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더스 니그렌 <아가페와 에로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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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리뷰

안더스 니그렌 <아가페와 에로스> (2)

by 브린니 2023. 11. 26.

안더스 니그렌 <아가페와 에로스> (2)

 

 

 

아가페

 

인간이 하나님을 사랑할 때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응답이다.

 

인간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의 비동기적 사랑이 그를 압도하여 지배하여서 그가 하나님을 사랑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다.”

 

에로스

 

에로스는 그 이웃을 자신의 상승을 위한 수단으로 이용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그 이웃에게 접근한다.”

 

에로스는 그 직접적 대상에 무관심하다. 에로스는 항상 그 대상에서 이탈하며 그 대상을 디딤돌로 삼아 더 높이 올라가려는 본성을 가지고 있다. 그 대상은 뒤에 남겨져야만 한다. 사랑은 그 대상 안에서 미의 이데아에 참예하는 부분만을 지향한다. 결과적으로 에로스의 대상은 이데아뿐이다. 에로스의 직무는 점차 더 추상적인 대상으로 상승하는 것이다.”

 

“(에로스의) 이웃사랑은 그것이 하나님을 위한다는 생각 속에 항상 또 다른 동기를 가지고 있었다. 이웃은 단지 중간적 대상에 불과한 반면에 궁극적인 대상은 하나님이다. 사랑 받는 대상은 인간 자체가 아니라 인간 안에 있는 하나님이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신적인 존재라는 사상 안에서 이웃 사랑의 자리가 발견된다. 인간이 하나님께 참예하는 범위 내에서 그리고 바로 그 범위 내에서만, 내가 그 인간을 사랑하는 것이 정당화된다. 내 사랑의 참된 대상이 그 구체적인 사람이 아니고 그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이데아 즉 그의 안에 있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뿐 아니라 나의 사랑은 나의 이웃 안에 계신 하나님으로부터 하나님 자신에게 옮겨가기를 추구한다. 이웃에게 사랑을 표현하는 것은 공로적인 행위로 인정되며 하나님께 올라가는 하나의 단계로서 정당화된다.”

 

우리 한국교회가 수많은 구제를 하고 있음에도 사회로부터 비난을 받는 이유를 생각해보자.

그것은 전적으로 우리가 이웃을 이웃 그 자체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사랑의 일환으로 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말하는 것처럼 우리 한국교회는 현재 인간이 하나님께 참예하는 범위 내에서이웃에게 구제한다. 그것은 예배나 제사의 일종으로서 하나님께 올라가고자 하는 공로 행위의 하나로서 실행되고 있다.

 

심지어 사랑의 목적이 다른 데 있다. 우리는 선교 목적으로, 교회를 자랑할 목적으로, 우리 공로를 나타낼 목적으로 구제한다. 이웃을 선교대상자, 전도대상자로 보고 그들에게 미끼를 던지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웃이 그 미끼를 물면 우리와 같은 신자, 구원받아 천국에 갈 형제, 자매가 되는 것이고, 그렇지 않고 미끼를 거부하면 세상 사람, 죽어서 지옥갈 사람이 되는 것이다.

 

우리 한국교회의 이웃사랑은 하나님 사랑의 일환으로 거행되는 제사(예배)나 선교의 하위개념이다. 목적이나 동기는 언제나 하나님께 충성하는 교회의 모습을 드러내 보이는 것이다.

 

선한 사마리아 사람처럼 내 이웃이 누구인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가 강도 만나 죽어가고 있기에 아무런 목적도 동기도 없이 그저 사람으로서 자기가 해야 할 행위를 하는 것이 진짜 이웃사랑인 것이다.

 

예수님이 이웃에 대해 말할 때 이 비유를 든 것은 우리의 이웃사랑이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를 보여준다. 제사장, 레위인 들은 제사를 핑계로 이웃을 돌보지 않았다. 그들은 하나님을 위한 사랑의 일환으로라도 강도 만난 자를 돌봐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행위 즉 제사를 핑계로 이웃을 버렸다.

 

예수는 작은 소자에게 한 것이 자기에게 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의 기본적인 자세라는 것을 분명히 하신 것이다. 이웃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은 (심지어 자기 스스로 그렇게 믿는 것은) 거짓 중에 거짓이다.

 

아가페

 

아가페 사랑은 이웃 자신을 향하며 다른 생각을 품거나 다른 대상을 향하여 곁눈질하지 않는다.”

 

기독교의 이웃사랑은 하나님 때문에 행하는 사랑이다. 하나님은 이웃사랑의 궁극적 대상이나 목적이 아니고 이웃사랑의 항구적인 근거이자 출발점이다. 하나님은 이웃사랑의 목적인이 아니라 동력인이다. 하나님은 스스로 아가페이며 동시에 아가페를 낳는다. 하나님은 사랑받는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사랑하는 주체로서 사랑을 움직이게 한다. 하나님이 아가페이기에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그 사랑에 붙들려 예속된 인간은 이 사랑을 자기의 이웃에게 전달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방법으로 하나님의 사랑이 직접적으로 기독교인의 이웃사랑으로 바뀐다.”

 

되풀이 말하지만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예배(제사)에 매달리는 것은 반쪽짜리 사랑이다. 아가페는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해(사랑의 근원, 출발점), 우리 그리스도인을 통해 이웃으로 자연스럽게 흘러간다. 거기엔 어떤 목적도 동기도 없다. 다만 사랑 그 자체로서 사랑하는 것이다.

 

이웃사랑 없는 하나님 사랑은 가짜이다.

 

에로스

 

에로스는 본질적으로 원칙적으로 자기사랑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도 천상에서의 신과의 결합을 꿈꾸는 것이므로 자기만족을 위한 것이며 이웃을 사랑하는 것도 그 사람을 자기 기쁨의 원천으로 삼는 것이므로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자기 사랑은 항상 고상하고 세련된 심령화된 자기 사랑 즉 이상적인 자아에 대한 사랑을 의도한다.”

 

에로스의 요구는 자기의 욕망과 동경이 만족되는 것이다. 따라서 에로스는 하나님 사랑에 방대한 공간을 할애한다. 왜냐하면 최고선이신 하나님은 에로스의 모든 소원을 만족시키기 때문이다.”

 

이웃사랑은 에로스 전망에는 이질적인 것이다. 에로스 사랑이 인간에게 향하는 경우 그가 한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미의 이데아에 참여하는 하나의 대상으로 간주되어 그 세계에 올라가는 수단으로 이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에로스에는 진짜 이웃사랑이란 없다. 그것은 하나님께로 가는 사다리 역할을 할 뿐이다. 목표에 도달하고 난 뒤 사다리는 더 이상 쓸모가 없어 버려지고 말 테니까 말이다.

 

우리 교회에서도 이런 식으로 가르치고 있다. 성도의 제일가는 책무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이 말이 틀린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하나님 사랑을 외치는 동시에 이웃사랑에는 고개를 돌리며 이웃사랑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에 딸려오는 그 하나의 윤리적 덕목으로 취급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웃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의 본질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사랑을 우리에게 나타내시기 위해 아들 예수를 보내 십자가에서 죽게 하셨다, 그 때문에 우리는 죄에서 완전히 해방되어 구원받은 것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내가 죽기까지 너희를 사랑했으니 너희도 이웃을 위해 죽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대속이 되는 사랑을 하라는 것이다. 우리 교회가 십자가 사랑을 제대로 가르치지 않는다면 진짜 기독교가 아닐 것이다.

 

아가페

 

아가페의 이웃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모든 것을 거저 받았기 때문에 그대로 거저 이웃에게 줄 수 있다.

 

에로스

 

신비주의는 주로 하나님께 올라가려는 인간의 길에 전념한다. 신비주의는 본질적으로 하나님?께 상승함으로써 획득하려는 자기구원이다.”

 

우리는 부흥회나 수련회에 참가해서 은혜를 받으면 하나님을 사랑하고자 하는 욕구로 불타오른다. 이것을 두고 은혜를 받았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 뒤부터 교회에 더욱 열심히 출석하고 성경을 밤낮으로 읽고 언제나 찬양한다. 선교나 전도에 열을 올린다. 그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분명 아름다운 일이며 은혜 입은 사람의 행동이다. 그러나 대개는 이런 열정은 3개월을 넘기지 못할 때가 많다. 물론 이런 열정으로 목회를 시작하거나 해외로 선교로 나가는 경우도 많이 있다.

 

우리가 은혜를 받고 하나님을 사랑하고자 하는 열정에 불타올랐을 때 우리는 성 어거스틴의 길을 따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도 회심한 뒤 죄인의 길을 버리고 하나님의 길을 따랐다.

오 하나님 어떻게 나는 지상으로부터 당신께로 솟구치려는 욕망으로 불타올랐나요?” 이것이 어거스틴의 고백이었다.

 

우리도 은혜를 받고 나서 처음 고백한 말이 이제부터는 하나님 뜻대로 살겠다였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하나님 뜻대로 살겠다는 것, 그것은 모두 내가 무엇인가, 하나님을 위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살겠다는 것이었다. 즉 내가 무엇인가를 하겠다는 자기중심적인 회심이었다는 것이다. 그동안 내가 죄를 향해 있었기에 그 방향을 하나님께로 돌리겠다는 것이다. 즉 그 핵심은 언제나 인 것이다.

 

그 회심의 동기가 에로스적 동기이다. 나의 삶을 좀더 고상하게 바꾸겠다는 식의 방향 전환인 것이다. 죄에서 하나님에 대한 동경, 열정, 사랑으로 바꾸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열망은 오래 가지 못하고, 오래 간다고 한들 그것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위한 것일 못될 뿐더러 자신의 욕망(고상한 삶을 성취하려는)을 이루기 위한 자기만족적인 것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아가페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그저 자기 자신의 완전한 항복을 의미한다. 자신을 하나님에게 맡기는 것 외에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이웃을 사랑하는 것밖에 없다.

 

삭개오가 회개했을 때 그는 하나님을 향해 무언가를 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이 해를 입힌 것이 있다면 갚겠다고 했다. 자신이 죄를 지은 것을 갚고 이웃에게 하나님께 받은 은혜(사랑)을 나누고자 했을 뿐이다. 그때 예수님은 이 집에 구원이 이르렀다고 선포하셨다.

 

모든 율법을 다 지켰으나 뭔가 부족한 것을 느껴 예수님을 찾아온 부자 청년은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느냐고 물었다. 예수님은 한 가지 부족한 것을 말씀하셨다. 그것은 재산을 팔아서 가난한 이웃을 도우라는 것이었다.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이르시되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마가복음 10:21)

 

구원과 영생을 얻으려고 했던, 율법을 모두 잘 지킨 부자 청년은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했다. 그는 율법만 알았고, 그것을 수행하고 그 공로로 구원을 받으려고 했다.

 

예수님은 그에게 하나님께 무엇을 바치라거나 어떤 거룩한 행위를 하라고 요구하지 않으신다. 그저 가난한 자를 도우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언제나 이웃을 위해 선한 일을 하라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사랑, 즉 아가페는 그저 받은 하나님의 사랑을 이웃에게 흘러넘치게 하는 것이다. 그가 물질적으로 축복을 받았다면 그것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여기고 그 사랑을 이웃과 나누어야 한다.

 

하나님은 자기 사랑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보여주셨다. 하나님은 당신이 인간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현시하셨다. 그리고 당신의 사랑을 이웃과 나누라고 말씀하신다.

 

우리가 부모님께 사랑을 입고, 부모님께 효도하려고 하면 부모님은 대개 나는 됐다, 네 자식들에게나 잘 해라하고 말씀하신다.

 

하물며 창조주 하나님께서 우리게 무엇을 요구하실까? 우리가 우리의 부모님께도 효도를 다 할 수 없는데 하나님께 보답하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나님은 자신의 아가페 사랑을 우리도 행하기를 원하신다. 그러나 그 사랑을 하나님이 자신이 아닌 이웃들과 나누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선한 백성으로 살기를 원하신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몸소 행하신 사랑을 이웃에게 행하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을 향한 종교적 열정은 에로스에 가깝다. 천상에서 하나님을 만나고자 하는 열망은 고상하고, 황홀할 수 있지만 예수님의 십자가와는 상관이 없다. 십자가 사랑으로 구원받은 우리의 사랑은 어떠해야 할까?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라면 어떻게 사랑해야 할까?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사람들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를 구원하였고, 영생을 주셨으며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처럼 이웃과 더불어 하나님의 사랑을 나누기를 원하신다. 에수님은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고 말씀하셨다. 제자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사랑하는 자들이다. 우리의 전도와 선교의 목적은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는 것이며 그 제자들이 해야 할 일은 오로지 서로 사랑하는 것뿐이다.

 

― 즉 그리스도인의 제자들은 이웃을 사랑하는 자들이다. 그것이 예수가 이땅에 오신 목적이며 하나님의 사랑의 완성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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