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시 산책] 보르헤스 <거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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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리뷰

[명시 산책] 보르헤스 <거울>

by 브린니 2022. 6. 27.

거울

 

 

나는 거울에 공포를 느꼈네.

살 수 없는,

상들만의 거짓 공간이 다하고 시작하는

침투할 길 없는 거울 면에는 물론,

 

파문이 일거나, 역상의 새가 이따금씩

환영의 날갯짓을 아로새기는 심연의 하늘 안에

또 다른 푸르름을 모방하는

사색에 잠긴 물 앞에서도,

 

아련한 대리석과 장미의 순백색을

꿈처럼 답습하는 윤기를 지닌

오묘한 흑단의

고즈넉한 표면 앞에서도,

 

유전하는 달빛 아래

당혹스런 세월을 숱하게 방랑한 뒤, 오늘

나는 어떤 운명의 장난이

거울에 공포를 느끼게 했는지 묻는다.

 

금속의 거울들,

응시하고 응시되는 얼굴이

붉은 노을 안개 속에 흐릿해지는

마호가니 가면 거울,

 

그 옛날 협약의 근원적 집행자들이

잠들지도 않고 숙명처럼,

생식하듯 세계를 복제하는 것을

한없이 바라보고 있네.

 

거울은 자신의 현란한 거미줄에

이 모호하고 덧없는 세계를 연장시키네.

죽지 않은 한 인간의 숨결이

이따금씩 오후에 거울을 흐릿하게 하지.

 

거울이 우리들을 노리고 있네.

네 벽으로 둘러싸인 침실에 거울이 하나 있다면,

나는 이미 혼자가 아니지. 타인이 있는 것이네.

여명에 은밀한 연극을 연출하는 상이.

 

신비스러운 랍비들처럼

거꾸로 책을 읽는 거울의 방에서는

모든 일이 일어나지만

아무것도 기억되지 않네.

 

어느 날 오후 꿈에 등장한 클라우디오 왕은,

한 배우가 무대에서 그의 비열함을

무언극으로 연출한 그날까지

한바탕 꿈인 줄 몰랐네.

 

기묘한 일이지.

꿈이 존재하고 거울이 존재한다는 것은.

상투적이고 마모된 일상에 상들이 획책한

심오한 환영의 세계가 존재하는 것은.

 

(나는 생각하였네)

신은 거울 면의 매끈함으로 빛을,

꿈으로는 어둠을 만드는

온통 불가사의한 건축술에 골몰한다고.

 

인간이 한낱 반영과 미망임을 깨닫도록

신은 꿈으로 수놓은 밤과

갖가지 거울을 창조하였네.

밤과 거울은 그래서 우리를 흠칫하게 하지.

 

 

호르헤 프란시스코 이시도로 루이스 보르헤스(Jorge Francisco Isidoro Luis Borges, 1899. 8. 24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 1986. 6. 14 스위스 제네바)

 

 

산책

 

엘리베이터를 탄 사람들이 오르내리는 시간을 무척 지루하게 느꼈을 때

생산업자들은 묘한 아이디어를 냈다.

즉 엘리베이터에 거울을 다는 것.

 

사람들은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며

혹은

타인의 모습을 보며 지루한 줄 몰랐다.

 

특히 여성들이 거울 앞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것은

거울 앞에 서면 모든 인간은 지루할 틈이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것,

거울을 보며 자신을 가꾸는 것은

정말 흥미롭고, 설레고, 흥분되는 일이다?

 

거울은 자기의 이상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사람들은 거울을 보면서 자신의 모습에 도취된다?

 

그러나 자신의 모습이 비치는 거울 보기를 끔찍하게 싫어하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거울에 공포를 느꼈네.

 

거울을 보기 싫은 이유가 거울이 진짜 자기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일까.

아니면 좌우가 뒤집힌 환영을 보여주기 때문일까.

 

거울에 비친 모습이 진짜가 아니라 진짜의 반영이라는 점에서

거울은 꿈이 되고 밤이 된다.

 

거울에 비친 모습이 꿈의 세계의 어떤 것이라는 점에서

거울은 갖가지 환상을 불러일으킨다.

 

 

거울을 보면 거울 속의 나도 나를 본다.

 

응시하고 응시되는 얼굴이


거울 속의 나를 뭔가 살아 있는 것으로 여긴다면

거울이 나를 보는 것이 얼마나 공포스러운가?

 

그때 거울 속의 나는 내가 아닌 뭔가 다른, 타자처럼 여겨질지도 모른다.

 

내가 아닌데 내가 보는 거울 속에서 나로서 존재하는 타자.

 

나르시스의 거울 속에서 나르시스를 능가하는 나로서 나를 현혹하는 타자.

 

거울이 나를 이상적인 나로

나를 더 매력적인 나로 만드는 것은 어느 정도 사실이다.

 

그렇지 않다면 아무도 거울을 보지 않을 것이다.

 

거울은 단순히 평면의 한 조각일 뿐이다.

그러나 그것은 환상을 불러일으키고

사람을 그 환상 속으로 끌어들인다.

그러므로 꿈과 같은 깊이를 만든다.

 

밤의 깊이.

심연의 깊이.

 

거울은 단면일 뿐이지만 깊이를 지닌 채

사람을 환상의 세계로 인도한다.

 

그 세계는 공포스러울 수도 흥미진진할 수도 있다.

 

 

거울을 보는 이유는 이렇게 자신만의 꿈의 세계를 펼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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