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유경 <여섯 걸음>
본문 바로가기
독서 리뷰

원유경 <여섯 걸음>

by 브린니 2023. 10. 28.

원유경 <여섯 걸음>

 

 

 

기독교란 무엇인가

 

학생들이 공부를 하거나 직장에서 일을 하거나 스포츠 경기를 할 때 가장 중요한 덕목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기본에 충실하는 것이다. 기본기가 중요하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으로서 기본은 무엇일까. 그것은 기독교 신자로서 기독교의 본질을 잘 이해하고 그리스도인으로서 정체성을 가지고 하나님의 선한 백성으로서 자신의 삶을 충실하게 살아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기독교의 본질은 무엇일까. 기독교는 무엇을 믿는 종교이며 그리스도인의 삶은 어떠해야 하는가.

 

기독교는 무엇을 믿는가.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십자가의 고난과 죽으심을 통한 대속과 구원을 믿는 종교이다. 기독교라는 이름은 그리스도교의 한자어 번역이다.  그리스도교, 예수교라고 부르는 것이 보다 더 확실한 어감이 든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십자가의 대속, 그리고 부활을 믿는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구원받고, 거듭나 새로운 삶을 산다

 

그런데 많은 신자들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고백한다. 그렇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

하지만 하나님은 신을 대표하는 이름이다.

유대교의 하나님은 여호와, 이슬람교는 알라, 불교는 부처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것은 신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창조주로서 우리는 창조하고 구원하고 심판하시는 분이다.

 

기독교의 하나님은 성육신하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모든 것을 이루신다. 하나님은 인간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아들 예수의 십자가 죽음으로 극명하게 표현하신다.

인류(모든 죄인)는 그 아들 예수를 믿음으로써 구원을 받고 새롭게 거듭나 하나님의 선한 백성으로 선한 삶을 살게 되었다.

 

 

유대교는 우리 기독교와 같이 하나님을 믿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자로 인정하지 않는다.

이슬람교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는 인정하지만 지도자나 선생의 개념으로 존경한다.

역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중심으로 B.CA.D로 나뉜다.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으로 새롭게 탄생된 종교이다.

물론 유대교를 뿌리로 두고 있지만 유대교(구약)의 약속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십자가 죽으심으로 완성되었다.

구약의 율법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완성되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새 계명은 서로 사랑하라는 것으로 유대교(구약)의 모든 율법을 완성하고 그 위에 사랑의 법을 세웠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율법의 인과율을 원수도 사랑하고 형제를 7번씩 70번 용서하고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에게 나눠주고, 오직 서로 사랑하는 사랑의 법으로 하나님 나라를 통치한다.  

 

유대교(구약)와 기독교의 차이는 제사와 예배라는 종교의식에도 큰 차이를 보인다.

구약의 제사는 창조주를 기억하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기억하고, 자신의 죄를 참회하면서 주로 짐승의 피를 재물로 드리는 데 중점을 둔다.  향후 그리스도가 단 한 번의 제사(십자가 죽음)으로 반복적인 제사를 끝낼 것을 상징하고 예표한다.

 

그러나 기독교의 예배는 구약의 제사가 더 이상 필요없음을, 제사가 끝났음을 실제로 확증한다(히브리서9).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성소의 휘장이 찢어졌다. 예수의 십자가 죽으심을 상징하던 짐승의 피의 제사는 효력을 다했다. 이제 모든 예배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을 기억하고, 그리스도의 사랑과 은혜를 성도들이 나누는 것이 된다.

 

모든 예배는 성만찬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의 피와 살을 먹고 마신다. 그리스도를 먹고, 마시고, 나누는 것이다. 예배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리스도를 나누는 성도들의 교제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는 사람들은 자기 속에 그리스도를 모신 사람들이다. 그리스도를 마음에 영접하고 일상적인 삶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먹고 마시며 교통한다. 루터가 말했듯이 자신의 내면에 예수 그리스도가 계신 성도들은 그 자체로 신이라고 할 수 있다.

 

로버트 멍어의 <내 마음 그리스도의 집>이란 작은 책은 이를 감동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거듭난 사람들은 단지 영적 생활을 더 잘하는 성도들이 아니다.

우리는 수련회나 부흥회에서 은혜를 받으면, 그 뒤부터 늘 교회에 살다시피하고, 예배에 목숨을 걸고, 성경 읽고, 기도하고, 찬양하고, 전도와 선교하는 데 열심을 내는 것으로 알고 있고, 실제로 그렇게 한다

하지만 우리는 황홀한 변화산에서 내려와야 한다. 우리는 일상적 삶을 사는 세상으로 내려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야 한다. 

거듭난 자의 삶이란 단지 영적 생활에 열심을 내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거듭난 자는 즉 예수를 마음에 영접한 성도는 먹고, 마시고, 자고, 일하고, 일상적인 모든 삶의 부분에서 변화가 일어나 새로운 삶을 사는 사람들이다.

 

특히 자기 자신에 대한 생각이 변한다.

바울이 갈라디아서 220절에서 말했듯이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살고 계시므로 나는 예전의 나와 완전히 다르고 예수로 산다는 것을 믿는다.

즉 나는 예수이다. 성도를 작은 예수라고 부르기도 한다.

 

내가 예수가 되어 예수로 산다는 것이 그리스도의 정체성이다.

그러므로 내 삶은 예전과 완전히 변화된다.

전인적인 변화, 나의 인격과 성품과 감정 등 모든 것이 변한다는 것이다.

 

나는 이전의 내가 결코 아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시기에 우리는 성령의 사람이 된다.

 

이것이 거듭남의 본질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내 안에 계시며 그러므로 내가 예수 그리스도로서 산다는 것이다.

성령이 내게 임하면 내가 성령의 사람으로 살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기독교 신자들을 성도라고 부르는 것이다

 

성령의 사람은 단지 영적 생활에 충실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 전체가 하나님을 사랑을,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과 은혜를 세상에 드러내는 데 사용된다.

직장에서, 학교에서, 가정에서 모든 곳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이웃과 나눈다.

 

데이비드 짐머만의 <뜻밖의 손님>은 예수님이 내 마음에 들어우신 뒤의 변화를 감동적으로 그리고 있다.

 

 

 

예배는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 자체이며 그 삶을 이웃과 나누는 성도들의 교제이다.

초대교회의 예배는 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그리스도인의 예배는 짐승의 재물이나 거창한 의식이 없어도 그리스도의 사랑과 은혜에 감사하고 그리스도의 피와 살을 기념하면서 그리스도를 기억하고 그리스도의 은혜를 이웃과 나누는 것이다.

 

제사가 하나님과의 수직 관계에 집중했다면 예배는 그리스도를 통한 성도들의 교제라는 수평적 관계를 보여준다.

성도들 각자 자기 안에 계신 예수를 서로 나누는 데 예배의 목적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와같이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기독교의 본질을 이해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우리의 신앙의 기초를 세워야 한다.

 

이제 지나치게 구약의 성경구절을 금과옥조처럼 따르거나, 지나치게 거룩하고 은혜로운 예배를 드리려고 애쓰거나 하나님에게 무엇을(자신을) 드리려고 애쓸 필요가 없다.

이미 예수 그리스도가 내 안에 계시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정체성으로 삼고 하나님의 선한 백성으로 사는 것이 중요하다.

 

나의 일상적인 삶, 밑바닥에서부터 변화가 일어나는지 주목하고, 이웃과의 관계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누며 살고 있는지 살펴야 한다.

그것이 무엇을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라는 인생의 목적을 위해 사는 삶이 될 것이다.

 

예전에 내 이웃을 내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율법이 지키기 어려운 족쇄였다면

이제는 내 안에 그리스도가 계시므로 내 자신이 그리스도가 되어 그리스도의 사랑을 이웃과 나눌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어렵고 불가능한 일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이 되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랑을 이웃과 나누는 일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삶이 된다.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은 계명이 아니라 축복이며 우리의 삶 그 자체가 되는 것이다.

 

 

지역 도서관에 들렀다가 신간 코너에서 우연히 책 한 권을 발견했다. <여섯 걸음> 책 제목이 특이해서 그냥 들고나왔다. (물론 대출대에서 절차를 거치고 빌려왔다.) 그 책이 신앙서적인 줄도 몰랐고, 저자나 내용에 대해서도 전혀 몰랐다. 어쩌면 누군가의 말처럼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분명한 것은 그 책이 기독교 서적이라는 걸 아는 순간 더욱이 최근 가장 핫한목사님의 글이라는데 주목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최근 우리 한국교회가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지, 십 년 넘게 '진짜 교회'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는데 젊은 목회자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저자는 팬데믹 시대에 교회 개척을 해서 3년 만에 2,000명의 신도를 모은 부흥의 첨단에 서 있는 목사님이다. 요즘처럼 교회 개척이 어려운 시기에 더욱이 팬데믹 시대, 이런 부흥을 이루었다는 것은 가히 놀랄 만한 일이다. 이 책에  어떤 내용이 들어 있을지 궁금했다. 

 

 

<여섯 걸음> 책 내용 요약

 

나의 어린 시절은 사랑과 두려움, 삶과 죽음이 늘 한 쌍이었다.”

 

저자인 원유경 목사님의 어머니는 발작성 빈맥과 부정맥으로 고통당하셨고, 어린 소녀의 마음에 큰 두려움으로 다가왔다. 그래서 자신의 삶은 비극이었다고 회상한다.

 

고등학교 2학년 때 목사님은 경배와 찬양수련회에 참석하게 되고, “그곳에서 하나님을 만났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한 뒤 혼자서 3년 동안 골방에서 예배를 드렸다.

 

나는 인생의 목적을 예배에서 발견했다.”

그 뒤 목사님은 오로지 예배자로서의 삶을 선택하고 그 길만 걸었다.

 

어느 날 새벽, 혼자 찬양하고 말씀을 읽는데 하나님은 사무엘상 1623절을 주셨다.

 

하나님께서 부리시는 악령이 사울에게 이를 때에 다윗이 수금을 들고 와서 손으로 탄즉 사울이 상쾌하여 낫고 악령이 그에게서 떠나더라

 

예배자가 되겠다고 하자 주변에서 반대 아닌 반대, 시비가 이어졌다. 여성으로서 예배자로 선다는 것이 어려웠다. 그 뒤 힐송의 음악과 사역이 국내에도 영향을 끼쳐 예배자로서의 길이 열리게 된다.

 

힐송 찬양 컨퍼러스에 참여한 목사님은 이들이 전심으로 예배했다면 전 특심으로 예배하길 원합니.”하고 고백한다.

 

그 뒤 온누리교회 대학부에서 예배인도자가 되어 사역한다. 전임사역자가 예배가 직업이 되어 오히려 충요로운 예배를 드리지 못할까봐 두려움이 생겼다. 그때 온누리교회 담임 하용조 목사님으로부터 격려를 받고 위로를 얻는다. 하목사님은 원유경 목사님에게 젊은 세대를 부탁한다고 말씀하셨다.

 

목사님은 예배인도자가 소망이었을 뿐 설교자로서의 소명은 느끼지 못했는데 하나님이 설교자로 세우실 것을 말씀하셨다.

 

예술 교육에도 적기가 있듯이 영혼의 적기 교육도 필요한데 적어도 청년의 시기에 완성되어야 한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 달려 있다는 믿음.”

이것이 본질이며 청년의 때에 인생을 통틀어 추구해야 할 한 가지 가치 결정을 해야 한다.

 

그 뒤 무슬림 지역 선교를 나가서 기적처럼 1명의 결신자를 얻어 세례를 베푼다. 그 과정에서 발작성 빈맥이 발생해 죽을 고비를 넘기며 세례를 집례한다.

 

예배 인도자가 아닌 공동체 전체 담당자(설교자)가 되었지만 울고 있는 목사님에게 동료가 물었다.

예배 인도하는 게 그렇게 좋아요?”

, 말씀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거지만 예배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드릴 수 있는 유일한 거니까요.”

 

예배 안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그분의 임재를 모시는 일은 내게 이런 의미였다.”

 

목사님이 맡은 대학부 공동체는 모두 부흥을 이루었다. 하늘공동체는 1년 만에 250명에서 450명으로 SNS 청년부는 76명에서 2,500명 이상이 모이게 되었다.

 

SNS 청년부를 맡았을 때는 기도가 사역의 실체, 기도만이 모든 사역의 엔진임을 깨닫고 중보기도 모임을 통해 영적 각성을 이룬다.

 

기도와 함께 겸손이 중요하다.

낮은 곳으로 도약하는 겸손과 삶의 저항을 이용해 더 높이 비상하는 믿음의 능력

성취의 다음 행보가 또 다른 성취가 될 수 있도록 은혜를 지속할 유일한 힘은 겸손이다. 엎드린 사람은 넘어지지 않는다. 또한 삶에 불어오는 맞바람을 적절히 이용할 대 우리의 영혼은 더 높고 멀리 비상할 수 있다.”

 

목사님에게 개인적인 테러가 일어나기도 했다. 이를 이기기 위해 목사님은 마음이 하늘을 향하도록, 땅을 보지 않도록다짐한다.

 

뇌신경에 문제가 생겨 얼굴 찡그림 현상이 심해졌지만 수술 없이 이겨내기도 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이 어니 있느냐이다. 그 뜻으로 인해 우리는 선택의 순간에 모든 불가능을 비웃을 수 있다.”

“7년간 SNS 청년부를 섬기며 일관되게 지텨온 사역의 초점은 오직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를 드리는 것단 한 명도 은혜 없이 돌아가지 않게 하는 데 전부를 거는 것이었다.”

 

크리스천 인재들의 예술적, 문화적 능력이 더 이상 교회와 예배를 위해 쓰임받지 못하고 한낱 먹고사는 일과 세상 문화에만 기여하도록 구조화되고 있었다. 하나님이 주신 달란트를 하나님 나라에 헌신하지 않고, 생업과 세상의 성공을 위해서만 쓰는 게 문제였다.”

 

교회에 인재를 세우는 일이 중요했으며 교회가 세상을 선도할 만한 문화적 역량을 갖추기 위해서는 세상에 인재를 빼앗기지 말아야 했다.”

 

2019년 가을 목사님의 동생은 지도 밖을 행군하라.”는 쪽지를 건넸다.

 

매주 수련회나 부흥회 이상의 뜨거움으로 예배를 드리면서도, 석연찮음을 느끼는 내게 동생이 말한다.

믿음이 청년들의 삶에서 공회전되고 있다고 느끼는 거지?”

더없이 좋은 예배만큼 삶이 구체적으로 변화되고 있는가?

 

이 때문에 청년 개개인과의 소통을 늘리며 신앙의 구체적인 변화가 정착할 수 있도록 힘썼다.

 

팬데믹으로 인해 성전에서 예배드리지 못하게 되었고, 예배가 성도의 일상에 찾아가야 했다.

 

목사님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강하게 느끼며 교회 개척을 시작한다.

 

제도화된 페러다임과 프레임, 매뉴얼, 기존 질서나 관료적이고 굳어진 관념으로 예배를 대하던 태도에 신물이 나있었으므로 오로지 본질만을 추구하는 교회를 시작하려고 했다.

 

살아 있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과 살아있는 관계를 추구하면 된다. 본질은 사랑이다. 핵심은 사랑이다. 정작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을 제외하고 예배와 신앙을 논하지 않길 바란다.”

 

하나님을 향한 갈망과 목마름은 목사님을 예배로 이끌었고, 팬데믹 시대에 교회 개척으로 이끌었으며 그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놀라운 부흥으로 나타났다.

 

목사님은 개척 후 3년 만에 성도 3,000명이라는 놀라운 부흥을 이루었다.

 

<여섯 걸음>의 전반부는 목사님의 간증으로, 2부는 다윗을 주제로한 몇 편의 메시지(설교)로 채워져 있다.

 

 

<여섯 걸음>을 읽는 내내 어디서 많이 들었던 이야기가 계속 나와서 뭐지?’ 하고 저자의 약력도 살피고, 인터넷도 뒤져 보았다. 저자의 글에는 예전에 어느 선교단체에서 많이 들었던 주장이 한가득 들어 있었다. 그 선교단체는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신앙의 본질로 여기며 다윗의 장막의 찬양과 경배를 예배의 모델로 삼고, 매일 24시간 찬양과 기도 모임을 갖고 있다. 주일 예배 시간은 거의 2시간 이상이며 각종 컨퍼런스와 집회를 열고 있다.

 

그래서 먼저 저자에게 묻고 싶은 것이 생겼다.

 

1. <여섯 걸음>에는 신약은 없고, 구약뿐인가?

구약은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고 있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완성되었는데 왜 우리가 구약을 신앙의 모본으로 삼아야 하는가?

 

2. 왜 다윗의 제사가 우리 예배의 모델이어야 하는가?

구약의 제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단 한번의 죽으심으로 완성되었고, 더 이상 짐승의 피로 드리는 제사는 종말을 고했는데  아직도  다윗의 제사가 우리 예배의 본보기가 되어야 하는가?

 

3.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갈망은 왜 예배로만 표현되어야 하는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란 어떤 것인가?

 

4. 기독교 신자로서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다른 무엇이 더 필요한가?

 

5. 하나님 나라와 세상은 구별되는가

하나님나라를 위해 일하는 것과 세상일은 어떻게 구별되는가.

왜 세상과 하나님 나라를 구별하는가?

 

6.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곧 이웃을 사랑하는 것인데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예배뿐인가

   예배는 경건하게 드리지만 거듭나지 못한 일상적 삶은 어떻게 할 것인가? 

 

7. 신앙의 본질은 무엇인가?

사랑이 본질이라면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본질인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는 것(아가페)이 핵심인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기독교의 본질이 아닌가?

 

 

<여섯 걸음>을 읽고 질문하고 대답하기

 

저자가 책의 제목을 <여섯 걸음>이라고 붙인 이유는 다윗에 빼앗겼던 법궤를 되찾아 예루살렘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여섯 걸음을 간 뒤 한 번씩 제사를 드렸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서 교회 이름도 <포드 처치>라고 지었다고 한다. Parade Of David. 다윗의 행렬이라는 뜻이다. 이것은 다윗이 얼마나 하나님을 갈망했으며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법궤를 귀하게 여겼는지를 보여주는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너무나 은혜로운 장면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과연 2023년을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다윗의 제사를 예배의 모델로 삼아야 할 이유가 있을까.

 

이 책은 사도행전의 말씀을 근거로 삼는 듯하다.

 

이 후에 내가 돌아와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며 또 그 허물어진 것을 다시 지어 일으키리니(사도행전 15:16)

 

이 말씀은 예루살렘 교회의 수장인 야고보가 아모스 선지자의 말씀을 인용한 것이다.

 

그 날에 내가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일으키고 그것들의 틈을 막으며 그 허물어진 것을 일으켜서 옛적과 같이 세우고(아모스 9:11)

 

야고보는 이방인 선교를 논의하는 예루살렘 교회 회의장에서 아모스 선지자의 말씀을 인용하며 이방인도 교회의 일원이며 그들에게 유대 율법을 강요하지 말라고 권한다. 야고보는 왜 아모스 말씀을 인용했을까.

 

다윗의 무너진 장막은 다윗이 법궤를 둔 장막이며 다윗의 왕권을 상징할 수도 있다. 다윗이 장막에서 늘 제사가 드려졌으니 예배, 찬양과 경배를 떠올릴 수도 있을 것이다.

 

당시 유대인은 선택받은 백성이었고, 이방인들은 저주받은 백성이었다. 당시 유대인들은 예수를 믿게 된 후에도 유대 율법(주로 할례)을 준수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방인들에게도 율법을 강요하는 일이 자주 발생했다. 이방인들에게 율법을 지키게 하는 것이 옳은지 논하게 된 것이다. 베드로는 성령이 그들에게도 임했으며 하나님께서는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받게 하신다고 증언한다. 바울과 바나바도 이방인들에게 성령의 표적이 나타남을 증언한다.

 

그러고나서 야고보가 이 말씀을 인용해서 말한다. 아마도 야고보는 허물어진 다윗 왕국을 다시 세우고 퇴락한 것을 다시 지어낸다는 아모스의 예언을 유대주의의 배타적 세계관이 무너지고 메시아에 의해 재건된 세계관으로 전환됨을 강조하기 위해 인용(페트라주석)했는지도 모른다. 또한 아모스의 예언이 전 세계에 복음이 증거된 후에 성취되어,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가 주님을 알게 된다는 것과 이방인이 교회에 들어온다고 해서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이 폐기되는 것이 아님을 공의회에 납득(톰슨주석성경)시키려고 했는지도 모른다

 

다윗의 장막이 회복되리라는 말씀은 다윗에 장막에 있던 법궤로 상징되는 구약의 율법이 회복될 것이라는 뜻이 아니다.

또한 다윗의 장막에서 드렸던 제사가 그 형태 그대로 혹은 의미 그대로 회복될 것이라는 것도 아니다.

뿐만 아니라 아모스의 말씀은 예언의 말씀이며 그 예언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야고보의 말씀은 바로 지금(예루살렘 회의를 하는 시점), 예루살렘과 이방 교회에 다윗의 장막이 회복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이미 다윗의 무너진 장막이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현재 회복되었으며 회복된 다윗의 장막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으로서 하나님 나라의 통치가 유대인에게나 이방인 모두에게 미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다윗의 장막의 회복은 하나님 나라의 통치가 온땅에 임하는 것을 뜻한다

 

야고보가 이방인 선교를 논한 자리에서 다윗의 장막의 회복을 역설한 것은 이미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 나라가 우리에게 임했으므로 이방인들이 교회에 들어오고, 유대율법을 지키지 않는다고 해서 하나님의 통치를 거스르는 것이 아니며 이방인들이 (이미 폐기된) 유대 율법을 지키지 않는다고 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에는 하등 장애가 없다는 것을 옛 말씀을 통해 선포하고자 했던 것이다

 

야고보는 예수님이 성육신하고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지금 바로 무너진 다윗의 장막은 회복되었으며 유대인과 이방인 함께 그리스도의 은혜 가운데 살게 되었다는 것을 선포한 것이다

 

다윗 시대에 다윗이 행한 일련의 행위, 제사와 찬양과 경배, 이 모든 것들은 너무나 은혜롭고, 경건하고, 거룩한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다윗의 모본을 따라야 할 유대교 신자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가르치신 모든 것을 몸으로 실천하는 것이 우리가 행할 바이다. 다윗이 장막에 놓은 법궤나 그의 경건한 제사가 모델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새 계명,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을 우리 삶에서 이루는 것이 우리의 사명일 것이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수천 년 동안 이어져 왔던 구약의 짐승의 피의 제사를 끝냈다. 우리는 더 이상 제사드리지 않는다. 우리는 예배한다. 무엇을 예배하는가?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와 살을 기념하며 떡을 떼고 포도주를 마신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기억하고, 그로 인한 세상의 구원, 나 자신의 거듭남,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을 이웃에게 전했거나 전하기 위한 이야기들을 나눈다. 이것이 우리의 예배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들의 예배는 차라리 초대교회 예배를 닮아야 한다. 다윗의 제사가 더 은혜로워 보이고, 더 거룩하고, 하나님을 더 사랑하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다. 여섯 걸음마다 제사를 드리는 것은 거룩한 낭비일지 모르겠지만 지금 시대에 그것을 배울 필요가 있을까. 거룩한 낭비(여섯 걸음마다 소를 드렸다면 소는 몇 마리나 필요할까)라는 말은 어디서 기인한 것일까. 우리 시대에도 낭비할 것이 있다면 아껴서 이웃과 나눠 써야 할 것이다.

 

다윗이 여섯 걸음마다 제사를 드린 것을 기억하고 기념하면서 따르고자 할 게 아니라 데이비드 플랫의 책 <래디컬>에서처럼 내가 가지고 있는 것들을 적극적으로 이웃과 나누는 게 더 필요할 것이다. 예수님도 영생(구원)을 구하는 부자 청년에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재산을 이웃과 나누라고 말씀하셨다.

 

초대교회는 지하에서, 성도들의 가정에서 숨어서 예배드렸다. 찬송을 크게 부르지도 못했을 것이며 훌륭한 목회자도 거의 없었을 것이다. 대개 평신도들이었으며 그들은 각각의 집에서 준비한 몇 가지 음식들을 가지고 어느 신도의 집에 모였을 것이다. 그들은 서로 떡을 떼고 포도주를 마시며 간단히 식사를 마치고 사도들로부터 전해지는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를 서로 나누었을 것이다. 그리고 서로의 삶을 나누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어떻게 하면 이웃들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을 나눌 수 있을지 고민했을 것이다. 그들은 큰소리로 찬양할 수도 없었고, 대놓고 전도할 수도 없었다. 그저 조용히 모여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를 나누었다. 예배가 끝나고 나서는 세상으로 나가 열심히 살았다. 그들은 전도의 말이 아닌 자신들의 삶으로 십자가를 세상에 알렸다. 세상은 그들이 서로 사랑하는 모습(전 재산을 함께 나누는)을 보고, 그들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렀다.

 

 

<여섯 걸음>의 저자가 말하는 예배에는 찬양이 필수적이다. 아니, 찬양을 예배라고 부른다. 기도 역시 예배이고, 설교나 헌금, 신앙고백이나 주기도문, 축도 역시 예배다. 찬양이나 기도 등등은 예배를 구성하는 요소이기는 하지만 그것 자체가 본질은 아니다. 찬양하지 못해도, 심지어 기도조차 할 수 없어도, 우리는 예배할 수 있다. 설교가 없어도 헌금을 드리지 못해도 우리는 예배할 수 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기념하면서 우리의 삶을 그리스도의 사랑을 이웃과 나누는 것 자체가 예배이다.

 

중요한 것은 짐승이 죽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죽은 것이며 짐승의 제사가 무의미한 것은 아무리 피의 제사를 드려도 그것을 통해 죄가 없어지거나 구원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짐승의 피의 제사는 상징일 뿐이며 실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도 그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고, 이제 내 안에그리스도가 사신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라디아서 2:20)

 

그러므로 우리는 그 어떤  제사의 양식도 필요 없다. 예배란 드리는 것이라기보다는 그리스도와 먹고 마시는 것이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요한계시록 3:20)

 

 

예배(예배라는 형식, 모임)는 중요하다. 그것은 겸손히 주 앞에 나아가 엎드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내 안에 계신 예수와 늘 함께 먹고 마시지만 특별한 시간을 정해서 마음과 몸을 드려 그분의 사랑에 감사하고 그분의 사랑을 나누고 이웃과 교제(성도의 교제)하는 것은 너무나 귀하기 때문이다

 

<여섯 걸음>에서 구약의 제사, 특히 다윗의 제사에 주목하고 있기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제사를 상고할 필요가 있다

 

공의와 정의를 행하는 것은 제사 드리는 것보다 여호와께서 기쁘게 여기시느니라(잠언 21:3)

 

잠언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세상에 공의와 정의를 베푸는 것을 제사보다 더 기뻐하신다는 말씀이다. 유대 멸망기의 유대인뿐만 아니라 예수님 시대의 제사장과 바리새인, 뿐만 아니라 현재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세상의 공의와 정의에 무관심했다.

 

무릇 만군의 여호와의 포도원은 이스라엘 족속이요 그가 기뻐하시는 나무는 유다 사람이라 그들에게 정의를 바라셨더니 도리어 포학이요 그들에게 공의를 바라셨더니 도리어 부르짖음이었도다(이사야 5:7)

 

이사야 말씀 역시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이 땅에 공의와 정의가 무너졌기에 망하게 되었다고 말씀하고 있다.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호세아 6:6)

 

호세아 말씀에서 인애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베푸시는 무한한 사랑을 뜻하며 하나님을 아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을 알고 깨닫고 그것을 서로에게 행하라는 뜻이다.

 

한 선교단체의 컨퍼런스에서 인애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뜻하는데 당시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았으며 이것은 하나님을 잘 몰랐기 때문이라고 가르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그분들은 유대 멸망기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고, 사랑하지도 않아서 제사를 형식적으로 드렸기 때문에 멸망했으며 이제 우리는 전심으로 예배를 드려야 한다면서 그야말로 지극정성으로 예배하고 있다. 그래서 그분들은 다윗의 장막에서와 같은 예배가 회복되어야 한다고 외치고 있다.

 

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사무엘상 15:22)

 

사울이 하나님 말씀을 따르지 않고서도 도리어 제사를 핑계로 대자 사무엘이 책망하는 장면에서 나오는 말씀이다.

 

사울이 하나님 말씀을 어겼으니 이런 책망을 듣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길 수도 있다. 사울은 버림받은 왕이며 제사를 자기 죄를 덮는 수단으로 썼지만 다윗은 여호와의 율법을 귀하게 여기고 장막에서 충정으로 제사를 드렸기에 다윗의 모델을 따라야 한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의 선한 백성은 제사보다 하나님의 통치에 따르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먼저 하나님을 알고 사랑한다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많은 목회자와 성도들이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해, 하나님을 알기 위해 성경을 공부하고 기도하고, 하나님을 뜻을 기다리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를 원한다. 또 누군가는 하나님에 관해(about God) 교리나 지식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진짜 하나님 자신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인간이 우주보다 크신 그분을 얼마만큼 알아야 그분 자신을 알게 되는 것일까.

 

어쩌면 하나님을 알고자 애쓰는 것보다 먼저 해야 할 일은 하나님 나라의 선한 백성으로서 이 땅의 공의와 정의를 위해 헌신하는 것이 아닐까. 하나님을 아는 것은 한 인간이 평생을 바쳐도 어려운 일이며 인류 전체가 전 역사를 들여 연구해도 다 알 수 없는 과제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의 공의와 정의를 위해 일하는 것은 언제든 가능하다. 사실 알지 못하지만 이미 행하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공의와 정의를 이루는 기독교적 방식은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그 사랑 안에는 형제의 죄를 하루에 7번 용서하고, 7번씩 70번 용서하는 일도 포함된다. 우리가 그렇게 한다면 세상의 정의와 공의를 위해 목소리를 높이지 않아도 사랑으로 정의와 공의를 이룰 것이다.

 

만약 형제를 사랑하고 용서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과연 하나님을 아는 것은 가능한 일일까. 원수를 사랑하는 일이 불가능한데 하나님을 아는 것은 가능할까.

 

많은 신자들이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예배의 방식을 빌어서 표현한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곧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태복음 2:37-40)

 

예수님이 이 두 계명이 같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최후의 만찬을 하시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후에는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한복음 13:34-35)

 

예수님께서는 새 계명을 주시면서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말씀을 빼고 서로 사랑하라고만 하셨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같기 때문이다. 서로 사랑하면(내가 이웃을 사랑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인정받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이웃을 사랑하기에 예수 믿으라고 전도하는 것이 아니냐. 동시에 그리고 예수님의 지상명령을 이야기한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태복음 28:19-20)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세상 모든 민족을 예수님의 제자로 만들라는 것이다. 즉 서로 사랑하게 하라는 뜻이다. 예수님이 분부한 모든 것 역시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다. 바울도 말했듯이 사랑은 모든 율법을 완성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랑을 십자가에서 적나라하게 보여주셨고, 우리에게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다른 사람의 죄를 대속하는 사랑을 말한다. 남의 죄를 대신해서 죽는것, 그것이 예수님이 우리에게 부탁하신 사랑이다. 이것이 바로 너희가 나보다 더 큰 일을 할 것이다, 라고 말슴하신 것의 실체이다.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를 우리도 같이 지는 것이며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도와 같이 죽고, 그리스도와 같이 사는 것이며, 내가 주님 안에 주님이 내 안에 있는 거듭남이다. 

 

 

<여섯 걸음>에서 중요한 에피소드가 2가지 나온다.

 

첫 번째 에피소드. 무슬림 땅에서 선교할 때 목사님과 동역자들은 거의 선교를 할 수 없었고, 현지 이웃들과 간간이 교제할 뿐이었다. 그때 만난 미나라는 무슬림 자매에게 식사를 함께 하고 찬양을 하는데 전도해야겠다는 마음으로 그에게 복음을 전했다고 한다.

 

예수님을 네 인생의 구주로 영접하지 않겠니?”

(그렇게 하겠어요.)”

미나는 복음을 받아들이고 세례를 받았다.

 

정말 감동적이며 은혜로운 간증이다. 책을 읽으며 눈물을 흘렸다.

 

선교팀이 귀국한 뒤 받은 미나의 메일에는 요한복음의 말씀이 첨부되어 있었다고 한다.

 

너무나 아쉬웠다. 그 뒤 미나는 어떻게 되었는지 혹시 미나에게 큰 핍박에 닥치지 않았는지. 너무 궁금했다. 그러나 책에는 그 뒷얘기는 없었다.

 

두 번째 에피소드. 코로나19 팬데믹이 터지자 성도들이 교회에서 예배할 수 없었다.

 

예배가 성도의 일상을 찾아가야 했다. …… 성도들의 일상을 교회가 외면해서는 안 된다는 영적 부담감은 팬데믹으로 인해 고립된 성도들의 일상에 대한 책임감으로 바뀌었다.”

 

그런데 책에는 성도들의 일상을 교회가 어떻게 챙겼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실행이 이어지지 않는다. (아마도 그래서 목사님은 개척을 하신 것 같다.)

 

여기서 더 중요한 문제는 교회성도가 분리되어 있다는 것이다. 교회는 성도들의 연합체이다. 그런데 여기서 교회는 교회 조직을 말하고 성도는 일반 교인들을 말한다. 교회 조직(시스템이나 교회 목회자 도는 직원)이 교인들의 일상을 챙긴다는 뜻이다. 과연 그게 맞는가. 성도는 이미 그 자체로 교회이다. 현재 한국교회가 교회 조직과 성도(일반 교인)들을 분리하는 한 진짜 교회는 세워질 수 없다

 

중요한 것은 예배는 경건한데 삶이 바뀌지 않는다는 것이고, 진짜 거듭남은 예배와 같은 종교의식이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밑바닥 일상이 변화하는 것인데 이것은 그리스도가 내 안에 계실 때만 가능하다. 

 

 

한국기독교 100년사를 돌아볼 때 현재의 상태가 가장 위태롭다고들 한다. 왜 그럴까. 교회는 크고, 예배는 왕성한데 왜 위기일까. 어쩌면 교회가 예배에는 인력과 장비와 돈을 무진장 쓰지만 이웃 사랑에는 겨우 몇 퍼센트도 할애하지 않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 시대 한국교회는 모든 초점을 이웃 사랑에 맞춰야 한다.

 

거대한 교회 건축이 문제라고 비판하면서도 어쩔 수 없다고 변명한다. 왜냐하면 예배드리기 위해서는 모일 장소가 반드시 필요하니까. 예배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우리들의 갈망과 목마름의 표현이니까. 큰 대형교회가 필요한 이유는 많은 성도가 대집회로 모여 많은 물소리의 찬양과 경배를 해야 하니까. 그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니까. 그런데 과연 그럴까.

 

제사는 그리스도의 희생을 예표한다고 한다. 구약의 모든 말씀이 그리스도를 향하고 있으니 맞는 해석일 것이다. 그러나 제사가 그리스도를 예표한다고 해서 그 때문에 제사 자체가 의미 있는 것은 아니다. 그 당시 제사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제사는 하나님과 만나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재 우리는 역사 공부로는 모르겠으나 구약의 제사를 그리스도와 연관지어서 특별한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우리는 예수님이 구약의 제사를 끝냈다는 것에 방점을 찍어야 한다. 우리는 죄와 율법, 그리고 제사로부터 해방된 것이다. 제사는 죄를 씻을 수도, 우리를 구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구약 시대 백성들보다 낫다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았고, 그들은 그리스도를 기대하고 열망했을 뿐이라는 데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동시에 함께 살고 있지만 그분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죽거나 같이 살지 못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기념하면서 기쁨으로 예배하지만 그분들은 세상의 메시아로 오실 그리스도를 기다리고 열망하면서 숱한 제사를 반복했을 뿐이다.

 

그분들은 제사를 목숨보다 더 중하게 여겼지만 유대 멸망기에 하나님으로부터 크게 책망받았고, 예수님이 오셨을 때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꾸짖음을 들었다. 바리새인들은 이사야를 기념하며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했음을 회개하고 있었는데도 말이다.

 

유대 나라의 멸망은 형식적으로 잘못 드려진 제사 때문이 아니라 진정한 제사,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 즉 정의와 공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바리새인도 몰랐고, 현재 우리들도 모르고 있다. 그래서 계속해서 예배에 매달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것도 다윗을 모델로 하는 구약의 제사에 매달리고 있다니!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도 제사장과 레위인은 제사를 핑계로 강도만난 자를 외면한다.

현재 우리는 어떤가.

일주일에 많게는 11개의 예배가 드려진다. 주일2, 새벽6, ,2, 구역1. 전국 각지의 교회에서 예배를 드린다.

그러나 현재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이 거룩하다고 자신하는 사람은 몇 되지 않는다.

왜 예배는 수없이 드리는데(그것도 아주 은혜로운 예배를) 삶은 왜 거듭나지 못하는가.

우리가 예배를 형식적으로 대충 드려서일까. 우리가 예배를 얼마나 경건하고 은혜롭게 진행하는가.

그런데도 삶이 변하지 않는다는 것은 어디에 문제가 있는 것일까.

 

우리는 황홀한 변화산에서 내려와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와 세상을 구별해서는 안 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하나님 나라를 이땅에 가져왔으며 예수를 믿는 우리는 세상에서 자기 삶에 충실하면서 이웃들과 부대끼며 하나님의 선한 백성으로 살아야 한다.

 

주일에 교회에서 드리는 예배만을 기다리면서 평일의 노동과 학업 등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우리의 삶이 변화되어야 하는 곳은 예배드리는 교회 안에서뿐만 아니라 직장이나 가정, 학교이기 때문이다.

 

 

이 시대의 예배자들은 하나님을 향한 갈망으로 가득 찬 예배를 원한다고 말한다.

?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는 어쩌고?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분들의 마음속에는 안타깝게도 하나님을 타자로 여기는 생각이 자리하고 있다. 즉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우리는 땅에 산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나의 밖에 계시다. 그러니까 매순간 하나님을 찾아야 한다. 사슴이 시냇물을 찾듯이.

하나님을 갈망하고 목마름에 애타는 모습은 은혜로워 보인다. 그러나 내 속에 그리스도가 계신데 하늘을 바라보며 갈망하고 찾고 찾는 일을 계속할 필요가 있을까. 우리의 일상적 삶이 변하지 않기에 내 안에 계신 성령을 근심케 하는 일을 더 신경써야 할 것이다. 

 

내 안에 계신 예수님께 드리는 예배는 결국 나의 삶이다. 삶이 곧 예배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직장과 학교, 가정에서 선한 삶을 살면 된다. 그리고 주일에 성도들이 모여 예배하고 서로 교제하면 된다. 성도의 교제는 예배의 일부이며 우리의 믿음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다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해 온 인류가 죄와 율법에서 해방되는 순간부터 시작되었다. 옛 제사는 끝났고, 이제 예배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기념하고, 마음에 새기면서 성도들이 교제하는 것이다.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니라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마태복음 27:50-51)

 

성소와 지성소의 휘장이 찢어지는 사건, 제사장이 우리를 대신해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은 끝났으며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거하고 우리 안에 그리스도가 사는 삶이 시작되었다. 예배는 그리스도와 먹고 마시는 삶의 모든 영역에서 일어난다. 예배는 교회(건물이나 제도, 조직, 시스템) 안에 가두어서는 안 된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먹고 마신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그것은 우리의 일상 삶이 그리스도와 같이 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거듭난다는 것이다. 거듭난다는 것은 우리가 먹고 자고 일하는 모든 삶의 부분에서 새로워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 자신만을 위한 삶에서 이웃과 나누는 삶으로 바뀌는 것을 뜻한다

 

이웃을, 아니 원수를 사랑하는 일이 어떻게 가능할까, 고민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내 안에는 그리스도께서 사신다. 그분께서 나와 함께 먹고 마시며 일하신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나는 못하지만 그분께서는 모든 것을 이루신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나의 손과 발을 통해 일하고 계신다.

 

사랑은 그리스도와 하나된 나에게서 이웃에게로 자연스럽게 흘러나간다. 나의 자아가 먼저 나서지 않고 그분께서 일하시도록 겸손히 따르는 것이 중요하다. 그때 그리스도는 오히려 내가 사랑할 수 있도록 길을 여신다. 내 속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은 모든 일을 다 행하시고 동시에 그것을 내가 할 수 있게 하신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듯이 그리스도가 내 안에 계시므로

 

 

<여섯 걸음>에는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가 거의 나오지 않지만 한 곳에서(135) 예수님의 일화를 소개한다.

 

저자는 사랑이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하면서

예수님이 사역의 수행 외에 개인의 안식과 쉼을 위해 종종 찾으신 곳이 성경 속에 등장한다. 바로 베다니였다. 베다니는 벧 아니가난한 자의 집이라는 뜻이다. 예수님은 심지어 필생의 사명인 십자가의 죽음을 눈앞에 둔 시점에서도 이 특별할 것 없는 장소인 베다니로 향하셨다. 왜 하필 베다니였을까.

비밀은 사랑에 있다. 그분이 가시려는 그 길은 오직 사랑으로만 갈 수 있는 길이었다. 십자가는 오직 사랑으로만 감당할 수 있는 것이었다. 십자가는 오직 사랑으로만 감당할 수 있는 것이었다. …… 그 엄중한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그분은 자신이 사랑하는 자들 곁에 잠시 머무르셨던 것이다.”

 

이 책에서 가장 감동적이며 가장 아름다운 글귀이다.

다만 안타까운 것은 이 글이 은연중에 예수님이 하나님을 사랑했기에 사명을 감당할 수 있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는 것이다.

 

윗부분에 쓰인

정작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을 제외하고 예배와 신앙을 논하지 않길 바란다.”

이 글귀와 이어지는 것이다.

 

즉 예수님이 베다니에 머무신 것은 십자가 사역을 위해 잠시 쉼을 얻기 위해 당신이 사랑하는 베다니의 친구들에게 가셨다는 것이다. 그런데 예전에도 예수님은 베다니로 자주(혹은 가끔) 가셨다. 거기 친구들, 가난한 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이상하게도, 이 책에서뿐만 아니라 많은 목회자들에게는 목적은 항상 목회나 사역에 있고, 예수님의 사랑의 역사(役事)를 자신들의 목회 사역(事役)에 적용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이 베다니에 가셨고, 그곳에는 친구들이 있어 안식과 쉼을 얻으셨다. 그리고 그들은 가난한 자들이었으며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도 죄인, 가난한 자들을 위해서였다. 예수님이 베다니로 가신 것은 사랑을 나누시기 위함이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도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시기 위함이었다. 십자가의 고난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세상을 나타내시는 사역이었다.

 

 

안더스 니그렌은 그의 책 <아가페와 에로스>에서 아가페는 하나님의 사랑이며,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무조건, 무목적, 비동기의 사랑, 아가페를 이웃과 나누는 사람들이라고 밝히고 있다.

 

 

또한 헬라철학으로부터 기인한 에로스(남녀의 육체적인 사랑이 아닌 천상의 지고한 선을 추구하는 사랑)가 기독교 안에 들어와 있는데 에로스의 특징은 최고선에 도달하고자 하는 인간의 열망이 상승하여 몰아일체의 황홀경 속에서 신과 교제하고자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자기 사랑에 근거를 두고 있으며 최고로 선하고, 최고로 사랑할 만한 대상인 하나님을 향해 불타오른다.

 

안더스 니그렌의 아가페와 에로스 개념을 현재 우리의 신앙생활과 예배에 적용한다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 궁금하다.

 

우리의 삶과 예배가 하나님의 사랑, 아가페에 기인하는지 헬라철학의 에로스적 동기에 의한 것인지 다시금 돌아봐야 할 때가 아닐까.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