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옴 웨이크필드 <사랑의 기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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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리뷰

노옴 웨이크필드 <사랑의 기술>

by 브린니 2023. 9. 23.

노옴 웨이크필드 <사랑의 기술>

 

노옴 웨이크필드의 <사랑의 기술>은 사랑이 하나님으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상기시킨다. 이를 강조하기 위해 세상적인 사랑과 하나님의 사랑을 구별하고,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이 자칫 우상 숭배와 같은 것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우리가 자기만족적인 사랑(에로스)에 빠질 때 발생하는 수많은 관계의 어려움을 설명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제시하고 있다.

 

 

 

세상적인 사랑은 내게 만족과 유익을 주는 것에 기준을 둔다.

 

아내가 언제나 남편이 원하는 일을 하고, 또 그가 원할 때마다 그것을 해준다. 아내가 남편을 행복하게 하고, 편안하게 해주는 한 아내는 남편에게서 사랑한다는 표현을 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존재인 것이다.”

 

이러한 자기만족적인 사랑은 오히려 증오를 낳을 수도 있다.

 

아내는 남편이나 자녀들이 자신이 원할 때 자신의 방식대로 행동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들을 증오하기도 한다. 즉 세상적인 사랑이란 모두 자신에게 유익을 주는 것에 집중되어 있다.”

 

사탄적인 우상 숭배의 영도 세상적인 사랑의 가면을 쓰고 있다. 실상 사람들을 자신의 이기적 욕심에 따라 이용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있다는 착각에 속고 있다.”

 

우리가 (어떤)사람을 우리 자신의 행복과 안락함을 제공하는 근원으로 여기게 되는 순간, 그를 하나님의 자리에 올려놓는 것이 된다.”

 

 

우리가 어떤 사람이나 사물 또는 생각에 대해서 나의 필요와 안락함, 행복, 권력을 채워줄 근원으로 여긴다면, 이는 우상을 경배하는 것이다.”

 

우상화한 사람이란 나의 요구를 들어주고 나에게 만족과 유익을 줄 것이라고 기대하고 믿는 사람을 뜻한다. 아내나 남편, 자식이 될 수도 있다. 때론 그 대상이 성직자가 될 수도 있다. 성직자의 경우 나의 영적인 갈급함을 그가 대신 채워주리라 기대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아니라.

 

당신이 우상화한 사람은 결코 사랑할 수 없다.”

 

우상 숭배의 근원 중 하나는 우리 안에 몰래 감추어 두었던 보이지 않는 이기심이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것과 하나님 안에서 살아가는 것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우상 숭배의 영은 당신이 지식을 습득하는 가운데 자연스레 생명 나무의 열매를 먹고 있다고 믿게 만든다. 하지만 실상 당신이 먹게 되는 것은, 선악의 지식을 알게 하는 나무의 먹음직스러운 부분에 불과하다.”

 

아담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먹은 것은 그것이 더 지혜롭게 할만하다고 믿어서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명령보다 더 낫다고 여겨서이다. 인간의 이기심은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추구한다. 그것이 자신에게 만족을 주리라고 확신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결과가 어떠하리라는 것을 알지는 못한다.

 

라캉은 사랑이란 상대를 나의 기쁨의 근원으로 삼는 것이라고 말했다.

웨이크필드는 바로 이것을 우상 숭배라고 말한다.

 

라캉은 에로스의 본질을 말한 것이지만 웨이크필드는 에로스를 넘어선 사랑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다. 웨이크필드의 사랑이란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된 사랑, 즉 아가페를 지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웨이크필드는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는 이유가 그녀가 나를 기쁘게 해주기를 기대하면서 아끼고 사랑하는 것일 수 있다고 말한다. 그 아내가 남편의 남성다움을 돋보이게 해주는 여자이며 주위 여자들 중에 가장 예쁘고 환상적인 내조자이며 영적으로도 괜찮은 사람이라는 인상을 줄 수 있다면 금상첨화이다. 그 모든 생각의 뿌리는 우상 숭배(혹은 이기심)라는 것이다.

 

남편은 아내가 자신을 위해 이렇게저렇게 해주길 원하고, 아내도 남편이나 자식이 자신을 위해 살기를 원한다.

세상적인 사랑은 철저하게 자기만족을 위한 사랑이다.

 

사람들은 화를 내고 성질을 부리고 남의 탓을 하고 남의 이름을 욕되게 하고 거짓말로 상대를 저주하고 깍아내린다. 그것은 바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다. 그들은 이런 식으로 자신이 원하는 때에, 자신이 원하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죄 가운데 있는 인간은 자기 자신의 행복과 안락을 얻기 위해 환경과 관계를 스스로 통제하려고 애쓰기 마련이다.”

 

우리가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통해 필요를 얻고자 하는 순간, 우리가 바라는 사람과 사물, 또는 환경에 우리의 권세를 넘겨줌으로써 비참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통제하고 지배하기를 원한다. 심지어 남의 말을 잘 들어주는 것도 그렇게 하는 것이 자신에게 이익이 되기 때문이다. 역으로 다른 사람을 자기 통제 아래 두기 위한 기술인 셈이다.

 

태초에 아담은 만물을 다스리라는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바람에 사탄에게 자신의 권위를 내어주게 되었다. 그 뒤 사탄이 이 세상을 지배하고 되었고, 인간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위해 우상 숭배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인 것이다.

 

우상이란 자신이 원하는 것을 그 대상으로부터 얻으려고 할 때 그 대상이 차지한 자리 그 자체인 것이다.

 

내가 어떤 여자(혹은 남자)에게 사랑받으려고 한다면 그 여자나 남자가 우상의 지위에 앉게 되고 나는 그 여자나 남자를 숭배하는 위치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흔히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더 약자다라는 말을 듣곤 한다. 내가 그 사람의 사랑을 갈구하기에 나는 우상 숭배자가 되고, 그 사람은 나의 아이돌(우상)이 되기 때문이다.

 

 

만약 내가, 내가 원하는 것을 하나님으로부터 얻어내려고 애쓴다고 하자. 그렇다면 나는 하나님을 우상으로 섬기는 것이 된다. 하나님으로부터 사랑받고자 하는, 어쩌면 아주 영적이고 거룩한 열망마저도 우상 숭배가 될 수 있다. 하나님이 날 사랑한다면 나는 아주 영적이 사람이라고 스스로 인정하게 될 뿐만 아니라 곁에 있는 사람들로부터도 칭송받게 될 것이 때문이다. 거기에 목적이 있다면 나는 분명 하나님을 우상처럼 섬기는 것이다. 하나님도 우상이 될 수 있다니 얼마나 아이러니한가!

 

우상 숭배의 영이 미치는 영향은 한 인간이 다른 사람들을 조종하려고 들 때 도리어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잃어버리게 한다는 것이다.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그 사람을 조종하는 순간 그 사람을 있는 그대로 사랑할 수 없다. 그 사람이 내가 원하는 이상적인 인물로 변해야만 나의 사랑은 유지될 수 있다.

 

 

기독교 신자들은 인간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산다고 교회에서 배운다. 그러나 하나님을 위해 무엇을 하려고 들 때 오히려 실망만 하게 될 수도 있다. 영적인 일을 하려고 했을 때 사탄이 틈타는 경험을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하나님을 위해 무언가를 하겠다는 생각 자체가 사탄으로부터 왔을 가능성이 높다. 하나님이 우상이 되기 때문이다.

 

오히려 우리가 무엇인가 해야겠다고 욕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하실 수 있도록 자리를 내어드리는 것이 더 바람직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행하실 일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듯 하나님이 우리를 도구로 쓰셔서 뭔가 큰일을 행하시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행하실 일은 우리의 인격을 변화시켜서 우리가 하나님의 선한 백성이 되도록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거룩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를 채우는 도구가 아닐뿐더러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하는 데 도구가 되기를 원하시지도 않는다. 하나님은 우리를 도구로 쓰는 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인격으로 대하신다.

 

하나님은 나를 구원하셔서 나로 하여금 하나님의 선한 백성으로 살아가도록 이끄신다. 그 가운데, 그 과정 속에서, 혹은 그 결과로 선한 일들이 발생하고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일 뿐이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 하나님의 도구가 되겠노라고 다짐을 한다. 이것 역시 우리가 우상 숭배의 영으로부터 이끌린 욕망일 수 있다. 무엇인가 큰 업적을 이루려는 것은 인간의 아주 기본적인 욕망이며 이것이 사탄으로부터 오는 유혹이 아닌지 늘 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동시에 사탄은 우리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속에 있는 이기심이며 스스로 우상 숭배에 빠지는 마음이라고도 할 수 있다.

 

 

많은 이들에게 있어 자아가 행하는 모든 행위가 선에 대한 하나님의 기준에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은 힘겨운 일이다.”

 

다른 사람을 진심으로 사랑하기 원한다면, 먼저 하나님 대신 다른 것을 바라보게 하는 자기만족과 자기 방종, 자기중심, 자기 편의 등과 같은 자아의 모든 죄악들을 경계해야 한다.”

 

우리 자신을 비우고, 우리의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충만함으로 행하면 우리도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낼 수 있다.”

 

그러나 당신이 어떤 결핍감으로(그 결핍을 채우기 위해) 상대를 사랑하려고 덤빈다면 그것은 언제든지 자신을 위하여 우상을 만들 수 있는 만반의 준비를 하는 것과 같다.

 

인간이란 다른 사람들을 영원히 충족시키기에는 너무도 무능력한 피조물에 불과하다. 인간은 신이 될 수 없고, 필요를 채워주는 근원도 될 수 없다.”

 

우상은 나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좋은 것으로 보일 때가 많다. 예를 들어 어떤 주부가 가족과의 따뜻한 관계를 우상으로 숭배하고 있을 수도 있고,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아름답게 하고자 하는 것도 우상이 될 수 있다.

 

사람들 자체가 우상이 아니지만 사람들과의 관계가 어느 특정한 느낌과 모습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생각이 곧 우상인 것이다.”

 

우리 안에는 주변의 사람들을 경배하고 우상화하는 일이 가끔 있다. 이스라엘 민족이 모세를 우상으로 여겼고, 삼손이 데릴라를, 사울이 다윗을 그리고 다윗이 밧세바를 그렇게 바라보았다.”

 

우리는 성직자를 우상화하는 경향이 있다. 그 목사님에게 나의 영적인 모든 것을 맡기고 그를 의지한다. 그러나 성직자는 예수님이 아니다. 어느 철학자는 사람이 하나님께로 직접, 바로 갈 수 있는데 성직자를 통해서 가려고 한다고 비판한 적이 있다.

 

성직자는 자신이 하나님을 경험하고, 공부하고 깨달은 것을 가르칠 뿐이다. 성직자는 우주보다 크신 하나님의 지극히 작은 일부를 경험했을 뿐이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 하나님을 만나는 경험을 해야 하며 하나님을 궁구하면서 자신이 직접 깨닫는 바를 통해 하나님을 알고, 믿어야 하는 것이다.

 

 

우상 숭배의 영은 인간을 유혹하여 피조물을 통해 행복을 기대하게 한다. 당신과 관계된 모든 사람들이 우상 숭배의 영으로 조각될 수 있는 대상인 것이다.”

 

당신의 인생에서 가장 선명하게 새겨 가는 대상은 누구인가? 그게 바로 당신 자신이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는가?”

 

웨이크필드는 내가 만든 우상이 바로 나일지도 모른다고 지적한다. 내가 나를 우상으로 만들고 나를 찬양하고 나를 경배한다?

 

자신을 향해 비난을 퍼붓는 양심의 소리를 무마시키기 위해 어느 정도 괜찮아 보이게 행동하면서, 하나님 앞에 스스로가 의로운 사람으로 보여지기를 바란 적은 없는가?”

 

그리스 신화에 나르시스는 자신을 사랑하고 자신을 위해 죽는다. 그는 자기의 우상을 결코 포기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 우상이 바로 자기 자신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언제나 하나님을 생각하기에 자기 자신을 숭배하면서도 하나님 눈치를 본다. 그래서 하나님에게 잘 보이려고 자신을 꾸민다. 자기 자신이라는 우상을 하나님께 좋은 것으로 보이도록 치장하는 것이다. 정말 아이러니일 수 없다.

 

우리는 어린 시절부터 사람들과 하나님 그리고 자신이 기대하는 바에 따라 스스로를 채울 수 있다고 믿으며 자신을 깎고 만들어 조각했다. 우리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착한 아이가 되라는 부모의 기대의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인간에게는 본성적으로 모든 일을 자기 스스로 해내려는 욕심이 있다. 자신이 섬기는 우상으로부터 칭찬을 받아야 한다는 필요를 느끼기 때문이다.”

 

 

구원의 경험을 한 신자들의 경우 완전히 우상 숭배의 영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롭게 되는 것은 아니다. 다만 하나님께 자기 속의 우상, 어쩌면 자기 자신을 내어놓고 지속적으로 회개할 수 있고, 자기 자신으로서 하나님과 대면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 예전과 달라진 것이다.

 

위선자처럼 자신을 숨긴 채 하나님 보시기에 좋아 보일 만한 것을 내놓는 것이 아니라 골방에서 발가벗은 채 하나님과 대면해도 부끄러워서 숨지 않는 새로운 아담이 되었다는 것이다.

 

에덴에서 아담은 죄를 지은 뒤 벌거벗은 자신의 모습을 숨겼지만 현재 우리는 구원받은 후에도 죄를 지을지언정 그것 때문에 뒤로 숨을 필요가 없다. 내 죄는 과거에도 현재도 미래에도 십자가에 못박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속적으로 회개하지만 예수를 믿지 않을 때와는 다른 것이다. 우리는 더 이상 죄를 좋아하지도 죄를 욕망하지도 죄를 부끄러워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자신의 선하지 못함을 늘 애통하면서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시는 긍휼의 마음으로 스스로를 돌아본다. 즉 선한 사람으로 보이려고 애쓰지도 않고 선한 사람이라고 착각하지도 않고, 스스로를 속이지 않고, 스스로 속지도 않는다.

 

이때 비로소 우리는 다른 사람 앞에서도 거리낌 없이 자신을 드러내고 이웃들과 사랑의 관계를 맺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어느 누구에게도 섬김을 박고 사랑을 받거나 얻어 낼 것을 결코 기대하지 않으셨다.”

 

예수께서 세상적 사랑으로 나를 사랑하지 않으셔서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다. 나는 그분께 아무런 쓸모도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나는 내 자신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순전한 사랑을 받는 사람이고, 그 사랑을 흘려보내는 통로가 된다는 중요성을 깨닫고 있다.”

 

 

웨이크필드의 <사랑의 기술>은 우리가 얼마나 잘못된 사랑을 하고 있는지 깨우쳐준다.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할 때 그것은 대체로 내가 보석처럼 여기는 것을 그 사람이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될 때 우리의 사랑은 곧바로 식어버린다.

 

결혼 전에는 그 사람의 이런 점 저런 점이 좋아 보였는데 결혼 뒤에는 그런 것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고 실망한다.

그 사람의 이런저런 점이 내게 기쁨을 주었는데 이제는 그것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행복하지 않고, 불행하기 짝이 없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이것이 인간적인, 세상적 사랑의 실체인 것이다.

 

아무것도 없는데 사랑할 수는 없을까.

 

예수 그리스도가 나를 사랑하시는 데 이유가 있었을까.

죄뿐인 나를 사랑하시면서 나에게서 좋아할 만한 것을 발견하셨을까.

 

나는 예수님께 잘 보이려고 교회 잘 나가고, 성경 읽고, 찬송 부르고, 나름대로 착하게 살려고 얼마나 애를 썼던가.

 

예수님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는데 과연 그렇게 사랑하는 것은 도대체 어떤 것일까.

 

예수님의 사랑은 대속의 사랑이었다. 다른 사람의 죄를 대신 짊어지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나도 다른 사람의 죄를 대신 지는 사랑을 해야 한다.

 

얼마나 어려운가.

 

나는 조금이라도 억울한 일을 당하면 분노한다.

내가 잘못한 것이 아니라고 항변한다.

남편이 아내를 고소하고, 아내가 남편을 정죄한다.

 

이것이 우리의 실체이다.

 

예수님은 누가 나에게 죄를 지으면 70번씩 7번 용서하라고 하셨다.

심지어 원수도 사랑하라고 하셨다.

 

그런 사랑은 도대체 뭘까.

 

 

십자가.

십자가의 사랑.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을 배워야 한다.

예수님이 왜 십자가를 지셨는지 깊이 알아야 한다.

 

다른 사람의 죄를 대신 갚기 위해서 내가 희생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선한 사마리아인은 죽을 위기에 처한 유대인(원수일 수도 있는)을 치료하고 값을 대신 지불했다. 그를 구하다가 자신이 죽을 수도 있었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데에는 기쁨이나 행복이 따라오기보다는 희생과 위험이 뒤따라 올 수 있다.

 

그 사람이 내 친구라서, 그 사람이 내게 유익이 되기 때문에 등 갖가지 이유가 있는 사랑은 인간적이고 세상적인 사랑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사랑은 이유도 조건도 없을 뿐만 아니라 죄인의 죄를 대신 지는 사랑이다.

 

누군가 나에게 죄를 지었을 때 그것을 정죄하지 않고, 용서하는 것을 넘어서 그 사람의 죄를 내가 대신 뒤집어쓰는 것이 예수님의 사랑이다.

 

이런 사랑의 이름이 바로 아가페이다.

 

 

웨이크필드의 <사랑의 기술>은 예수님의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자기 속에 있는 거짓 사랑의 실체를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물론 이것은 귀한 수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좀 심리학적인 냄새가 난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사랑을 제대로 이해하고 그것은 나의 것으로 여기는 일이다.

 

구원이라는 것은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를 나도 지는 것이다. 그때 구원이 내게 임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사랑이 내게 임할 때 나도 다른 사람을 위해 죽을 수 있는 것, 그것이 진정한 구원의 의미일 것이다.

 

순교란 예수님을 전하다가 적대 세력에게 죽임을 당하는 일일 수도 있지만 다른 사람을 사랑하기 위해 나의 이기심을 죽이는 것일 수도 있다. 이를 내면적인 순교라고 부를 수도 있겠다.

 

나의 자기만족과 이기심, 욕망 등을 죽이고, 예수님의 사랑으로 다른 사람을 위해 희생하는 것이야말로 순교 못지않은 숭고한 행위일 것이다.

 

작은 소자에게 물 한 잔을 건네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사랑에 어떤 기술이 필요하다면 작은 것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지진과 홍수, 전쟁 등으로 고통당하는 이웃에게 후원하는 것도 바람직하다.

 

그러나 무엇보다 내게 고통을 주는 사람들을 미워하지 않고, 그를 위해 기도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멀리 있는, 나와 상관없는 사람에게 구호 물품을 보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가까이에서 내게 어려움을 주는 사람들을 축복하고 기도하는 것이 더 어려울 수 있다.

 

가장 가까이에서 나와 원수 맺은 사람(내게 고통을 주는 사람)을 위해 죽는 일(내면적인 순교)이 예수님의 사랑을 행하는 첫걸음일 것이다.

 

그렇다면 그렇게 어려운? 사랑은 어떻게 가능할까.

 

 

사랑의 기초는 믿음에 있다.

 

믿음이란 단지 예수님이 내 죄를 위해 죽으셨고, 나는 예수님의 보혈의 공로로 구원받았다는 교리를 지식적으로 믿는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라디아서 2:20)

 

내가 예수님과 함께 죽었고, 이제부터는 그리스도로 산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좀더 래디컬하게 말하면 내가 예수로 살고 있다는 것, 그것을 믿는다는 것이다.

 

나는 예수다.

그러므로 나는 예수로 산다.

 

이것이 믿음이다. 믿음이 살아 있다는 것은 이 뜻이다.

 

내가 예수로 살 때, 나는 예수를 믿는 자로 사는 것이다.

예수가 나를 위해 죽었듯이 나도 예수처럼 다른 사람을 위해 죽는다.

 

이것이 믿음으로 사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기독교 신자들은 나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고, 믿고, 기도한다.

 

과연 그럴까.

 

그렇다면 먼저 내 옆에 있는, 나를 미워하는 자를 사랑해보라.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자신의 믿음이 증거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예수를 깊이 알아야 한다.

 

진리를 좇는 구도자로서 예수를 찾고 찾아서 만나야 한다.

내 안에 계신 예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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