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시 산책] 여성민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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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리뷰

[명시 산책] 여성민 <비밀>

by 브린니 2023. 7. 22.

비밀

 

 

이 정원에선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아요 이미 모든 일이 일어난 것처럼

 

내 몸의 뼈가 피리였다는 것을 나에게만 말해요

 

이국적인 습관을 갖기 위해 밤에는 뜨거운 불을 삼키고

 

구멍마다 불이 들어오면 빛이 새어나오는 몸을 이끌어 밤의 정원으로 갑니다 정원은 기이한 소리로 가득해지고 세상에 없는 슬픈 소리를 냈다는 중국 피리에 대해 생각하죠

 

숲에 혼자 서 있죠 내가 알지 못하는 얼굴의 윤곽들이 떠올라요 얼굴은 모두 축축해요

 

흐르지 않고 코발트로 있어요 내 발은 허파보다 부드러워요

 

피리의 구멍처럼 코발트 얼굴은 늘어나고

 

아름답고 따듯한 코발트를 하나씩 밟아 나는 정원을 가로지릅니다 누군가의 얼굴에 푹푹 빠졌던 발에는 향기가 남아요 달콤한 코발트 코발트에 발이 물들며

 

모르는 죽음에게 가요 정원에선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아요 모든 일이 일어났던 것처럼

 

내 얼굴에서 코발트가 끓고 있다는 것을 나에게만 말해요

 

비밀은 이토록 보잘 것이 없고

 

이리 와서 피리처럼 누워요 코발트를 휘젓고 우리 함께 진실과 살인을 준비해요

 

여성민

 

 

산책

 

이 정원에선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아요 이미 모든 일이 일어난 것처럼

첫 구절이 마지막 구절인 시들이 가끔 있다.

첫 구절을 마지막에 반복하면 끝나는.

시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단 한 줄이다.

 

정원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것은 죽음에 가깝다.

살아 있어야만 어떤 사건이라도 일어난다.

죽은 것들에겐 사건이 없다.

그러므로 죽은 것은 아무런 존재도 아니다.

 

내 몸의 뼈가 피리였다는 것을 나에게만 말해요

헤겔은 정신은 뼈다, 라고 말한 적이 있다.

양립 불가능한 것이 하나의 문장이 되는 것이 은유이다.

은유는 이전의 언어습관의 단절을 뜻한다.

뼈가 피리다.

뼈는 음악이다.

뼈가 내는 소리는 어떤 것일까.

뼈가 피리처럼 구멍이 나 통풍에 걸린 것일까.

뼈가 비어서 내는 바람 소리가 음악 같이 느껴진 것일까.

 

이국적인 습관을 갖기 위해 밤에는 뜨거운 불을 삼키고

다른 나라는 어느 나라일까.

어떤 습관이 이국적인 습관일까.

불을 먹는 것이 이국의 풍습일까.

 

구멍마다 불이 들어오면 빛이 새어나오는 몸을 이끌어 밤의 정원으로 갑니다 정원은 기이한 소리로 가득해지고 세상에 없는 슬픈 소리를 냈다는 중국 피리에 대해 생각하죠

뼈가 피리니까 구멍에서 빛이 새어나온다.

정원이 뼈 피리가 내는 소리가 울리고,

세상에 없는 슬픈 소리로 가득찬다.

 

숲에 혼자 서 있죠 내가 알지 못하는 얼굴의 윤곽들이 떠올라요 얼굴은 모두 축축해요

정원이자 숲의 한복판에 서 있으면 아마도 이러저러한 생각들이나 기억이나 사람들이 떠오를지도 모른다.

어쩌면 알지 못하지만, 낯설지만 왠지 익숙한 사람들의 얼굴이 떠오를 수도 있다.

숲의 이슬에 젖은 얼굴들, 모두 축축하리라.

 

흐르지 않고 코발트로 있어요 내 발은 허파보다 부드러워요

물기에 젖어 축축하지만 물이 떨어지거나 흘러가지 않고 코발트처럼 굳어 있다.

나는 그것을 발로 밟는다. 죽음을 건너온 존재에게 발이거나 허파이거나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모두가 부드럽다.

투명하리만치.

 

피리의 구멍처럼 코발트 얼굴은 늘어나고

자꾸만 늘어나는 얼굴들은 예전부터 알던 얼굴일까. 낯선 얼굴일까. 모든 살아 있던 혹은 지금은 죽은 채 얼굴로만 남은.

 

아름답고 따뜻한 코발트를 하나씩 밟아 나는 정원을 가로지릅니다 누군가의 얼굴에 푹푹 빠졌던 발에는 향기가 남아요 달콤한 코발트 코발트에 발이 물들며

아름답고 따뜻한 얼굴들을 밟으면 향기가 묻어나고 코발트에 발이 물든다

 

모르는 죽음에게 가요 정원에선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아요 모든 일이 일어났던 것처럼

아무리 뛰어난 학자라도 알 수 없는 것이 있다. 죽음!

더 이상 어떤 사건도 일어나지 않는 장소.

더 이상 아무것도 아닌 존재의 시간.

 

내 얼굴에서 코발트가 끓고 있다는 것을 나에게만 말해요

이제 나의 얼굴에서도 코발트가 끓고 있다.

죽음의 강 스틱스의 강물이 끓듯.

 

비밀은 이토록 보잘 것이 없고

알고 보면 비밀이란 다 별 것 아닌 경우가 많다.

 

이리 와서 피리처럼 누워요 코발트를 휘젓고 우리 함께 진실과 살인을 준비해요

피리는 코발트를 휘젓는 작대기(아무 쓸모 없는)가 되고 누워서 진실에 대해 생각하고 살인을 계획한다.

 

 

비밀이란 무엇인가?

영화 식스센스에서처럼 가장 큰 비밀은 내가 죽었다는 사실이다.

물론 진실은 좀 다를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사실이 바뀌지는 않는다.

 

숨은 진실을 찾아 정원을 어슬렁거리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정원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진실이 밝혀진다고 해서 어떤 일이 발생하거나 일어난 일이 바뀌는 것은 아니니까.

 

숨이 끊어진 뒤 천국이나 지옥까지 가려면

이 시에서처럼 정원을 가로지르거나

강을 건너거나

잠시 어딘가 머물렀다가 다시 떠날 수도 있을 것이다.

 

뼈가 구멍이 나서 사물들이 몸을 통과할 것이다.

불을 삼킬 수도 있고,

몸이 점점 해체되고,

코발트나 다른 물질로 바뀔지도 모른다.

성경에서처럼 몸이 흙으로 변할 수도 있다.

 

이 시가 죽음을 이야기하고 있는지 잘 알 수는 없지만

비밀의 정원으로 들어가는 일은 신비하고

어쩌면 죽음처럼 알 수 없는 것을 맛보는 듯한 느낌일 수도 있다.

 

가끔은 일상 너머 다른 세계(이 시에서 말하는 이국?)을 꿈꾸기도 한다.

그런 세계를 마음속에 간직하고 살고 있다면 그게 아마도 비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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