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시 산책] 진은영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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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리뷰

[명시 산책] 진은영 <아름답다>

by 브린니 2023. 9. 18.

아름답다

 

 

오늘 네가 아름답다면

죽은 여자 자라나는 머리카락 속에서 반짝이는 핀과 같고

눈먼 사람의 눈빛을 잡아끄는 그림 같고

앵두향기에 취해 안개 속을 떠들며 지나가는

모슬린 잠옷의 아이들 같고

우기의 사바나에 사는 소금기린 긴 목의 짠맛 같고

 

조금씩 녹아들며 붉은 천 넓게 적시다가

말라붙은 하얀 알갱이로

아가미의 모래 위에 뿌려진다

오늘

 

네가 아름답다면

매립지를 떠도는 녹색 안개

그 위로 솟아나는 해초냄새의 텅 빈 굴뚝같이

 

진은영

 

 

 

산책

 

사람들은 무엇을 아름답다고 느낄까?

무엇을 보고

무엇을 듣고

무엇을 경험하고

무엇을, 어떤 것을, 어떨 때, 어느 곳에서

 

사람들마다 아름답다고 느끼는 순간이 다르고

아름다움의 대상도 다를 것이다.

 

사랑을 아름답다고 할 때 그것은 매우 추상적인 동시에

지독하게 구체적이다.

 

사랑이란 그저 어떤 개념일 수도 있지만

아주 실제적인 것이니까.

 

푸른 바다를 보거나

깎아지른 절벽

한없이 펼쳐지는 모래사막

단풍이 물든 산기슭

 

이 모든 풍경들은 아름답다.

 

리어커를 끌고 가는 노인을 도와주는

사람의 마음씨도 아름답고,

아이들의 코를 훔치는 어머니도 아름답다.

 

바흐나 베토벤의 음악은 말할 수 없이 아름답고,

빈센트 반 고흐와 샤갈의 그림도 너무나 아름답다.

 

김소월의 진달래꽃,

서정주의 국화 옆에서,

김춘수의 꽃은

어쩌면 진짜 꽃보다 아름다운 시일지도 모른다.

 

물론 장미와 국화와 민들레, 프리지아, 튤립, 벚꽃, 들의 이름은 듣기만 해도 아름다움을 느낀다.

 

누구보다 사랑하는 사람을 볼 때

우리는 그(그녀)를 아름답게 바라본다.

 

아름다운 것이 없으면 우리는 어떻게 인생을 살아갈까.

 

 

오늘 네가 아름답다면

죽은 여자 자라나는 머리카락 속에서 반짝이는 핀과 같고

눈먼 사람의 눈빛을 잡아끄는 그림 같고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없을 것 같은 장면에서 아름다움을 끄집어내는 것!

그것이 시인의 특이성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시체에서도

빛이 없는 눈에서도

 

 

네가 아름답다면

매립지를 떠도는 녹색 안개

그 위로 솟아나는 해초냄새의 텅 빈 굴뚝같이

 

 

매립지를 떠도는 녹색 안개는 어쩌면 독한 가스일지도 모른다.

그 위로 솟아나는 해초냄새는 썩은 내일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이런 것들도 아름답다.

치명적이다.

 

더럽고, 불쾌하고, 냄새나는 것들 속에 숨은 아름다움.

 

(시인)는 그런 것들에게서 아름다움을 피어나게 하는 마법()인지도 모른다.

 

시가 없다면,

언어는,

우리가 뱉어내는 말들은 얼마나 허망하고 텅 빈 것이 될까.

 

말의 아름다움이 도달하는 곳,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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