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시 산책] 찰스 부코스키 <시간의 바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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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리뷰

[명시 산책] 찰스 부코스키 <시간의 바닥>

by 브린니 2022. 6. 1.

시간의 바닥

 

 

시간의 바닥에

도사린 것은

고부라진 담뱃대

빨간 기차

셋집

바짝 튀겨진 우울.

 

시간의 바닥에

도사린 것은

당신이 합창하는 노래

다락방의 쥐

빗물이 흐르는 기차 창문

위스키 냄새가 나는 할아버지의 숨

모범수의 덤덤함.

 

시간의 바닥에

도사린 것은

어리석어진 유명 인사

흰 페인트칠이 벗겨진 교회들

하이에나를 선택한 연인들

퇴화를 깔깔 비웃는 여학생들

자살자의 밤바다.

 

시간의 바닥에

도사린 것은

마분지 얼굴의 단추 모양 눈

도서관에 빽빽이 도열한 사망한 책들.

 

시간의 바닥에

도사린 것은

문어

겨드랑이를 면도하다 발광하는 글로리아

패싸움

휴지 없이 갇혀 버린 기차역 화장실

라스베이거스 가는 길에 펑크 난 타이어.

 

시간의 바닥에

도사린 것은

여자 바텐더가 완벽한 여자이길 바라는 꿈

전무후무한 홈런

문을 열어 놓고 화장실에 앉아 있는 아버지

장렬하고 신속한 죽음

놀이공원 유령의 집에서 벌어진 윤간.

 

시간의 바닥에

도사린 것은

거미줄에 걸린 말벌

말리부로 이주하는 배관공

어머니의 울리지 않는 초인종 같은 죽음

현명한 노인의 부재.

 

시간의 바닥에

도사린 것은

모차르트

시급보다 비싼 형편없는 패스트푸드 식당

화난 여자와 기만당한 남자와 시든 아이들

집고양이

황새치 같은 사랑.

 

시간의 바닥에

도사린 것은

홈런에 환호하는 17,000

텔레비전 코미디언의 뻔한 농담에 웃는 수백만

지긋지긋한 사회복지관 대기 시간

뚱뚱한 미치광이 클레오파트라

무덤 속 베토벤.

 

시간의 바닥에

도사린 것은

파우스트의 지옥형 그리고 성교

여름날 거리를 헤매는 개의 처량한 눈빛

마지막 장례식

다시 추락하는 셀린

상냥한 살인자의 단춧구멍에 꽂힌 카네이션.

 

시간의 바닥에

도사린 것은

젖으로 얼룩진 판타지

지구를 침공하는 우리의 추태

쥐약을 마시는 채터턴

헤밍웨이를 죽였어야 하는 황소

하늘의 여드름 같은 파리.

 

시간의 바닥에

도사린 것은

골방 안의 미친 작가

졸업 파티의 허영

보랏빛 족적이 찍힌 잠수함.

 

시간의 바닥에

도사린 것은

밤에 울부짖는 나무

아무도 찾지 않는 장소

나는 바꿀 수 있다고 믿는 새파란 청년

나는 생존할 수 있다고 믿는 중년

나는 피할 수 있다고 믿는 노년.

 

시간의 바닥에

도사린 것은

새벽 230

그리고 끝에서 두 번째

그러다 끝이 되는 것.

 

찰스 부코스키

 

 

 

산책

 

 

노동자, 걸식자, 노숙자

이런 식으로 살던 찰스 부코스키

 

어쩌면 그의 삶 전체가

시간의 바닥,

장소의 바닥을 훑는 것이 아니었을까.

 

바닥에 떨어진 삶,

밑창을 기어다니는 삶,

 

현재 자기 삶이 인생의 바닥을 치고 있다는 느낌을 느끼는 것과

실제로 바닥에서 사는 것은 과연 얼마나 다를까.

 

시간의 바닥에서 바라다 보는 세상

과연 그 세상에는 무엇이 보일까.

 

아니, 거기서는 무엇을 볼 수 없을까.

 

 

찰스 부코스키는 거기서 이런 것들을 본다.

 

바짝 튀겨진 우울.

 

모범수의 덤덤함.

 

자살자의 밤바다.

 

도서관에 빽빽이 도열한 사망한 책들.

 

휴지 없이 갇혀 버린 기차역 화장실

 

여자 바텐더가 완벽한 여자이길 바라는 꿈

 

어머니의 울리지 않는 초인종 같은 죽음

 

현명한 노인의 부재.

 

모차르트

 

무덤 속 베토벤.

 

헤밍웨이를 죽였어야 하는 황소

 

나는 바꿀 수 있다고 믿는 새파란 청년

 

나는 생존할 수 있다고 믿는 중년

 

나는 피할 수 있다고 믿는 노년.

 

새벽 230

 

 

어쩌면 별로 특이할 것도 없고,

바닥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일 수도 있고,

 

왜 이런 것들이 바닥에 있지? 하고 생각하게 하는 것들도 있다.

 

시간의 바닥에 불길한 것들이 있는 것은 그렇다치고

모차르트와 베토벤 등이 있는 것은 뭘까, 하는 생각도 든다.

 

시간의 바닥이 죽음을 뜻하는 것일까.

시간의 끝이 죽음이라는 것은 쉽게 납득이 가는데

시간의 바닥이라니.

 

시는 상징과 은유의 언어다.

그래서일까.

시간을 공간으로 바꾸는 바닥.

 

바닥이라는 장소는 어디일까.

어떤 장소에서 바닥이라고 하면 맨밑을 뜻한다.

 

그런데 그냥 바닥이라는 것은?

 

바닥은 그냥 존재하지 않는다.

항상 어느 장소의 바닥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장소가 아닌 시간

그 시간의 바닥인 어떤 장소.

 

물질도 공간도 아닌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시간의 바닥.

 

마음의 바닥을 심연이라고 한다.

그러나 심연은 밑바닥을 알 수 없는 뚫린 구멍이라고 한다.

한없이 빨려 들어가기만 할 뿐

바닥에 닿지 않는 장소.

 

시간의 바닥도 그런 게 아닐까.

시간이라는 없는 곳의 바닥.

그 바닥에서 무엇을 볼 수 있는가.

 

인생은 결국 내게 주어진 어떤 시간을 사는 것이다.

그 시간의 바닥에서 보는 것은

실제일까, 아니면 환상, 아니면 그저 어떤 생각?

 

 

어느 시인은 새벽 2시가 어정쩡한 시간이라고 말했다.

잠들기도 깨어있기도 어정쩡한 시간.

 

시간의 바닥은 시간의 끝도 아니고,

그렇다고 시작이나 중간도 아니고,

시간의 단절도 아니다.

 

그저 시간의

어느 시간의

어떤 시간의

인생의 한 지점의 바닥

 

시간이 수평으로 흘러간다고 느낄 때

그 수평의 수직으로서의 바닥.

 

그 바닥은 어두울까.

빛이 들까.

 

이 바닥을 건너면 무엇을 만날까.

 

 

찰스 부코스키의 삶을 통해서 볼 때

이 시간의 바닥은

인생의 밑바닥이나 진창이라기보다는

흘러가는 인생의 시간의 어느 한 순간이 만나는

치명적인 인상일 것이다.

 

거의 죽음에 가까운,

망각할 수 없는 고통의 한 순간.

 

그 순간이 정지했을 때의 느낌,

그것을 그는 장소로 느낀다.

 

바닥이라는 장소.

끝이 아니라 바닥.

 

어쩌면 절대적인,

시간이지만 정지한,

멈춰버린,

그래서 고정된.

 

딱딱한 바닥.

물질적인 시간,

고체화된 시간,

 

이런 바닥의 삶이 계속 진행된다는 것은

고통일까.

 

얼마나?

 

당신의 
시간의 바닥에는 무엇이 도사리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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