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시 산책] 이제니 <빈 들에 빈 들을 데려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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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리뷰

[명시 산책] 이제니 <빈 들에 빈 들을 데려오면>

by 브린니 2022. 6. 19.

빈 들에 빈 들을 데려오면

 

 

빈 들에 빈 들을 데려오면

서서히 겹치면서 사라지는 어제의 빈 들

 

어제의 빈 들에는 사라진 꽃들이 있고

사라진 꽃들에는 사라진 잎들이 있고

사라진 잎들 속에는

 

주름들

구름들

먼지들

 

숨어 있는 벌레들

 

벌레는 잎으로부터 내려와

찬 바닥에 여리고 어린 배를 끌면서 기어가고

 

사라진 벌레들 위로는 사라진 눈 코 입

사라진 얼굴들이 떠오르면 따라오는 기억들

 

막차가 오듯 마차가 도착한다

박자가 끼어들고 마침표의 망설임

 

그것은 하나의 목소리인데

색으로 말하자면 엷은 살구의 살갗빛

 

목소리는 말한다

차가운 배에 손을 대어본 것처럼

차가운 비애에 얼굴을 적셔본 것처럼

 

시간은 다시 돌아올 거라고

결국 후렴구는 아름다워질 거라고

 

사각으로 다시 펼쳐 일정한 속도를 지켜내면서

선량한 발음들이 줄지어 음표 위를 흐르고 있기 때문에

 

망각이 망각을 불러온다고 쓰면

온전한 망각은 이제 있을 수 없고

오로지 망각 속의 망각을 오갈 수 있을 뿐으로

 

지옥도와 극락조 사이를 오가듯이

 

벌레는 언제든 어디든 갈 수 있습니다

온 생애를 다해 자신의 몸으로 밀고 가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채로

보이지 않아도 남겨지는 것이 있다는 것을 꽃들 잎들

나무들 구름들 바람들 길고 희미한 흔적들로 남기면서

 

빠른 노래와 느린 노래를 오가듯이

 

하나의 삼각형 속에는 네 개의 삼각형이 들어 있습니다

살구와 살구와 살구와 살구가 들어 있습니다

 

다시 박자가 끼어들고

음표와 음표 사이는 둥근 삼각형으로 넘쳐흐르고

목소리와 목소리는 아리고 아린 발음들로 채워지고

 

말하지 못했던 여운으로 마음으로

꿈결인 듯 꿈결인 듯 마차는 달리고

 

다시 한번 박자가 끼어들고

흰빛에 흰빛을 더하면 더욱더 환해지는 빛

 

빈 들에 빈 들을 데려오면

서서히 사라지면서 나아가는 오늘의 빈 들

 

 

―이제니

 

 

 

 

산책

 

 

가을걷이가 끝난 뒤 빈 들

아니면 그냥 아무것도 심지 않아서 비어 있는 들판

혹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텅 비어 있는 듯한 들

 

비어 있는 널찍한 땅

 

무엇인가 있다가 사라진 장소

물리적이며 공간적인 비어 있음에

무언가 채워지고 있다.

 

그것은 비어 있음 위에 덧입는 사라진 것들.

사라진 것들은 지금 없는 것들이므로

사라지기 이전의 상태

혹은

사라지기 전후의 기억들이 비어 있음에 채워진다.

 

그러니까 빈 들에는 빈 들 이전의 기억들이 빈 들 위에 덮인다.

 

 

어제의 빈 들에는 사라진 꽃들이 있고 사라진 잎들이 있고 주름들, 구름들, 먼지들, 숨어 있는 벌레들이 있다.

 

그리고

 

사라진 눈 코 입과 사라진 얼굴들에 대한 기억들이 따라오고, 막차가 오듯 마차가 도착하고, 박자가 끼어들고, 하나의 목소리가 말한다.

 

시간은 다시 돌아오고, 후렴구는 아름다워진다.”

 

망각이 망각을 불러오고, 망각 속의 망각을 오가며 벌레는 빠른 노래와 느린 노래를 오가듯이 온 생애를 다해 자신의 몸으로 밀고간다.

 

음표와 음표 사이 목소리와 목소리, 말하지 못했던 여운으로 꿈결인 듯 마차는 달리고 흰빛에 흰빛을 더해 환해지는

 

빈 들.

 

 

빈 들인데

너무나 많은 것들이 들어 있다.

 

언어들은 빈 들을 꽉 채운다.

 

빈 들이 너무 버겁다.

 

빈 들 위에 빈 들을 덮으면 이토록 가득 차는 것일까.

 

그냥 빈 들은 텅 빈 상태로 놓아두면 안 될까, 이런 생각을 한다.

 

하지만 언어란 침묵을 견디지 못하는 속성이 있는 것일까.

 

빈 들을 가득 채우는 충만?

 

우리의 머릿속을 빈 들이라고 생각해보자.

 

그 빈 들을 생각들로 언어로 가득 채우면 얼마나 버거울까.

 

때론 생각이라는 빈 들을 텅 비워두면 좋지 않을까.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 무념무상으로 시간을 지나가게 내버려두는 것은 어떨까.

 

지금 잠시 생각을, 기억을, 언어를 꺼두는 것도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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