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더스 니그렌 <아가페와 에로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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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리뷰

안더스 니그렌 <아가페와 에로스> (1)

by 브린니 2023. 11. 19.

안더스 니그렌 <아가페와 에로스>

 

우리가 사랑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아가페)과 인간의 사랑(에로스)로 나눌 수 있다. 안더스 니그렌은 우리 기독교 안에서도 아가페와 에로스가 다같이 사랑이란 이름으로 불리고 있지만 두 가지 사랑의 개념을 확실하게 구분해야 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아가페는 우리를 창조하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지만 에로스는 하나님을 궁극적인 최고선으로 사랑하는 인간의 사랑으로서 헬라철학을 바탕으로 하는 자기만족적인 인간적 사랑이기 때문이다.

 

 

이 책의 첫부분에 영역자 필립 와트슨의 서문이 실려 있다.

여기엔 아가페와 에로스에 대한 저자의 생각이 요약되어 있다.

 

에로스

에로스란 플라톤의 천상적 에로스로서 신적인 것에 대한 인간의 사랑이다.”

 

에로스는 욕구요 동경이다. 에로스는 그 대상에 내재된 매력적인 속성 때문에 발생한다. 인간은 에로스 사랑에서 하나님의 완전한 속성들을 소유하고 향유함으로써 자기의 영적 굶주림을 만족시키려 한다.”

 

정신분석학자 라캉은 사랑이란 그 사랑의 대상을 나의 기쁨의 원천으로 여기며 그 대상 속에 있는 매력적인 어떤 것을 보물로 여기며 욕망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에로스는 그 대상이 자신을 받아주기를 원하질 않고 자신이 그 대상을 소유하길 원한다.”

 

천상지향적 욕구인 에로스가 하나님 자신을 위하여 하나님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필요와 결핍을 충족시킬 수 있는 최고선으로서 하나님을 추구하기 때문에 자기중심적이다. 에로스는 자기만족이란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서 하나님을 추구하며 본질적으로 하나님이 아니라 자신의 최고선을 추구한다.”

 

에로스는 얻기를 좋아하는 사랑이며, 고도로 세련된 형태의 자기이익과 자기추구이다.”

 

에로스는 하나님을 사랑할 이유를 풍성하게 발견한다.

 

아가페

 

신약성경의 사랑은 값없이 풍성하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아가페에 대해서 감사하는 마음으로 응답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사랑의 본성 때문에 사랑하신다.”

 

아가페는 사랑의 대상에 매력이 있어서 생기거나 매력이 없다고 소멸되지 않는다. 하나님은 죄인들의 죄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사랑하신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 사랑하시는 사람들의 가치의 유무가 아니라 그분 자신의 사랑의 본성에 의해서 결정된다. 언제나 하나님은 먼저 사랑하신다.”

 

하나님의 사랑은 멸망할 죄인의 구원으로 나타난다. 죄인들은 죄와 죽음에서 자신들을 구원원할 수 없었다, 창조와 구원은 모두 은총 값없이 관대하게 베푸는 아가페의 사역이다,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태양을 비추시며 비를 내려주시는 거룩한 사랑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은 동일한 사랑이다.”

 

아가페는 값없이 이타적으로 베풀기를 좋아하는 사랑이다.”

 

아가페의 사랑의 하나님은 사랑의 본성을 지니고 계시기 때문에 사랑하신다.”

 

아가페는 자아의 죽음이 아니라 이기심의 죽음이다. 자아의 대적이 아니라 자기중심주의 대적이다. 인간의 아가페에 의해서 그리고 아가페 안에서 살아갈 때에만 진정한 자아를 실현할 수 있다.”

 

기독교는 아가페 개념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한 종교적 동기 외에는 허용하지 않으며 하나님의 아가페적 방법 이외에 하나님을 예배하는 길을 인정하지 않는다.”

우리의 예배의 동기가 자신의 영적 목마름을 채우기 위한 것인지 살펴봐야 할 것이다.

 

 

서론

 

아가페와 에로스의 문제

 

안더스 니그렌은 기독교의 사랑에 개념에 대한 진지한 고찰이 없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그동안 기독교 사랑의 진정한 의미를 추적하지 못하고, 자기사랑을 근거로 한 자기존중에 의존하여 기독교의 사랑을 지지하려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적 사랑 개념의 독특한 성격이 규명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기독교 사랑인 아가페와 플라톤 철학에서의 에로스는 서로 직통할 수 없는 상이란 두 정신세계에 속하며 대표하는 가치가 같지 않으며 따라서 어떤 경우에도 서로 대체될 수 없다.

 

기독교에서 아가페의 자리

 

사랑 개념은 기독교의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며 사랑이 기독교의 근본동기이다.”

 

근본동기는 하나님의 예술품을 통합된 전체로 만들어 그 구조를 결정하고 그것에 독특성을 부여하는 것이다. 근본동기는 그것의 고유한 색조와 색체를 전체에 제공하면서 새로운 변형들 안에서 끊임없이 반복하는 주제이다.”

 

천상적 에로스

 

에로스를 지상적, 육감적 사랑과 동일시하거나 아가페를 천상적, 정신적 사랑과 동일시하려는 태도는 잘못된 것이다.

 

플라톤 철학은 에로스에서 육욕적인 사랑을 배제하고 천상적인 에로스를 추구한다. 육욕적(관능적) 사랑은 영혼을 감각적이며 물질적인 것에 얽어맬 뿐이므로 철학적 에로스의 과업은 영혼을 감각적, 물질적 족쇄에서 해방하며 초감각적(초월적), 천상적 세계로 들어올리는 것이다.

 

즉 통속적인 에로스와 천상적 에로스를 구별하는 것이다.

이 책에서 다루는 에로스는 바로 천상적 에로스이다.

이 책은 천상적 에로스와 아가페를 혼동하는 문제를 다루고 있다.

즉 에로스(하나님에 대한 사랑)와 아가페(하나님의 사랑)을 구분하는 것이다.

기독교 안에서 에로스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

아가페를 무시하는 에로스는 이웃 사랑 없는 하나님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

 

천상적 에로스는 매우 고상하고 심령화된 형태를 갖추고 아가페 개념과 경쟁한다.”

 

근본동기들의 갈등

 

에로스는 위쪽을 가리켰다. 에로스의 모든 노력들은 사람들의 마음을 감각계로부터 초자연적, 천상적 생명으로 향하도록 이끄는 것이다.”

 

문제는 에로스가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대적이 아니라 기독교의 타고난 동맹자로 보여졌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아가페)과 하나님(에 대한) 사랑(에로스)과 이웃 사랑과 자기 사랑에서 두 근본동기가 대립하고 있다.

 

 

1

 

두 가지 근본동기들

 

아가페

 

기독교 사랑은 보편적이며 포괄적이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가 있을 수 없다(3:28)”

 

유대교가 사랑의 계명을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는 뜻으로 해석한다면 기독교적 해석은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5:13-14)일 것이다.”

 

기독교의 사랑 개념이 궁극적으로 적대자들의 견해에 의해서 결정되었음을 의미한다.

 

원수에 대한 사랑은 우리의 직접적인 본성적 감정과 모순되며 부정적 성격을 나타내는 것처럼 보이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마태복음 5:44-45)

 

시편1편에서 보듯이 유대 율법은 의인과 죄인을 구분한다. 그러나 예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선언했다.

 

하나님이 죄인을 찾으시며 친히 그와 사귀려 하신다. 하나님과의 교제는 율법이 아닌 사랑의 통제를 받는다. 사람들을 해하시는 하나님의 태도의 특징은 분배적 의가 아니라 아가페이며, 응보적 의가 아니라 값없이 주시고 용서하시는 사랑이다.”

 

아가페는 자발적이며 비동기적이다.”

 

하나님의 사랑에는 외부로부터 기인하는 근거가 없다.

그 사랑의 유일한 근거는 하나님 자신 안에서 찾아야 한다.

하나님의 사랑은 전적으로 자발적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 동기로 제시될 수 있을 만한 어떤 것도 인간 안에서 구하지 않는다.

사람과의 관계에서 하나님의 사랑에는 동기가 없다.

하나님이 인간은 사랑한다는 말은 사람이 어떤 존재인가에 대한 판단이 아니라 하나님이 어떤 존재인가에 대한 판단이다.

자발적 비동기적 사랑은 그 자체 밖에서 즉 인간의 개인적 가치 안에서 아무런 동기를 갖지 않는다.”

 

율법적 체계 내에 자리잡은 사랑은 의인들을 향한 동기부여된 사랑이며 사랑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들을 향하는 사랑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사랑을 받을 가치도 없고 요구할 수도 없는 죄인들을 찾아간다.”

 

하나님의 사랑이 의롭고 경건한 자를 사랑한다면 우리는 항상 하나님이 그의 의와 경건 때문에 사랑하신다고 생각할 위험성이 있다.”

 

그 대상의 값어치에 대한 모든 생각을 포기할 때에만 아가페의 실상을 이해할 수 있다.”

 

아가페는 창조적인 사랑이다.”

 

아무런 자격도 없는 것이 단지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 됨으로써 가치를 얻는다.”

 

아가페는 가치를 인식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가치를 창조한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은 그 자신 안에 아무런 가치도 가진 것이 없다.”

에로스는 그 사람 안에 무엇이 있다고 여기며 그것을 중요한 가치로 여긴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다는 사실만이 그에게 가치를 제공할 뿐이다.”

 

예수께서 용서를 베풀 때 그것은 하나님의 선물(은사)로 베풀어진 것이다.

죄의 용서는 신적인 권능의 창조적 사역이다.”

 

아가페는 하나님과의 친교를 일으킨다.”

 

인간 편에서 하나님께 이르는 길은 전혀 없다.

회개 역시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만들 수 없다. 그것은 의로움이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만들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인간이 하나님께 다가가는 길은 없으며 오직 하나님이 인간에게 다가오는 길만이 있을 뿐이다. 그것은 바로 신적인 용서의 길 즉 하나님의 사랑이다.

아가페는 하나님이 인간을 향하시는 길이다.”

창조와 구원 모두 하나님이 우리를 향한 사랑의 사역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우리에게 온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하게 된다.

하나님의 선물로 받은 것을 하나님께 되돌려 드리는 방법은 없다.

 

사랑과 공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죄인들과의 관계를 거부하고, 정의 원칙에 입각해야 한다고 생각하만, 예수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여전히 그 존엄성과 엄격성을 유지하지만 하나님은 죄인들을 찾아가신다고 선포한다.

 

마태복음 20:1-16을 통해서 볼 때 포도원에서 일찍부터 나온 일꾼들이 나중에 온 일꾼들과 똑같은 임금을 받았을 때 우리들은 사회적 정의를 들먹이며 먼저 온 자들이 더 많이 일했기 때문에 임금을 더 많이 받아야 한다고 여긴다.

 

그러나 예수님은 공의를 넘어선 하나님의 사랑을 말씀하신다.

 

이 비유의 말씀에서 주인은 공의를 침해하지 않으면서 친절을 베물었다. 그는 자신의 의무를 엄격하게 실행했고, 동시에 자기의 권리를 가난한 사람들에게 유리하도록 사용했다.”

 

즉 모든 사람은 그 공적에 따라 받았고, 은총이 전체 거래를 더 고상한 초기 수준으로 끌어올린 것만이 예외이다.”

이 비유를 죄와 구원의 문제에 적용해보자.

A는 죄를 조금 지었고, B는 죄를 많이 지었다.

하나님은 A를 용서하고 B는 용서하지 않으실까.

하나님의 사랑은 AB 모두를 사랑하고, 용서하고, 구원하신다.

A가 자신이 구원받는 것을 당연하다고 여기면서 B가 구원받는 것을 억울해할 수 있을까.

 

가장 오랫동안 노동한 사람들은 공의적인 적정비율 개념에 사로잡혀서 자신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이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른 사람들이 노동량을 초과하는 보수를 받는 것이 은혜로 되었음을 인정하고 공로와 보수라는 개념을 전적으로 초월했다.

 

자발적 사랑과 선심이 있는 곳에선 공의적인 질서가 시대에 뒤떨어진 무력한 것이다.

 

아무 주장도 할 수 없는 죄인들은 동기없는 선심을 받아들인다. 반면에 요구를 내세울 수 있는 의인들은 동기적인 공의를 요구하고 비동기적 사랑을 거절한다.”

 

탕자의 비유에서 형은 법적인 질서를 대표하고 있다. 그는 공의적인 관점에서 아우의 행동은 아버지가 보인 사랑에 아무런 근거를 제공하지 못한다. 그러나 아버지의 사랑은 비동기적이다. 합리적인 계산으로 보아서 희생이 무익할 때도 아가페는 주며 희생한다.

 

아흔 아홉 마리를 광야에 두고 잃어버린 한 마리를 찾아가는 것은 이성적 성찰이 아니라 비동기적 사랑이다(누가복음 15:5).

 

하나님과의 교제에서 출발하는 기독교 윤리의 특색은 제자들에게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마태복음 10:8)라고 하신 말씀으로 요약된다.

 

하나님의 사랑을 거저 받은 사람들은 자신들의 동료 인간들에게 그 사랑을 거저 전달하도록 부름받았다(마태복음 18:23, 33-33).

 

형제를 7번씩 70번 용서하고(마태복음 18:23), 빚을 탕감받은 것처럼 동료의 빚도 탕감해야 한다(33-33).

 

사랑 계명의 기독교적 의미

 

아가페의 원형은 하나님이 현시하는 아가페이며 자발적, 비동기적, 무계획적, 무제한적, 무조건적이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마가복음 12:30)”

이 말씀은 절대적인 헌신과 복종을 의미한다.

 

만일 하나님 사랑이 획득적 사랑이라면(비록 하나님이 최고선이더라도) 결국 하나님은 사람의 욕망을 만족시키는 수단이라는 뜻이 된다.

 

하나님의 사랑과 인간의 사랑을 동등하다고 전제할 수 없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주권에 의해서 결정된다.

 

하나님의 아가페와의 연관성은 이웃 사랑의 경우에 가장 명백하다.

인간이 하나님의 사랑(아가페)으로 이웃을 사랑할 때만 아가페 사랑의 실천이 가능하다. 아가페를 하나님께 되돌릴 수는 없다.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이것이 아가페의 역설이다.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사랑도 자발적이며 비동기적이어야만 진정한 아가페로 불릴 수 있다.

인간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데에는 반드시 이유가 존재한다.

인간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자신이 구원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를 보답하겠다는 생각 때문에, 혹은 하나님이 다른 사랑의 대상 중 최고이기 때문에, 세상의 어떤 것보다 하나님이 더 고귀한 존재이기에등등

결국 하나님이 가장 사랑할 만한 대상이기에 사랑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보잘 것 없는 신이라고 여긴다면 인간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을 것이다.

인간이 하나님을 무조건적으로 사랑할 수 없기에(하나님이 사랑의 대상으로는 너무 위대하기에 오히려) 인간의 하나님 사랑은 에로스에 가깝다.

 

평범한 인간적 사랑은 자기중심적 동기를 가지며 외부의 영향이 적을수록(그런 의미에서 더 자발적일수록) 더욱 자기중심적이 된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한 기독교적 사랑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소유물이 되었다는 것과 동일하기 때문에 그 어떤 목적론적 동기도 제거된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아무것도 얻으려고 하지 않는다. 심지어 하나님이나 하나님의 사랑까지도 얻으려고 하지 않는다. 하나님 사랑은 하나님께 마음을 그저 드리는 것이다. 보상을 고려하지 않고 하나님께 복종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우리는 그저 하나님을 예배할 뿐이다, 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들은 예배를 드리고 그 예배에서 은혜받기를 원한다. 자기들의 예배에 하나님이 임재하시기를 원한다. 은혜가 없으면 불평을 하거나 뭐가 잘못된 것이냐고 반성하거나 다른 사람들 탓을 하기도 한다.

목회자들은 성도들에게 은혜를 끼치겠다는 열망에 사로잡혀 예배 리허설을 하기도 한다.

찬양 인도자들은 감동과 은혜를 이끌어내기 위해 음향장비를 조정하고, 수십 번 연습하면서 은혜를 창조(?)하려고 한다.

인간이 하나님을 사랑을 표현하기 위한 예배조차 어떤 목적이나 이유에 따른 것이다.

 

그러나 진짜 그리스도인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하나님의 인정이나 보상이나 위로를 얻으려고 하지 않는 것이다.

 

너희도 명령받는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요 단지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찌니라(누가복음 17:10)”

 

이웃을 사랑하라

 

이웃 사랑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동일한 뿌리에서 솟아난다.

아무런 이유도 목적도 없는 그저 주는 사랑.

 

인간의 사랑은 일종의 자연적인 자기 사랑이며 자신에게 유익을 주는 사람들에게 범위를 넓힌다.

 

너희가 만일 너희를 사랑하는 자만을 사랑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사랑하는 자는 사랑하느니라

너희가 만일 선대하는 자만을 선대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이렇게 하느니라 너희가 받기를 바라고 사람들에게 꾸어 주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그만큼 받고자 하여 죄인에게 꾸어 주느니라(누가복음 6:32-34)

 

위의 말씀처럼 율법사는 내 이웃이 누구냐고 묻는다(누가복음 10:29).

내 이웃이란 결국 나와 특별한 관계에 있는 사람이란 뜻이다.

예수는 네가 다른 사람에게 자비를 베풀면 그 사람과 네가 이웃이 될 것이라고 답한다.

아무런 이유도 목적도 없이 먼저 자비를 베풀 때 비로소 그 사람과 이웃 관계가 형성된다는 것이다.

이웃이란 대상의 문제가 아니라 아무런 이유도 목적도 없이 내가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랑할 때 그 대상과 서로 관계를 맺게 되는 것이다.

이웃의 문제는 대상의 문제가 아니라 관계의 문제이다.

 

그동안 기독교적 이웃 사랑은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을 지향한다는 다양한 생각이 존재한다.

이웃 자체를 향한 것이 아니라 미래에 변화될 그 사람을 지향한다.

소위 내 이웃 안에 계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웃 사랑은 단순히 하나님 사랑의 특수한 형태가 아니다.

 

사랑받아야 할 대상은 구체적인 형편과 조건에 처해 있는 나의 이웃이지 나의 이웃에 대한 이상적인 상상이나 내 이웃 안에 계신 하나님이 아니다.“

 

이웃을 향한 사랑이 그 사람 자신에겐 무관심한 채 그의 안에 있다고 여겨지는 거룩한 핵심이나 본질에 관심이 있다면 이 사랑은 비동기성에 합당하지 않다.“

 

이웃 사랑의 계명 안에서 자기 사랑을 발견하는 시도도 있다.

왜냐하면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레위기 19:18, 마가복음 12:31)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기 사랑은 인간의 자연스런 조건이며 또한 사람의 의지를 타락시키는 이유이다. 사랑이 자기를 향하지 않고 자기의 이웃을 향할 때 의지의 본성적인 타락이 극복된다. 이웃 사랑은 자기 사랑을 포함하기는커녕 오히려 실제론 자기 사랑을 배제하며 극복한다.

 

네 이웃을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은 자신을 사랑하듯 이웃을 사랑하는 말씀이 아니다. 자기 사랑과 이웃 사랑은 별개의 것이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은 이웃이 대상이 아니라 자기 자신과 같은 존재이므로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자신을 사랑하는 것과 같다는 것을 말한다.

예수께서 내 이웃이 누구냐고 묻는 율법사에게 강도만난 자의 이웃이 누구냐라고 질문을 바꿀 때 나와 강도만난 자가 같은 존재임을 역설한다.

또한 율법사 자비를 베푼 자라고 대답할 때 예수께서 자비를 베푼 자처럼 너도 행하라고 말할 때 나와 자비를 베푼 자 역시 같은 존재가 된다.

그러므로 나와 강도만난 자와 자비를 베푼 자는 모두 같은 존재로서 즉 내가 곧 이웃이 되어 서로 관계를 맺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새 계명은 서로 사랑하라이다.

나와 이웃이 같은 존재로서 상호사랑하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은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의 사랑은 아가페이고 그 아가페를 받은 그리스도인들은 이웃을 그 사랑으로 사랑한다(즉 하나님의 사랑-아가페로서 서로 사랑한다.)

 

그리고 아가페의 사랑에는 대상의 차별이 없으며 나와 어떤 관계가 있든 없든 심지어 원수이든 상관이 없다.

 

오히려 나와 가까운 사람에게 사랑을 베푸는 것은 아가페의 초보일 수 있다. 아가페의 사랑은 사랑할 수 없는 대상을 사랑하는 데 있다.

 

도저히 사랑할 수 없을 것 같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 그것이 예수님의 사랑이다.

 

십자가를 대신 지는 것, 그 사람 대신 내가 짐을 지는 것, 원수 대신 원수가 받아야 할 고난을 대신 받는 것, 이것은 대속의 사랑인 것이다.

 

율법을 완성하신 예수님은 단 한 가지 계명을 주셨다. 서로 사랑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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