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시 산책] 이기성 <직업의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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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리뷰

[명시 산책] 이기성 <직업의 세계>

by 브린니 2022. 6. 28.

직업의 세계

 

 

하녀는 직업일까

하녀는 목을 매달고 싶을까

 

세계엔 닦아야 할 바닥과 바닥이 있고

넘치도록 그것은 있고

 

하녀는 몸이 뜨겁고 뚱뚱한 침이 흐르고

고개를 숙이고 외로운,

검은 바닥을 닦는다

겨울이 와도

혁명이 일어나도

저 광활한 바닥의 고독을

아무리 손을 뻗어도 닿지 않는 그곳을

 

하녀의 내부에는 무엇이 자랄까

오래된 거울처럼 반짝임을 잃은 그곳에서

목을 매달고 싶을까

재처럼 부드러워지고 싶을까

 

세계엔 닿지 않는

바닥과 또 바닥이 있고

무한히 넓어지고

 

세상에서 가장 일찍 일어난

하녀가 문을 두드린다

차가운 호의처럼 햇빛이

마구 쏟아지는 아침에

 

 

이기성

 

 

 

산책

 

 

세상 아름답고 슬픈 시이다.

아픈 시이다.

 

차가운 호의처럼 햇빛이

마구 쏟아지는 아침에

 

하나님은 악인에게도 햇빛과 비를 내려주신다.

그러므로 하녀에게도 물론 햇빛을 비추신다.

 

그런데 그녀에게 햇빛은 따스함이 아니라 차가운 호의로 느껴진다?

 

새벽 가장 일찍 햇빛을 마주하지만

싸늘한 바람과 공기와 함께 맞이한다.

 

세상의 가장 밑바닥에서 마주 대하는 햇빛이러서 그런가?

 

하녀가 바닥에 서 있다는 것은 진실인가?

 

 

하녀는 참 오래된 직업이며

어쩌면 현대에는 사라진 직업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세상의 바닥을 쓸고 닦는 직업은 여전히 남아 있다.

그렇다고 그 사람들이 바닥에 사는 것은 아닐 것이다.

 

누군가는 바닥을 깨끗이 정리해줄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바닥을 다 닦고 나면 하녀는 어디로 가는가?

 

하녀의 장소는 어디인가?

 

 

존재의 장소,

그 존재의 장소로서의 세상의 바닥

 

그렇다면 바닥은 어디인가?

 

하녀의 내부

 

이곳은 어디일까?

하녀의 마음에는 무엇이 있는가?

 

하녀의 내부에 과연 어떤 소원이 있는가?

 

하녀의 직업은 일시적인 것인가?

아니면 직업이 아니라 신분인가?

 

존재와 신분, 직업으로서 바닥이라는 장소는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삶보다 죽음에 더 가까운 곳일까?

 

그렇지만은 않을 것을 것이다.

 

사람은 언제나 자기가 서 있는 장소가 있다.

그 장소가 설령 바닥일지라도 그의 존재가 바닥 그 자체는 아니다.

 

그의 직업이 무엇이든

그가 있는 장소 어디이든

 

햇빛이 골고루 비취는 것처럼

사람은 그 자체로 존재하는 가치와 의미가 있다.

 

하녀의 바닥이

천상의 하늘일 수도 있고,

하녀의 바닥 역시 지상의 어느 한 장소이다.

그 장소는 어떤 등급을 매길 수 없이

하나의 공간일 뿐이다.

 

하녀에게 다소 호의가 부족한 장소일지라도.

 

 

지금 당신의 직업은?

지금 당신이 서 있는 장소는?

 

그곳이 어디일지라도 당신은 장소와 상관없이 존재할 수 있다.

장소 역시 당신과 상관없이 객관적인 어느 장소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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