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더스 니그렌 <아가페와 에로스>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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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리뷰

안더스 니그렌 <아가페와 에로스> (3)

by 브린니 2023. 12. 3.

안더스 니그렌 <아가페와 에로스>  (3)

 

 

 

 

루터의 아가페 개념 

 

신적인 사랑

루터가 모든 종류의 자기중심적 종교에 반대하여 신에 대한 순전한 신중심적인 관계를 강조한다.

 

자기중심적 경향

모든 것이 인간 자신, 즉 인간이 행하거나 인간에게 일어나는 사건에 중심을 둔다.

의로움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에서 인간이 달성하는 것으로 변화된다.

인간이 행하는 선은 공로 개념을 통하여 영원한 복과 의도적으로 연관된다.

모든 것은 인간의 욕망의 기준에 의해서 평가되며 그것이 인간에게 미치는 중요성에 의해서 판단된다.

 

루터는 가톨릭적 경건이 인간의 자아를 하나님의 자리에 놓는다고 생각했다.

부수고 파괴되어야 할 것은 우리 안의 모든 것들이다.

건축되고 설립되어야 하는 것은 우리 밖,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것이다.

우리를 구원하는데 필요한 의로움은 우리가 아니라 다른 곳, 즉 하늘로부터 온다.

 

가톨릭 교회에서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사랑이라기보다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이다.

그래서 도덕주의적 태도나 행복주의는 자아중심적이 된다.

가톨릭으로 주창된 사랑은 획득적 사랑의 특징을 보여준다.

이것은 자기 사랑으로 귀결된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그리스도 안에 이미 계시되었으며 이것은 획득적 사랑이 아니라 베푸는 사랑이다.

 

칭의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조건적 의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로서의 의의 문제이다.

기독교적 사랑은 엄격하게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 사랑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하나님이 친히 사랑하시는 그 사랑에 관심이 있다.

 

루터의 개념은 성결이 아니라 죄에 기초한 하나님과의 친교이다.

 

루터는 대부분의 자연종교가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위한 입지를 얻으려 한다고 생각했다. (거룩한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인간은 최대한도로 스스로 거룩해지기를 추구해야 한다는 인간의 생각 때문에.)

 

인간은 자기 자신만의 의로움을 산출하려고 애쓴다. 그는 선하고 거룩해지려고 한다. 그는 이 수단에 의해서 하나님과의 친교에 들어가려고 한다.

최근 한국교회의 한 갈래는 예배를 경건하게 드려서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하려고 한다.

 

그러나 룬터는 이것이 자연인의 사악함의 원천으로 보았으며 마귀의 유혹이라고 생각했다.

이 유혹에 굴복하면 우리를 하나님으로부터 떼어내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못하도록 방해한다.

 

"나는 그분처럼 경건하기를 원한다." (이 말은 정말 멋지게 들린다.)

분명이 매우 선하고 칭찬할만한 이 의도의 가장 심오한 근거는 하나님의 자비, 즉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아가페만을 전적으로 의지하여 살기를 거부하는 인간 안에 있다.

하나님께 피신하기 전에 스스로 자신을 먼저 정화하려는 의지에는 은밀한 무례가 도사리고 있다.

 

죄와 사랑으로부터의 구원과 함께 은총, 죄사함, 생명 및 의로움을 주는 것은 어떠한 피조물의 일도 아니며 단지 오로지 신의 주권에 속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그것을 자기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고 할 때 그것은 하나님의 신성에 대한 공격이다.

 

루터는 말했다. “너 거룩한 마귀여, 너는 나를 성자로 만들려고 한다.”

 

거룩한 사람은 순전히 허구에 불과하며 인간적인 신인 척하는 자이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것은 실제 죄인들을 위한 것이었다.

 

하나님과 우리의 친교는 우리 편에서 보면 성결이 아닌 죄에 기초하고 있으며 하나님 편에선 그분의 전적으로 이유 없는 무동기적 사랑에 기초하고 있다. 그 사랑은 이미 의로워진 성인이 아니라 바로 죄인을 의롭게 한다.

하나님과의 친교는 오직 우리 자신의 죄와 하나님의 무동기적인 사랑에 기초할 뿐이다.

 

두 가지 종교가 있다.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 위에 건설된 종교와 이성과 인간의 행위 위에 건축된 종교이다.

 

우리가 스스로를 죄로부터 구원하여 거룩한 사람들로서 하나님과의 친교에 들어갈 수 있다면, 그리스도는 불필요하다.

 

자기성화에 의해서 하나님에게 가려는 인간의 모든 시도는 그리스도의 자기희생의 메시지에 대적한다.

 

아가페와 에로스 동기 사이의 논쟁점 해결

 

그가 자신의 전심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계명을 더 진지하게 받아들일수록, 하나님을 위한 그의 사랑이 순수하고 이타적이 되도록 하라는 계명을 더 엄격하게 지킬수록 그것은 더욱 더 불가능해진다.

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요구하는 [내적인] 계명은 저주의 법일 수밖에 없다.

 

루터는 수도원 체험에 의해서 가장 강렬하고 내면적인 계명의 형태의 사랑 계명이 가장 포학한 법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은 고뇌하는 양심에게 사실상 악마이다.

최근 한국교회에서 하나님을 지극히 사랑하는 방법으로 찬양과 경배, 열정적인, 사랑이 가득하고 은혜가 넘치는 예배를 강조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것 역시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내면적 율법을 해결하고자 하는 하나의 방법이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계명을 만족시키는가에 대해선 그런 예배를 지향하는 분들이 더 잘 알 것이다. 그럴수록 더 은혜롭고, 더 열정적이고 더 강렬한 예배를 매주, 반복, 되풀이하게 될 것이고, 목마름은 더 커질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에 대한 갈망이 더 커지는 은혜라고 오해할 수 있을지라도.

그러나 구약의 짐승을 드리는 제사가 아무리 많이, 반복, 되풀이해도 우리의 죄를 한톨도 사하지 못하듯이 짐승의 피가 없을 뿐 사실상 똑같은 오늘날의 예배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친밀하게 한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내려오신 하나님의 사랑을 오직 신앙으로 받아들임으로써ㅗ 의롭게 된다.

그러므로 언제나 죄인으로서 하나님 앞에 무익한 종으로 서는 겸손만이 우리를 하나님과의 친교로 이끌 것이다.

또한 내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 힘입어 이웃을 사랑하는 것만이 우리가 하나님의 선한 백성으로 살아가고 있음을 증명할 것이다.

 

성만찬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내려오신 것이다.

성만찬을 우리 쪽에서 하나님께 상승해가려는 시도로 변질시키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고난당하고 수치스러운 취급을 당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가장 위대한 영광이다. 하나님의 영광은 그분이 우리에게 자신의 사랑과 은혜를 베푸신다는 데에 있다.

 

루터는 광신자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이 영광을 도둑질했으며 그들은 그리스도의 사랑과 은총을 거부하고 그분에게 한 특정 장소(하나님 우편 보좌)에만 앉아 있는 영광을 부여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하나님의 영광은 하늘 보좌가 아니라 낮고 천한 이 땅, 십자가 위 고난과 수치의 자리이다.

그리스도인은 하늘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하기보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과 수치를 기억하면서 삶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이웃과 함께 나누는 사랑의 행위를 계속해야 한다.

편안한 교회 의자에 앉아서 많은 수의 성가대(찬양단)의 찬양과 경배에 만족하고 은혜를 누리는 데서 그치면서도 이웃의 어려운 삶에는 고개를 돌리는 현재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예배하고 있다면서 스스로 높이고 있다.

 

십자가 신학

 

루터는 하나님께 올라가려는 모든 상향 시도를 거부한다.

선행의 목적은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이웃에게 이익을 주고 필요를 공급하는 것일 뿐이다.

우리의 행위는 오직 이 지상적 생애와 실존에 속하는 것만 공급하기 때문이다.

 

이성이나 사변으로 하나님게 도달하려는 시도 역시 실패할 뿐이다.

인간이 하나님께 도달할 수 있는 수단이 될만한 길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와 하나님을 화목하게 할 수 있다.

 

신과 인간 사이의 친교가 존재하는 것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아무런 길도 없었던 곳에 스스로 인간에게로 통하는 길을 만드시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한복음 14:6]

 

성육신은 개신교적 구원의 방법을 가장 강력하게 입증하는 증거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찾으려고 할 때 그분은 자신의 비하와 십자가의 방법으로 성육하신 하나님께 우리 눈을 고정시키기를 원하신다.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 차고 넘칠 때 우리가 하나님을 갈망할 때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곳은 하늘 보좌(영광의 자리)가 아니라 십자가(낮고 천하고 수치스럽게 죄인의 모습으로 죽어가는 예수)이다.

 

하나님은 사람으로 하여금 그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라고 명령함에 있어서 어떤 식으로든 인간이 자기 자신을 사랑해야 한다고 명령하진 않았다. 자기 사랑은 사실 부도적한 사랑이기에 파괴되어야 한다.

 

인간은 아담 안에서 악하듯이 그리스도 안에서 선하다.

 

루터는 인간의 의지가 올곧지 않고, 굽어져 있다. 즉 그것은 궁극적으로 자신을 향하여 돌아간다고 여긴다. 류터는 죄는 일차적으로 자기 자신에 대한 이기적인 예속을 의미한다.

죄의 본질은 자기 자신의 것을 추구하는 것이다. 본성적ㅇ니 인간의 삶은 온전히 죄의 영역 아래에 있다.

 

가장 위대하고 가장 칭찬받을 만한 행위조차 죄일 뿐이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인간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되어졌기 때문이다.

 

더 관대해질수록 더욱 더 자기중심적이 된다.

 

인간이 획득하려고 추구할 수 있는 가장 최상의 것, 하나님과의 친교 자체도 인간적인 모든 것에 내재되어 있는 자기중심성에 의해서 오염된다.

 

에로스는 아무리 심령화되고 승화되었다 하더라도 그것의 자기중심적 특성을 간직한다. 그것은 하나님 안에서도 자신의 것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예배 인도자들이 오늘 예배가 은혜스럽다고 느끼면 만족해하고, 은혜가 떨어졌다고 느끼면 머리를 쥐어싸매는 경우를 자주 본다.

하나님의 임재가 있으면 만족하고, 임재가 없으면 애타는 모습이 얼핏 경건해 보일 수 있으나 대체로 그것은 자기만족을 추구하려는 욕망 때문이다.

하나님의 임재조차 자신의 힘(은혜로운 예배를 연출함으로써)으로 만들어내려는 에로스적 열정일 수 있다.

 

루터 신학의 약점?

 

루터는 사랑의 종교를 신앙의 종교로 대체하길 원했다.

일반적으로 사랑에 관한 루터의 처신은 그의 사상의 최대 약점으로 간주되어 왔다.

루터는 자신의 임무에 몰입하여 기독교 윤리를 다소 망각했다.

오직 믿음으로개념을 강조하여 사랑의 행위, 사랑의 기질, 사랑 자체를 자신의 종교로부터 분리했다.

루터는 사랑으로 형성되는 믿음이라는 스콜라주의의 이론에 반대하고 오직 믿음으로만의 칭의를 강조한다.

 

그러나 루터는 사랑이 하나님 그분 자체라고 선언한다.

우리는 신앙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들이다. 그러나 우리는 사랑으로 말미암아 신들이다. 왜냐하면 사랑 안에서 베푸는 것이 하나님의 고유한 본성이기 때문이다.

 

오직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선포하는 것이 사랑 즉 하나님의 사랑을 선포하는 것이다.

 

우리는 칭의론에서 그리스도만을 다루어야 한다. 그리스도는 나의 에로스가 아니라 하나님의 아가페다.

 

루터는 믿음을 강조했지만 그것은 사랑을 도외시해서가 아니었다. 사랑이 오염되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아가페가 인간적, 자기중심적 에로스에 의해 오염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선 사랑을 신앙에서 떼어놓아야 했다.

그러나 우리를 구원하시고 의롭다고 칭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 아가페 때문이다.

그러므로 루터는 하나님의 사랑(아가페) 안에서 우리 그리스도인(성도)는 이미 god이라고 선언했던 것이다.

 

아가페 사랑은 어떻게 건축되는가

 

자연인의 삶과 행위 안에는 자기자신의 것들을 추구하는 특징을 보유하지 않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즉 자기 자신을 추구하지 않고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자연인에겐 불가능하다.

 

인간의 사랑은 죄인들을 기피하고 자기를 위하여 더 고상하고 더 가치 있는 대상을 추구한다.

그런 면에서 하나님은 역설적이게도 가장 고상하고 가치 있는 대상이다.

인간이 자기중심적이라고 하면 대체로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심을 떠올리지만 가난한 자를 돕고, 영적인 생활을 누리고, 하나님을 추구하는 것도 자기중심적인 행위일 수 있다.

그런 것들이 자기 자신을 만족시키고 자신이 삶을 잘 살고 있음을 보증해주기 때문이다.

그것은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을 필요없는 존재로 만들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갈망하고, 추구하고, 선한 일을 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데 궁극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부정하는 것이 되고 마는 것이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를 부정하는 것은 성육신하신 하나님을 부정하는 것이다.

또한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이며 자신의 영적 생활이 자신을 구원하는 것이 되고 마는 것이다.

 

자기중심적이지 않은 사랑은 어떤 것일까?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 사랑이 바로 그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아무 이유없이 무동기적, 자유롭고, 창조적이다.

하나님의 무동기, 자유로운 사랑은 우리를 자기중심적인 사랑에서 벗어나 그 어떤 이기적 동기도 없이 이웃을 사랑할 수 있게 한다.

 

율법은 형벌에 대한 공포와 보상에 대한 욕망에 기초하고 있다.

이 두 가지는 율법의 가장 내밀한 의도를 자유롭고 진지하고 참되게 수행하지 못하도록 방해한다.

그러므로 율법은 우리를 죄로부터 행방할 수 없고, 구원할 수 없고, 영생에 이르게 할 수 없다.

 

아가페는 오직 이웃 그 자체에게로만 향하는 사랑이므로 미래가 없는 사랑이다. 그 어떤 보상이나 대가 없이 그저 베푸는 사랑일 뿐이다.

 

루터는 사랑이 영광의 면류관을 쓴다는 암시를 주는 어던 환상도 용납하지 않는다.

사랑이 자기의 모든 노력들이 특정한 경우에 실패할 운명에 있다는 것을 깨달을 때

기독교적 사랑은 그 본성상 하나의 상실된 사랑이다.

 

아가페는 비록 몇 번이고 자신이 기만당하는 체험을 하더라고 그것 때문에 주저하거나 유보적이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배신을 당하는 것이 사랑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배은망덕함으로 보답하는 자들에게 쏟아부어지는 극도로 상실된 사랑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의 사랑

 

기독교적 사랑의 주체는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과 자기 이웃 사이에 놓여 있다. 그는 신앙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다. 그리고 그는 사랑 안에서 그 하나님의 사랑을 자기 이웃에게 계속 전해준다. 그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의 연장이다. 그가 줄 수 있는 사랑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이다. 기독교적 사랑은 신의 사역을 통해서만 존재한다.

 

그리스도인은 신적이고 천상적인인간이다. 더 이상 단순한 인간이 아니고, 신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게서 인간 안에 계시고 어떤 사람이나 피조물도 해낼 수 없는 일들을 하시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자기 이웃에게 그리스도를 닮은 존재가 되도록 부름받았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소유하는 모든 것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았다. 그래서 그가 사랑 안에서 모든 소유를 자기 이웃에게 전해준다. 그가 나눠줄 수 있는 자기만의 것은 아무것도 없다.

부자 청년에게 소유를 다 팔아 이웃에게 주고 나를 따르라는 말씀은 단지 재산을 파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 재산이 모두 하나님으로부터 왔음을 인정하고 그분의 주권에 순복한다는 차원을 열어준다.

그러나 부자 청년은 그 재산을 자기 재산으로 여겼기에 근심하며 돌아갔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대해서 말할 때 언제나 하나님을 중시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존재한다.

이러한 강박관념은 이웃을 사랑할 대조차 이웃 자체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이웃 안에 계신 하나님에 관심을 가진다.

그래서 원수를 사랑할 수 없다. 그 원수 안에는 하나님이 없기 때문이다.

 

이웃 사랑에서조차 하나님을 의식하는 것은 하나님을 향유하기 위해 이웃을 이용하는 것이 된다.

이웃 사랑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이웃의 요구와 필요를 채우는 것이지 선에 대한 보상을 위해서도 아니고,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증명하기 위해서도 아니다.

 

하나님의 아가페 사랑을 받은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자신이 향유할 선을 발견하는 곳이 아니라 가난하고 궁핍한 자들에게 선을 줄 수 있는 곳에서 자신을 시여한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바로 거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발견하고 사랑한다.

 

하나님의 사랑의 계명은 통째로 이웃 사랑으로 끌어내려진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형상을 벗고 종의 형상을 입으신 이유는 그가 자기(하나님)를 향하는 우리의 사랑을 끌어 내려서 그것을 우리 이웃들을 향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눈과 마음을 돌려서 이웃들을 바라보고 이웃들을 사랑하도록 하신다.

 

우리는 신앙에 의해서 하나님의 자녀이며 사랑에 의하여 실제로 신들이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한복음 13:3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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