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에르노 <여자아이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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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리뷰

아니 에르노 <여자아이 기억>

by 브린니 2023. 8. 19.

 Annie Ernaux  <Memoire De Fille>  

 

 

이 소설은 일종의 메타픽션이라고 할 수 있다.

글을 쓰는 나와 글쓰기의 대상이 되는 나(그녀)가 상호작용을 통해 하나의 서사를 완성하는 것이다.

나는 현재 2014년의 어느 날들에서 1958년의 나(그녀)를 본다. 그리고 그녀에 대한 인상과 기억과 기록들을 되새김질한다.

 

그런데 되새김의 방식이 단순히 내가 그때 어땠는지를 기억을 통해 재구성하기보다는 현재의 나가 과거의 나(그녀)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면서 현재의 시점에서 그 상황이나 장면, 사건들을 복원시켜 나가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녀가 된다. 내가 보는 것은 내가 아니라 그녀이다. 나인 그녀이다. 아니 어쩌면 현재의 나와는 다른 과거의 그녀이다.

 

나는 끊임없이 그 시절의 그녀가 진정 지금의 나인가 회의한다.

의심당하는 것이 현재의 나인지 과거의 그녀인지 알 수 없다.

 

 

소설의 시작은 지도교사로 S의 여름방학 캠프에 입소하는 그녀를 보여주면서 시작한다. 그러나 수십 페이지가 지나도록 입구에서 서성일 뿐 캠프안으로 들어가지 못한다. 실제 그녀가 그곳으로 들어가지 않는 것이 아니라 글을 쓰고 있는 내가 자꾸만 그녀에 대한 조각난 기억들을 꺼내 이렇게 저렇게 떠들어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가 캠프에 들어가서 어떤 사건을 겪게 되는지는 소설이 시작한 지 한참이 지나서부터 시작된다. 소설이 시작되어 있으나 주변부만을 맴돌다가 나중에서야 본론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아니 뒤센느, 그것이 그녀의 이름이다. (작가 아니 에르노가 결혼하기 전 아버지의 성을 따랐을 때의 실제 이름일지도 모른다.)

 

40여 쪽이 넘어서야 그녀는 캠프로 들어간다. 그녀는 연애 상대가 될 만한 남자를 훑어보지만 눈에 띄는 남자는 없다. 토요일, 책임지도강사 H와 춤을 춘다. 불이 꺼졌을 때 두 사람은 입을 맞추고 파티장을 나와 그녀의 방으로 간다. 그가 다짜고짜 성관계를 시도하지만 그녀는 자신이 처녀라고 말하면서 비명을 지른다. 대신 H는 그녀의 입에 자신의 성기를 들이민다.

 

여자아이는 한 시간 전까지 상상조차 한 적 없는 경험을 하게 되지만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그저 목격하고 있었을 뿐이다. (가끔 사람은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제3자의 일처럼 느끼곤 하니까.)

 

 

현재의 나는 1958816일에서 17일 사이의 일에 대해 깊은 만족감을 느끼며 그녀가 처음 사랑을 나눈 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공포도 아니고 수치심도 아니고 그저 벌어지는 일에 대한 복종이자 벌어지는 일의 의미가 부재한 상태.”

 

벌어지는 일에 대한 복종과 의미 없음.

그러나 거기에 깊은 만족감을 느낀다.

 

그녀는 H와 다음을 기대하지만 H는 그녀를 거들떠보지 않는다. 그녀는 다정한 손길을 구걸하지만 발로 걷어차이는 개처럼 비참한 느낌을 받는다. 그리고 캠프 내 여러 사람들로부터 경멸의 대상이 되고 만다.

 

그녀는 처녀를 H에게 주어야 한다고 믿고 있으며 다른 남자들과도 일종의 썸이 있지만 처녀성을 사수한다. 그러면서 동시에 자신이 처녀가 아니라고 믿는다.

 

그녀는 H와 두 번째 밤을 맞이하고 새벽에 팬티에서 혈흔을 발견한다. 그러나 제대로 된 첫경험이었는지에 대해선 역시 확신할 수 없다.

 

S에서의 여름 캠프가 끝나고 그녀는 집으로 돌아온다.

 

소설은 S에서의 경험과 그 뒤 2년 동안의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다.

 

10월부터 생리가 멈췄다. 임신도 아닌데 저절로 생리가 멈췄고, 아주 오랫동안 생리를 하지 못한다.

 

학교로 돌아와 철학을 공부하면서 그녀는 S에 있었던 그 사람은 다른 여자이고, 내가 아닌 것 같다고 느낀다.

 

그것은 욕망의 대상이 되었다는 데 자부심을 느꼈다는 수치심에 근거했다.

 

그것은 68혁명에서나 있을 내 몸은 나의 것슬로건보다 앞선 시대의 역사적인 수치심이었으며 동시에 여전히 개별적이고 성적인 하나의 사건이고, 새로운 세기의 신념으로 녹아 없어지지 않고 그대로 남았다.

 

그녀는 시몬 드 보부아르의 <2의 성>을 읽으며 자유로운 주체로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를 고민한다.

 

1959년 여름에는 캉의 여름캠프에서 일한다. 그녀는 이제 S의 캠프를 매음굴이라고 여기게 된다.

 

9월에 루앙 사범학교 시험을 치르고 2등으로 합격한다.

 

19603월 말 그녀는 런던으로 간다. 집안일을 거들면서 학비를 버는 식의 프로그램에 지원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R과 함께 런던을 살면서 훔치기에 재미를 붙였다. 그것은 깡이 있어야 할 수 있는 일이었다. R이 걸리는 바람에 그녀는 증인으로 법정에 서서 적극적으로 R을 변호했다. R이 무죄로 풀려나오고 두 사람은 법에 맞서 이긴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철학을 공부하는 동시에 여러 경험을 하면서 그녀는 자신이 글을 쓰는 사람이 될 것이라고 느끼게 된다.

 

 

나는 나 자신을 문학적인 존재, 언젠가는 글로 써야만 하는 것인 듯 모든 일을 경험하는 누군가로 만들기 시작했다.”

 

 

아니 에르노는 자신이 경험하지 않은 것을 글로 쓰지 않는다고 말한 바 있다. 위의 문장처럼 아니 에르노는 자신을 문학적인 존재로, 모든 일을 경험하는 글로 쓰여지는 존재(글의 제재이자 주인공)이자 글쓰기의 주체로 만든 것이다.

 

나 자신과 자신이 경험한 것을 문학적인 어떤 과정을 통해 글로 써내는 것이 아니 에르노의 글쓰기 작업인 것이다.

 

그러므로 가장 중요한 것은 이다. 이기적인 자아가 아니라 모든 것을 경험한 나인 것이다. 모든 것이란 개인적인 것에서부터 사회적인 것, 역사적인 것 모든 것을 포함한다. 개인 는 그냥 나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가족 속에서 태어나고, 가족의 영향을 받는 동시에 사회의 일원으로 살아가게 되고 역사적으로 규정되는 어떤 시대를 사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개인적인 주체인 동시에 사회적, 역사적 주체이다. 내 삶은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지만 사회적이며 역사적이다. 이런 나를 쓴다는 것은 개별적인 나를 넘어서는 일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다른 누구와도 다른 개인적인 이다. 아니 에르노는 지독하게도 나에 대해 집착하고 내가 누구인가, 나는 왜 살고 있는가. 어떻게 살고 있는가, 돌아다 본다.

 

 

<여자아이 기억>은 어른이 되기 직접 마지막 소녀 시절에 대한 기억이다. 그녀는 1958년 여름캠프에 강사로 참여하게 되는데 처음으로 집을 떠난다는 흥분과 설렘으로 가득 차 있다. 거기서 연애 사건이 벌어지길 기대하기도 한다.

 

H와 성적인 첫 경험(제대로 된 것은 아니지만)하게 되고 자유와 타락을 경험하면서 이런 경험을 한 것에 대해 자부심을 느끼기도 한다.

 

어머니의 감시에서 벗어나 남자들과 어울리며 성적인 자유를 누리는 것이 행복했다.

 

그러나 시몬 드 보부아르의 책을 읽고 철학을 공부하면서 S 캠프의 생활을 부정하기도 한다. 그때의 그녀를 나로 인정하지 않기도 한다. 그러나 그 시절의 그녀(아니 D)는 나(아니 에르노)에게 깊은 인상으로 남아 있고, 언젠가 반드시 글로 써야 한다는 부담감으로 작용한다.

 

 

내가 그녀를 꼭 글로 써야겠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

소설을 읽으면 1958년 여름에 겪는 일들은 십대 청소년이라면 겪을 법한 일들이다. 연애를 시도하고 처음으로 성을 경험하고, 그로 인해 상심을 한다는 점에서는 별로 큰 일도 아닐 수 있다.

 

그럼에도 이 일은 나에게 중요한 계기로 작용하고, 나로 하여금 문학적인 존재가 되도록 하는 발판이 된다. 어쩌면 1958년 여름이 아니라면 나는 작가가 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이 시기의 나, 즉 그녀는 무슨 이유로 나의 문학적 근원이 되어 버린 것인가.

 

소설의 초반부에서부터 나는 그녀와 팽팽한 긴장 관계에 있다. 나는 그녀를 잊을 수도 지울 수도 부정할 수도 없다. 그렇다고 그 시절의 그녀가 오늘 나와 같은 인물이라고 인정할 수도 없다.

 

나 역시 그 여자아이를 잊고 싶었다. (...) 언제나 일기 속 문장들엔 S의 여자아이나 58년 여자아이에 대한 암시들이 있었다. (...) 그건 여전히 쓰지 못한 책이다. 언제나 뒤로 미뤄진. 차마 형언할 수 없는 구멍.”

 

그녀로 인해 생긴 구멍은 반드시 메워져야 한다. 

2014년 나는 드디어 그녀에 대해 쓰기 시작한다. 이럴 경우 어떤 식으로든 그녀와 화해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러나 소설에는 이런 과정이 별로 드러나지 않는다.

 

그녀에 대해 아는 사람은 나밖에 없다. 그렇다면 나는 그녀를 어떻게 기억할까.

 

기억할 사람이 나 혼자뿐이리라는 사실이 나를 기쁘게 한다. (...) 다른 어떤 것보다 더 다루기 어려우면서 더 세세히 떠오르는 수치심에 대한 이 방대한 기억. 요컨대 이 기억은 수치심이 주는 특별한 선물이다.”

 

나의 기억의 근저에는 수치심이 도사리고 있다. 나는 그녀를 수치스럽게 느끼는 것일까. 아니면 그녀의 일부분, 그녀가 경험한 일들에 대해서?

 

그렇다면 이 수치심은 어디서 오는 것이며 왜 수치심을 느껴야 할까.

 

1958년에 그녀는 S 여름 캠프에서 성적인 자유와 경험을 동시에 한다. 1958년에는 <2의 성>이 출간된다. 그녀는 이 책을 읽고, 철학을 배우면서 S 캠프에서의 일을 수치스럽게 여기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스스로 성에 대한 결정하지 못하고 타자의 욕망의 대상이 되는 것은 주체적이지 않다. 그러나 이보다는 성적인 대상이 된다는 것에 자부심을 느끼는 것이 수치스러운 것이다. 내가 주체적으로 욕망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 성적인 대상이 되었다는 데 자부심을 느끼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내가 나를 나로서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에 의한 인정을 바라고, 타자의 인정으로 인해 만족하고 그것 때문에 자부심을 느끼는 것은 주체적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68혁명에서 젊은이들이 부르짖은 것 또한 스스로 주체가 되는 삶을 살겠다는 것이다.

 

58년의 그녀가 중요한 것은 주체로서 철저히 실패함으로써 새로운 주체가 되는 길을 열었다는 데 있다. 가장 주체적이지 못한 결정과 행위를 통해 완벽하게 패배함으로써 그것에 철저한 수치를 느낌으로써 도리어 주체가 되는 역설적인 반전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58년 여름 그녀가 겪었던 일들은 청소년기를 거치면서 어쩌면 대부분 겪었을지도 모르는 사건일 수도 있다. 그러나 내가 그것을 어떻게 규정하는가에 따라 삶은 달라질 수 있다.

 

나는 H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여서 사람들에게 조롱거리가 되고, 모욕적인 언사를 많이 듣게 된다. 그러나 그때는 그것에 묘한 쾌감과 해방감을 느낀 것도 사실이다. 창녀같은 년이라는 소리를 듣는 것이 치욕스러우면서도 흥분을 일으킨다. 타락하는 것이 주는 해방감 때문일까. 그녀는 그 시절을 견디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묘한 행복감이 젖어서 보낸다.

 

아무도 그녀를 반기지 않고, 친구로 여기지도 않고, 행실이 나쁜 년으로 치부하더라도 그녀는 그들에게 받아들여지도 인정받고, 어울릴 수 있기를 바란다.

 

, 아니 에르노는 그때의 그녀를 계속해서 생각한다. 나는 그녀를 수치스럽게 생각하는가? 그녀의 행위를 비난하는가? 그 시절 그때가 너무 수치스러워 머릿속에서 지워버리고 싶어 하는가?

 

그렇지 않다. 나는 온전한 주체가 될 수 없었던 아직 모자란 그녀를 결코 내버릴 수 없다. 잠시 타락했다가 이젠 정신 차리고 온전한 사람이 되었다는 식의 해결방식을 모색하지도 않는다. 그 시절의 경험들을 수치라는 말로 규정하고 있지만 그녀의 삶 자체를 부정하거나 비난하지 않는다.

 

그런 수치가 진짜 주체가 되게 한다. ‘수치스럽기에 이제 바로 잡아야 한다도 아니다. ‘다시는 그렇게 살지 말아야 한다고 아니다. 소위 회개하고 새 사람 되자도 아니다. 나는 그녀를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다. 그 시절의 그녀가 나를 만들었다고도 말하지 않는다. 다만 나는 그녀를 잊지 않았고, 그녀가 느끼는 수치를 같이 느끼면서 그것을 진실로 인정할 뿐이다.

 

나는 수십년 동안 그녀와의 긴장 관계를 풀지 않았다. 그녀와 길항 관계를 유지하면서 문학적인 작업을 통해 수치를 복원하는 작업들을 계속해왔다.

 

나를 키운 것은 8할이 바람이었다는 어느 시인의 말처럼 나(아니 에르노)를 키운 것은 수치심이었는지 모른다.

 

글쓰기에 필수적이고 도움이 되는 일종의 전제조건, 일종의 속죄의 제스처

 

수치심은 이와 관련된 어떤 것일 게 분명하다.

 

수치심은 나로 하여금 글쓰기에 매달리게 하는 힘?이 아닐까.

 

 

 

1958년 여자아이가 수십 년 동안 나에게 글쓰기를 요구하는 것은 바로 내가 그때 처음으로 수치심의 본질을 진짜 경험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것은 가난한 서민층 부류라는 사실에 대해 느끼는 수치심과는 조금 다른 개인적이고 성적인 수치심이다. 그러나 이런 수치심이 단순히 개인에 머물지 않고 사회적이며 역사적인 것인지도 모른다는 게 작가의 생각인 듯하다.

 

글쓰기의 가능성이 많아지는 건 우리가 경험하는 그 순간, 경험하는 것의 의미가 부재하기 때문이다.”

 

아니 에르노는 그 시절 아니 D가 경험한 것이 과연 어떤 의미였는지 찾기 위해 2014년 글쓰기를 감행했으며 그 과정을 통해 수치심을 발견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사진 속 여자아이는 자신의 기억을 내게 물려준 낯선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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