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시 산책] 임승유 <과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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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리뷰

[명시 산책] 임승유 <과거>

by 브린니 2022. 6. 30.

과거

 

 

언덕을 오르고 있었다. 내가 언덕을 오르고 있어서 언덕은 내려갈 수 없었다. 고개를 숙일 수 없었다. 몰래 웃을 수도 없었다. 어디 가서 몰래 웃고 오기라도 한 것처럼 언덕을 오르면

 

언덕은 먼저 가서 언덕이 되어 있었다. 기다리고 있었다. 기다리기 싫어서 먼저 안 간 어느 날

 

언덕이 사라지기라도 한 것처럼 눈앞이 캄캄한 적도 있지만 언덕을 보면서 언덕을 오르면

 

언덕은 어디 안 가고 거기 있었다. 한번 언덕이 되면 언덕은 멈출 수 없다. 가다가 멈춘 언덕이라면 언덕은 다 온 것이라고. 잠깐 딴 생각을 하다가 언덕을 잊어버린 언덕처럼 앉아 있으면

 

네가 지나갔다.

 

 

임승유

 

 

산책

 

 

당신은 자신의 과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자신의 과거가 아름다웠는가?

 

아니면

 

슬프고, 안타까움으로 가득 차 있는가?

 

과거는 그저 흘러간 세월만이 아니다.

과거는 바로 오늘에 맞닿아 있는 수많은 어제들이다.

 

오늘의 나를 만든 시간들이다.

그 시간들은 지속된 시간이며 앞으로도 지속될 시간들이다.

 

미래는 지속된다라고 말한 철학자도 있다.

 

시간이란 과거 현재 미래로 나눠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강물이 하나의 흐름으로 계속 흐르듯이 시간도 그러하다.

과거는 어느 시절의 시간의 멈춤도

되돌아갈 수도 없다.

 

과거는 벌써 오늘이 되었고, 내일이며 미래가 될 것이다.

 

 

과거에 어떤 존재였으며 지금은 또 어떠한가.

 

내가 언덕을 오르고 있어서 언덕은 내려갈 수 없었다.

 

언덕을 오르면

 

언덕은 먼저 가서 언덕이 되어 있었다.

 

언덕을 보면서 언덕을 오르면

 

언덕은 어디 안 가고 거기 있었다. 한번 언덕이 되면 언덕은 멈출 수 없다.

 

가다가 멈춘 언덕이라면 언덕은 다 온 것이라고. 언덕을 잊어버린 언덕처럼 앉아 있으면

 

 

언덕은 오르는 동안 내려갈 수 없고,

오르다 보면 언덕은 먼저 가서 언덕이 된다.

언덕은 어디 안 가고 늘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있다.

한 번 언덕이 되면 언덕은 언덕이 아니길 선택할 수 없다.

멈춘 언덕은 다 온 것이며

언덕을 잊고 언덕처럼 앉아 있다.

 

그런데

 

언덕처럼 앉아 있을 때

 

네가 지나갔다.

 

네가 지나간다. 과거의 시간이 과거가 되어 지나간다. 이미 지나간 시간이 지나가는 것을 본다. 언덕처럼 앉아서 그것을 지켜본다.

 

네가 지나갔다.

그것은 과거가 되었다.

 

 

언덕은 어떤 장일까.

너와 내가 함께 시간을 보냈던 곳?

 

아니면

네가 없는 동안 내가 올라가서 멍하니 앉아 있는 장소?

 

너와 함께 했으나 지금은 네가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부재의 장소?

 

아니면 시간이 오르내리는 의미와 기억의 추이를 말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기쁨과 슬픔이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곡선을 말할지도.

 

그 곡선의 흐름이 멈추거나 쉬어가는데

그 사이를 네가 가로질러 지나간다.

 

멍하니 앉아 있는 나를 아랑곳하지 않은 채.

 

 

네가 지나갔다.

 

너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인가.

너는 과거의 어느 시점부터 내게로 와서 나를 지나갔다.

 

너는 이제 완전히 과거가 된 것일까.

네가 과거에서 왔는데 이제야 진짜 과거가 된 것일까.

 

너는 왜 모든 것이 과거이어야만 하는가.

 

왜 너는 지나가는가.

 

너는 왜 멈추지 않는가.

 

이 언덕에 앉지 않는가.

 

나는 언덕을 오르내리는 곡선인데

너는 왜 지나가는 직선인가.

 

언덕길을 횡단하는 너는 나를 지나가서 어디에 멈추는가.

 

 

네가 있던 과거

그러나 과거가 되어버린 너!

 

그래서 과거가 아름다운 것인가.

내가 있던 과거가

네가 없으면 네가 있었으므로.

 

한때 그 시간이 과거가 아닌 적이 있었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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