의 장소, 즉 거기서 자신의 유년기가 죽었음을 상징하기 위해서이다.

 

자신은 이미 한 번 죽었으며 그 이후는 그저 건성으로 살고 있다는 것이다. 그 후로 부끄러움에 사로잡혀 자신의 본 모습을 잃고 살았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 부끄러움은 단순히 나 혹은 가족에 대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속한 사회, Y시 자체에서부터 시작된다.

 

시골이 도시와 다른 차이가 겉으로 드러나는 것은 바로 사투리이다.

사투리는 낡고 추하고, 촌스럽다. 그 느낌은 부끄러움을 불러일으킨다.

그것은 못 배움과 교양 없음, 못 사는 것을 연상케 한다.

 

어머니는 상점을 운영했기에 사투리를 쓰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그것은 그저 헛된 노력일 뿐 어설픈 표준어 구사는 사투리를 쓰는 시골 여자임을 더 두드러지게 보여줄 뿐이다.

 

시골과 가난은 서로 맞닿아 있다.

시골의 삶은 절약과 검소를 강조한다.

 

시골의 삶은 경제적인 면뿐만 아니라 문화적인 면에서 도시와 상이하다.

가장 두드러진 것이 바로 개인의 인격을 존중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공동체 의식을 강조하다 못해 개성을 말살?한다.

 

만인이 만인을 감시하는 식이었다. 다른 사람이 어떻게 사는지 반드시 알고 싶어했는데, 그것은 남에게 떠들어대기 위해서인 동시에 자기의 삶은 철저히 감춰야 했기 때문이었다.”

 

어느 면접장에서 어떤 후보자가 자신의 시골 마을에서 자라서 모든 사람들이 자기를 잘 알았기에 늘 모범적으로 살아왔다고 자부하는 걸 들은 적이 있다

 

시골에선 옆집 숟가락이 몇 개인지 다 안다, 라는 말이 있다.

삶을 투명하게 공유한다는 뜻일 텐데 역으로 말하면 지나치게 타인의 삶에 개입한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누군가에 대해 정보를 많이 안다고 해서 그 사람에 대해서 제대로 아는 것은 아니다.

 

이문열의 <익명의 섬>이라는 소설에서는 이 점을 잘 보여준다.

어느 마을 여인들이 어떤 사내와 돌아가며 불륜을 저지르지만 잘 모를뿐더러 그 사실을 서로 쉬쉬한다는 것이다.

 

시골의 삶은 모든 것이 다 드러나는 것처럼 보이지만 감춰져 있고, 드러나는 부끄러움은 서로 감춘다는 말이다.

 

만인이 만인을 감시하고, 만인이 만인의 죄를 덮는 식이라고나 할까.

 

어쩌면 이 소설에선 드러나지 않지만 혹시 또 아는가.

아버지가 어머니를 죽이려고 했다는 것을 마을 사람 중 어느 누군가 알고 있으며 동시에 마을 사람들 모두가 알고 있으나 쉬쉬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사람들은 남들의 행동거지를 관찰하고 숨겨져 있는 아주 조그만 습성을 분석했고, 그런 것들을 모아 해석을 붙이면서 한 사람의 역사가 만들어졌다. 그것은 각자가 조그만 말 한마디씩 덧붙여서 만들어지는 집단 소설 같은 것이었다.”

 

문제는 그것이 소설이라는 데 있다. 그것이 사실이 아닐 수도 있으며 진실은 더더욱 아닐 수 있다는 뜻이 숨겨져 있다.

 

여러 사람들이 말을 덧붙여서 만들어진 역사는 진실이 아니라는 게 작가의 생각이다.

 

그래서 아니 에르노는 자신이 경험한 것만 쓰고, 오직 진실만 쓰겠다고 다짐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자신의 작품을 소설이라고 부르기를 거부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니 에르노는 스스로 나만의 인류학자가 되려고 한다.

 

 

아니 에르노의 작품이 개인을 넘어 사회학적 가치를 띨 수 있는 것도 한 사회를 자신의 눈으로 보고 거기서 발견한 진실을 역사와 사회적 관점으로 풀어내기 때문이다.

 

그런 전통 사회? 혹은 전근대적인 시골의 삶은 대체로 예의 차리기에 집중되어 있다.

그러나 동시에 예의란 일종의 보호 장벽인 셈이고, 따라서 부부 사이나 부모 자식 사이의 예의는 위선이나 악의처럼 느껴져서 불필요한 것이었다. 거칠고 노골적이고 악을 쓰는 것이 정상적인 가족 간의 대화였다.”

 

지나칠 정도로 예의를 강조하면서도 가족끼리는 아무런 예의도 없고, 예의를 갖추는 것을 오히려 거부하면서 함부로 대하는 것이다.

 

다른 소설에서 아니 에르노는 어머니로부터 수시로 따귀를 맞는다. 아버지의 폭력이 어머니에게 이어진 것인지도 모른다.

 

가족 내 예의 없음, 더 나아가 폭력은 시골에서는 아무렇지도 일어나는 것이다.

 

상점을 운영하는 어머니는 손님들에게 늘 친절하고 좋은 말과 행동을 하려고 애쓴다. 그러나 아버지에게나 딸에게는 그렇지 못하다.

남들 눈에 잘못 보이지 않으려고 겉으로는 엄청 애쓰지만 실제 삶은 그렇지 못한 것이다.

 

예의 차림이 나쁜 것은 예의를 차리려고 애를 쓰는 데서 발생하는 이중성이다.

다른 사람에게 잘 보이기 위해 애쓰지만 진정 자신에게는 불충실한 결과를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항상 남에게 노출되어 살다 보니 점잖은 언행을 하고 분노나 슬픔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질투나 호기심 혹은 소문의 대상이 될 만한 것은 모두 감추게 되었다.”

 

이런 이중성은 사람의 인격을 뒤틀리게 만든다.

이렇게 뒤틀린 인격은 부끄러운 것이다.

이런 인격을 생산하는 그 사회 역시 부끄럽다.

 

아니 에르노가 <부끄러움>을 통해 밝히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사람의 인격을 정상적으로 길러낼 수 없는 구조를 갖고 있는 사회는 부끄러움을 만들어낼 뿐이다는 것이다.

 

남들처럼 살자는 것이 모든 사람들의 목표이자 성취해야 할 이상이었다. 개성은 일탈, 심지어 조금 미친 것 같은 증세로 간주되었다.”

 

시골 출신이라는 것은 그런 뜻이었다. 개성이 인정되지 않는 사회에서 온 아웃사이더.

 

 

아니 에르노는 수녀들이 운영하는 사립학교에 다녔는데 사립학교는 밖에서 학교 안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그곳에서 일어나는 일도 밖에서는 알 수 없다.

 

그곳에서는 종교의 억압?, 종교의 폭력? 등이 일어났지만 아무도 알지 못했고, 아무도 그것이 억압이라고 생각하거나 느끼지 않았다. 가족이나 우리 동네에서의 폭력이 그러하듯이.

 

그렇게 교육받은 나는 종교는 내 존재의 형식이었다. 믿는다는 것과 믿어야만 한다는 의무감이 구별되지 않았다.”

 

우리나라식으로 하면 모태신앙으로 자란 종교인들이 자신이 믿고 있다고 확신한 나머지 사실은 믿어야 한다는 의무감 때문에 노이로제에 걸려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한번도 억압된 삶을 산다는 느낌을 들지 않았다. 억압의 손아귀는 부드럽고 친근한 방식으로 우리를 조이고 있었다.”

 

예의는 사람 사이에 좋은 것이지만 예의 차리기가 인격의 이중성을 만들어내는 것과 같이 종교는 좋은 것이지만 종교적 억압(종교적 가르침으로 포장한)은 그릇된 믿음을 양산한다. 자신이 진자 무엇을 믿는지 알지 못하게 된다. 단지 교리를 신봉할 뿐이며 어떤 종교적 도그마에 충성할 뿐이다

 

그러니까 이중인격자가 되고 마는 것이다. 

 

나는 뛰어난 세계(사립학교)에서 뛰어난 성적으로 뛰어나게 보이는 학생이다. 뛰어난 학생으로 인정받는 데서 오는 특권을 누린다. 그러나 동시에 좋은 성적 때문에 남들에게서 따돌림을 받지 않으려고 실제로는 그렇지 않으면서도 기꺼이 산만한 문제아처럼 굴었다.”

 

나는 다른 학생이 아니라 유식한 선생인 마드무아젤 L과 경쟁한다. 유식한 것은 시골 출신이라는 한계를 넘어서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립학교에서는 촌구석과 관련된 모든 것은 경멸되었다.”

 

나는 <어린 소녀 브리지트>라는 소설을 읽는데 부모들이 싸움박질은 결코 하지 않는 세계에서 이 책은 기독교 윤리적 법칙의 우수성뿐만 아니라 부르주아 생활양식의 우수성도 함께 보여주고 있다.”

 

나는 성장하면서 고향과 도시라는 두 세계 어느 곳에도 속할 수 없음을 인식한다.

 

나는 사립학교, 그곳의 품위와 완벽함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나는 부끄러움 속에 편입된 것이다.”

 

어느 늦은 밤 행사를 마치고 교사는 나와 학급 아이들을 일일이 집까지 바래다 주었는데 어머니는 잠옷을 입지 않은 채 얼룩이 묻은 속옷 바람으로 가게 밖으로 나왔다.

 

아무렇게나 풀어헤쳐진 이상한 셔츠 사이로 내비친 어머니의 알몸뚱이를 통해 우리의 진면목,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이 발각된 것처럼 느껴졌다.”

 

★ 

 

1996년 이 글을 쓰는 작가 아니 에르노는 자신이 예전의 자신과 다르다고 느낀다. 그러나 19526월의 사건은 그때의 작은 여자아이와 자신을 같은 사람으로 만든다고 인정한다

 

 

아마도 1996년의 작가 아니 에르노는 루앙의 대학에서 지식과 교양을 쌓고 그로 인해 어느 정도 신분이 상승(대학교수)하게 되고 농부나 상점 주인이 아닌 글 쓰는 직업을 갖게 되어 이제는 고향과 그 사회와 계층으로부터 떠나온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원초적 장소를 잊지 않고 있으며 거기에 부끄러움을 느끼면서도 자신의 정체성이 거기 있음을 밝힌다.

 

부끄럽지만 그 부끄러움을 그대로 드러낸다.

나는 부끄러운 사람이라고

 

대개는 자신의 부끄러움을 감추고, (시골출신, 촌스럽다는 사실을 감추고) 과거의 자신이 아닌 현재의 성공한 자신의 모습을 인정받기를 원한다.

자신의 정체성이 과거가 아닌 현재 혹은 미래에 있다고 말하고 그렇게 믿고싶어한다.

 

그러나 아니 에르노는 자신의 원초적 장소, 부끄러움의 원천을 인정하고 그것을 말하고 그것을 인정한다.

 

그리고 그 부끄러움의 근거를 개인의 인격이나 삶에서뿐만 아니라 가족, 사회, 문화와 종교에서 발견한다.

 

아니 에르노의 소설이 그저 자전소설의 하나가 아니라 사회적 가치와 의미를 띨 수 있는 것도 그것 때문일 것이다.

 

한 개인의 삶을, 그것도 자신의 삶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면서 그 삶이 있게 한 가족, 사회, 문화, 종교, 역사적 진실에 대해 말하는 것, 그것이 노벨 문학상을 받은 아니 에르노 소설의 힘인 것이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