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리뷰' 카테고리의 글 목록 (7 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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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리뷰330

[명시 산책] 김소형 <ㅅㅜㅍ(숲)> ㅅㅜㅍ (숲) 꿈속이라 믿었던 숲이었습니다 어딜 가나 음악이고 어디서나 음성이던 숲 저는 환한 잠을 따 광주리에 담았습니다 제게 잠을 먹이려는 어수룩한 무리가 있었고 다시 이 세계가 사라지기만을 기다리는 천사들이 있었지요 밤마다 불 피우며 땅속에다 숲을 두고 돌 속에다 숲을 두고 주머니에도 발가락 사이에도 두었습니다 이미 죽은 당신에게 총을 겨누는 병사들과 당신을 묻기 위해 땅을 파는 인부들과 숨겨둔 숲을 찾아 도끼질하는 벌목꾼을 피해 그리하여 숲은 만들어졌습니다 숲을 두고 숲을 두고 그저 당신과 하루만 늙고 싶었습니다 빛이 주검이 되어 가라앉는 숲에서 나만 당신을 울리고 울고 싶었습니다 ―김소형 【산책】 이런 상상을 한 적이 있었다. 숲이 들어 있는 창고. 외딴 곳 허름한 창고가 하나 있다. 창고 문 .. 2022. 6. 8.
아라크네 ; 신과 싸우는 예술가 ― 그리스 신화 읽기 6 신과 싸우는 예술가 ― 아라크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신들은 유치하고, 아량이 없고, 질투가 심하고, 참을성이 없고, 잔혹하고, 매정할 때가 많다. 특히 그리스 올림푸스 신들은 자신들의 명예나 자존심을 건드리는 인간이나 요정들에게 가혹한 징벌을 서슴치 않는다. 자식 자랑을 하는 니오베의 자식들을 모조리 죽여버리는 것이 바로 올림푸스 신들이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재주를 믿고 신에게 도전을 하는 예술가들에게도 아주 가혹한 형벌을 내리곤 했다. 그 주인공들은 아라크네, 마르시아스, 판 등이다. 아라크네를 제외하고 마르시아스나 판은 반 이상은 신적인 존재들이다. 그러나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인물들은 모두 신적인 인물들이고, 역으로 올림푸스 신들은 오히려 인간적인 면모를 보이는 경향이 있다. 인간이라고 해도 대.. 2022. 6. 7.
[명시 산책] 조용미 <정원> 정원 감추지 못하는 변하지 않는 인간의 열정 때문에 시간은 멈추지 못한다 텅 빈 삶을 어찌 사느냐 물었다 이 집요한 마음이 열정임을 이해하기까지 아주 긴 시간이 필요했다 무모함이 자라 견고함이 되었다 꿈에 내가 아는 나는 늘 말이 없다 우리는 다른 이들과 함께 어디론가 가고 있다 한 공간에 있을 뿐 어떤 말도 주고받지 못한다 꽃나무를 사이에 두고 잠시 마주 보았다 사람들은 얼굴이 없고 우리는 손이 없다 삶의 맹목성은 왜 극복되지 않는 걸까 8만 4천의 생각마다 모두 아름답고 향기로워 생은 꽃이 만발한 정원 같았다 눈먼 사람처럼 나는 이 넓은 풀밭을 생을 다해 헤매 다닐 테니 ―조용미 【산책】 아마도 산사의 넓은 정원 혹은 풀밭을 거닐고 있는 것 같다. 거기서는 인생의 시름을 잊고 고요한 시간을 가질 수도.. 2022. 6. 6.
[명시 산책] 홍지호 <고향> 고향 너는 거기 있다 집에 내려가면 어머니가 계시고 마당에는 고양이가 산다 고양이를 보면 왜 아는 사람들을 생각하는지 읽지도 않을 책을 가방에 가득 넣고, 라고 쓰려다 잊지도 않을, 이라고 쓰고 있었네 고양이였다면 상처 주지 않았을까 생각했습니다 기침을 하자 자리로 돌아갑니다 뒷모습과 돌아가는 길을 오래 바라보았지 나는 한 번도 걷지 못할 길이었습니다 고양이를 만졌던 오른손을 바라보며 다음에는 빈손으로 오지 말아야지 다짐했습니다 오른손으로는 오른눈을 비벼도 왼눈이 충혈되고 충혈은 눈물과 무관한 응시였습니다 고양이가 걷는 길을 따라가자 얼굴에 거미줄이 붙는다 인간이 다니지 않는 길이었습니다 당신이 결혼하자 했을 때는 많이 놀랐는데 결혼한다 했을 때는 놀라지 않았습니다 집에 내려가면 어머니가 계시고 마당에는.. 2022. 6. 5.
[명시 산책] 박은정 <윤색> 윤색 어둠이 고향을 따라 내려갑니다 고향은 그립지만 아무도 가려 하지 않는 곳 유리병을 쓰다듬다 던지고 싶어질 때 누군가는 바닥에 떨어진 피를 만집니다 아름답게 표현할 수 있다면 그것이 진실이든 거짓이든 생활은 변하지 않고 검은 사슴의 목덜미에 돋아난 가시가 아파서 바닥만 봅니다 무심히 빛나는 가시들 나는 자주 문장의 행로를 잃어버립니다 누군가 버린 감정에 이름을 붙이는 것이 나의 직업이라면 이름은 무엇인가요 고향처럼 멀고도 먼 화관을 쓴 메아리만 남은 고백이라면 나는 손재주를 부리며 손톱이 다 빠지도록 놉니다 모난 것들을 윤이 나게 매만지면 아픈 것들이 둥글게 둥글게 먼 고향을 바라봅니다 ―박은정 【산책】 고향은 그립지만 아무도 가려 하지 않는 곳 왜? 아무도 가지 않는다고? 설이나 추석 명절이면 귀향.. 2022. 6. 4.
[명시 산책]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달> 달 역사에 등장하네. 실제, 상상, 의혹의 일들이 무수히 교차했던 옛날 옛적, 한 권의 책에 우주를 담으려는 터무니없는 계획을 품은 이가. 거칠 것 없는 기세로 고귀하고 난해한 원고를 곧추세웠지. 그리고 마지막 행을 다듬어 낭송했네. 운 좋게도 뜻을 이룰 뻔했지. 그런데 눈을 들자마자 허공에서 빛을 발하는 원을 보고 얼이 빠졌네. 달을 잊었던 거지. 설령 허구일지라도, 이 이야기는 우리네 삶을 언어로 바꾸는 일을 하는 이들에게는 저주를 연상시키네. 본질은 언제나 상실되는 것. 영감을 지배하는 절대적 법칙이지. 달과의 내 오랜 실랑이에 대한 다음 요약도 피할 수 없을. 나는 달을 어디서 처음 봤는지 모르네. 앞서의 그리스인이 말한 하늘에서였는지, 우물과 무화과나무의 정원으로 기우는 오후에서였는지. 유전하는.. 2022. 6. 3.
[명시 산책] 게오르크 트라클 <봄> 봄 어두운 걸음걸이에 눈밭이 내려앉고, 나무 그늘에서는 연인들이 장밋빛 눈꺼풀을 들어 올린다. 줄곧 선장의 외침에 뒤따르는 별과 밤; 노는 조용히 박자에 맞추어 물에 부딪힌다. 무너진 성벽에서 피어나는 제비꽃들, 그리고 조용히 초록이 피어나는 외로운 자의 옆머리. ―게오르크 트라클 【산책】 6월 1일, 봄이 갔다. 살포시 왔다가 슬그머니 떠났다. 5월엔 곳곳에 장미가 만발했다. 이제 장미는 흔한 꽃이 되었다? 그럼에도 사랑하는 연인들은 장미를 선물한다. 계절의 여왕 5월의 꽃 장미, 꽃의 여왕. ★ 봄은 외로운 자의 옆머리에도 초록이 자라도록 한다. (시에서는 무너진 성벽을 외로운 자의 옆머리로 표현) 봄은 몸은 나른하지만 마음은 따뜻하다. 봄이라는 말은 그 자체로 몸을, 혹은 마음을 공중에 가볍게 뜨게.. 2022. 6. 2.
[명시 산책] 찰스 부코스키 <시간의 바닥> 시간의 바닥 시간의 바닥에 도사린 것은 고부라진 담뱃대 빨간 기차 셋집 바짝 튀겨진 우울. 시간의 바닥에 도사린 것은 당신이 합창하는 노래 다락방의 쥐 빗물이 흐르는 기차 창문 위스키 냄새가 나는 할아버지의 숨 모범수의 덤덤함. 시간의 바닥에 도사린 것은 어리석어진 유명 인사 흰 페인트칠이 벗겨진 교회들 하이에나를 선택한 연인들 퇴화를 깔깔 비웃는 여학생들 자살자의 밤바다. 시간의 바닥에 도사린 것은 마분지 얼굴의 단추 모양 눈 도서관에 빽빽이 도열한 사망한 책들. 시간의 바닥에 도사린 것은 문어 겨드랑이를 면도하다 발광하는 글로리아 패싸움 휴지 없이 갇혀 버린 기차역 화장실 라스베이거스 가는 길에 펑크 난 타이어. 시간의 바닥에 도사린 것은 여자 바텐더가 완벽한 여자이길 바라는 꿈 전무후무한 홈런 문을.. 2022. 6. 1.
[명시 산책] 이영주 <교회에서> 교회에서 ​ ​ ​ 우리가 등밖에 없는 존재라면 온 존재를 쓸어볼 수 있다 우리는 왜 등을 쓸어내리면서 영혼의 앞 같은 것을 상상할까 등을 만지면 불씨가 모여 있는 것처럼 따뜻하다고 생각했어 ​ 너는 의자에 앉아 있다 구부린 채 도형의 마음을 헤아리고 있다 ​ 형식으로는 이해가 가지 않는 일들 때문에 등은 점점 더 깊어진다 ​ 이렇게 하면 붉은 동그라미밖에 남질 않는데 그렇다면 마음의 형식이라는 것이 ​ 네 등에 얼굴을 묻으면서 불처럼 타오르고 무너지는 네 안으로 들어가 흩어지는 영혼 앞부분으로 번져가는데 ​ 우리는 서로를 모르고 알 수가 없어서 함께 불탄 것이겠지 ​ 누군가가 내 등에 기름을 흘린다 몸을 구부리고 눈물을 흘리면 오래 묵은 기름 냄새가 난다 어른은 죽는다는 것이다 죽지 않으면 어른이 될 .. 2022. 5. 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