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리뷰' 카테고리의 글 목록 (6 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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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리뷰330

[명시 산책] 이기성 <직업의 세계> 직업의 세계 하녀는 직업일까 하녀는 목을 매달고 싶을까 세계엔 닦아야 할 바닥과 바닥이 있고 넘치도록 그것은 있고 하녀는 몸이 뜨겁고 뚱뚱한 침이 흐르고 고개를 숙이고 외로운, 검은 바닥을 닦는다 겨울이 와도 혁명이 일어나도 저 광활한 바닥의 고독을 아무리 손을 뻗어도 닿지 않는 그곳을 하녀의 내부에는 무엇이 자랄까 오래된 거울처럼 반짝임을 잃은 그곳에서 목을 매달고 싶을까 재처럼 부드러워지고 싶을까 세계엔 닿지 않는 바닥과 또 바닥이 있고 무한히 넓어지고 세상에서 가장 일찍 일어난 하녀가 문을 두드린다 차가운 호의처럼 햇빛이 마구 쏟아지는 아침에 ―이기성 【산책】 세상 아름답고 슬픈 시이다. 아픈 시이다. 차가운 호의처럼 햇빛이 마구 쏟아지는 아침에 하나님은 악인에게도 햇빛과 비를 내려주신다. 그러므로.. 2022. 6. 28.
[명시 산책] 보르헤스 <거울> 거울 나는 거울에 공포를 느꼈네. 살 수 없는, 상들만의 거짓 공간이 다하고 시작하는 침투할 길 없는 거울 면에는 물론, 파문이 일거나, 역상의 새가 이따금씩 환영의 날갯짓을 아로새기는 심연의 하늘 안에 또 다른 푸르름을 모방하는 사색에 잠긴 물 앞에서도, 아련한 대리석과 장미의 순백색을 꿈처럼 답습하는 윤기를 지닌 오묘한 흑단의 고즈넉한 표면 앞에서도, 유전하는 달빛 아래 당혹스런 세월을 숱하게 방랑한 뒤, 오늘 나는 어떤 운명의 장난이 거울에 공포를 느끼게 했는지 묻는다. 금속의 거울들, 응시하고 응시되는 얼굴이 붉은 노을 안개 속에 흐릿해지는 마호가니 가면 거울, 그 옛날 협약의 근원적 집행자들이 잠들지도 않고 숙명처럼, 생식하듯 세계를 복제하는 것을 한없이 바라보고 있네. 거울은 자신의 현란한 거.. 2022. 6. 27.
[명시 산책] 여성민 <슬픔이 오는 쪽> 슬픔이 오는 쪽 프랑크푸르트로 간다 밤은 프랑크푸르트에서 오고 프랑크푸르트의 밤은 푸르다 밤은 오므린 손을 펴듯 온다 너는 슬픔이 오는 쪽으로 눕는다고 말한다 나는 베이징으로 간다 베이징을 지나 장마전선이 북상중이라는 말을 들었다 아침이 오기 전에 새들은 떠났다 쫓겨가는 것은 무엇이나 아름답다 나는 벌써 찬란하다 너의 첫 논문은 재의 도시에 관한 것이었다 나는 룩셈부르크로 간다 하나의 심장이 멈출 때 하나의 별은 태어나지 돌은 하나의 속도 바람은 어제에 속한다 나는 폼페이로 간다 타인들의 타락을 사랑했던 도시 고린도로 간다 등에서는 열 개의 별이 타오르고 허리에선 두 개의 바람이 흩어지지 나는 시카고로 간다 별들은 장외로 날아가 돌아오지 않는다 스타디움 뒤에서 실밥이 선명한 별을 주우며 출루 없는 하루를.. 2022. 6. 26.
[명시 산책] 이제니 <빈 들에 빈 들을 데려오면> 빈 들에 빈 들을 데려오면 빈 들에 빈 들을 데려오면 서서히 겹치면서 사라지는 어제의 빈 들 어제의 빈 들에는 사라진 꽃들이 있고 사라진 꽃들에는 사라진 잎들이 있고 사라진 잎들 속에는 주름들 구름들 먼지들 숨어 있는 벌레들 벌레는 잎으로부터 내려와 찬 바닥에 여리고 어린 배를 끌면서 기어가고 사라진 벌레들 위로는 사라진 눈 코 입 사라진 얼굴들이 떠오르면 따라오는 기억들 막차가 오듯 마차가 도착한다 박자가 끼어들고 마침표의 망설임 그것은 하나의 목소리인데 색으로 말하자면 엷은 살구의 살갗빛 목소리는 말한다 차가운 배에 손을 대어본 것처럼 차가운 비애에 얼굴을 적셔본 것처럼 시간은 다시 돌아올 거라고 결국 후렴구는 아름다워질 거라고 사각으로 다시 펼쳐 일정한 속도를 지켜내면서 선량한 발음들이 줄지어 음표.. 2022. 6. 19.
[명시 산책] 안태운 <풍등> 풍등 안쓰럽다고 생각했어요. 도서관 안으로 새가 들어와 있다면. 들어와 나갈 곳을 찾지 못한 채 퍼덕거린다면. 시간이 흘러 바닥에서 죽은 듯 있다면. 나는 안쓰러워요. 하지만 안쓰러워하는 것과 인간화하는 건 다르다고 생각했습니다. 인간이 아닌 걸 인간이라고 말하지 말아요. 다만 안쓰러워하며 행동할 수는 있다고. 어느 날 나는 새를 통역하는 인간이 되고 싶다고 생각할 뻔하다가 흠칫 놀라서 도서관을 나섰습니다. 두 발로 일어나 나는 다만 하나의 인간이니 교정을 배회하며 미래를 계획했죠. 하지만 미래는 불투명하군요. 미래는 절망적이군요. 이제 미래를 생각하는 건 터무니 없이 지겨워. 나는 내 얼굴을 두 손으로 감쌌습니다. 안쓰러워하던 감정은 멀리 날아가버렸고 나는 하릴없이 불투명한 미래만 바라보는 인간이 되어.. 2022. 6. 14.
[명시 산책] 송승언 <숲 속의 의자> 숲 속의 의자 그 의자는 이제 숲 속에 있다 숲 속에는 생활을 잃은 노인도 숨어든다 아침이면 의자에 앉아 숲의 저편을 본다 저기 보이는 참나무 참나무 그리고 참나무 그 의자는 등받이와 팔걸이도 없어서 노인은 저녁으로 등을 구부린다 비가 오면 숲이 두터워진다 노인은 오두막으로 숨어들고 의자는 그 자리에서 천천히 해체된다 가끔은 숲 속에 톱질 소리가 들린다 노인이 신경질을 부리는 것이다 숲 속에는 노인이 죽어도 무덤도 없고 의자는 흔들리지 않는다 ―송승언 【산책】 전원에 집을 짓고 사는 것과 숲 한복판 오두막에서 사는 것은 얼마나 다를까. 숲은 과연 사람에게 허락된 곳일까. 숲은 삶은 품는 곳일까. 숲으로 들어가면 길을 잃을 수 있다. 헨젤과 그레텔을 비롯한 많은 동화속 주인공들이 길을 잃었다. 숲은 정령들.. 2022. 6. 13.
[명시 산책] 김지녀 <모딜리아니의 화첩> 모딜리아니의 화첩 목이 계속 자란다면 액자의 바깥을 볼 수 있겠지 눈동자가 없어도 밤을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어 웃는 입이 없어 조용해진 세계에서 얼굴과 얼굴과 얼굴의 간격 목이 계속 자란다면 무너질 수 있겠지 붉은 흙더미처럼 나의 얼굴이 긴 목 위에서 빗물에 쓸려 나가네 꼿꼿하게 앉아서 갸우뚱하게 ―김지녀 【산책】 모딜리아니는 이탈리아에서 태어나 프랑스 파리에서 숨졌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프랑스 사람으로 알고 있다. 피카소도 스페인 사람인데 프랑스인이라고 우기는 사람이 많다. 모딜리아니는 심지어 유태인 피가 흐른다. 프랑스 파리는 한때 모든 예술가의 도시였다. 빈센트 반 고흐는 네덜란드 사람이지만 거의 프랑스 화가라고 할 수 있다. 파리는 예술을 매개로 각국의 예술가들을 끌어모아 그들을 프랑스인으로 .. 2022. 6. 12.
[명시 산책] 김유림 <바게트> 바게트 바게트를 먹었네 네가 한 말은 잊고 싶었고 말보로를 피웠네 네가 준 거였지 허물어진 성벽 비슷한 거 옆에 걸터앉아 먹었네 네가 한 말은 잊고 싶었고 너는 여행을 잠시 다녀오겠다고 한 건가 내가 산 건 치즈다 치즈 한 조각을 바게트에 올려서 먹었네 네가 한 말은 잊어가는 중인 것 같고 바다를 본다 초가을에도 수영하는 사람들이 있어 바게트를 먹네 네가 한 말은 잊고 싶었고 너는 여행을 잠시 다녀오겠다고 한 건가 내가 산 건 치즈다 치즈 한 조각을 바게트에 올려서 먹었네 네가 한 말은 잊어가는 중인 것 같고 바다를 본다 초가을에도 수영하는 사람들이 있어 바게트를 먹네 네가 한 말은 잊고 싶었고 여기는 묘지가 아름다웠네 묘비는 제각각이고 네가 한 말을 잊고 싶어서 모르는 남자를 따라갔더니 무덤이었네 나는.. 2022. 6. 10.
[명시 산책] 김소형 <휜> 휜 이 밤, 당신의 연주를 듣고 싶어요 헝클어진 머리칼 우린 사람들을 불렀죠 우린 노래를 불렀죠 당신의 연주를 기억해요 내가 하품을 하면 건반을 두드렸죠 테이블도 없는 카페였어요 국화를 잔뜩 깔아놓고, 아, 그래요 난 그곳에 앉아 있었어요 내 친구, 당신이 치는 피아노엔 창문이 달려 있었던 것 같아요 바람이 불었죠 내 몸은 애드벌룬처럼 떴을지 몰라요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으면 당신의 눈부신 하늘이 보였을 거예요 대리석으로 된 얼굴들이 떨어지고 눈물이 쏟아지고 창문은 열리고 닫히고 반복했지요 하지만 이 밤, 내 친구, 늦은 밤이 왔어요 퀴퀴하고 더러운 몸에서 시수가 흐르고 지옥에 가는 건 어려운 일이에요 당신의 음악이 텅 빈 입과 내 눈에서 빙글 돌고 있어요 ―김소형 * 시수屍水 : 송장이 썩어서 흐르는 물.. 2022. 6.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