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리뷰' 카테고리의 글 목록 (5 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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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리뷰330

[명시 산책] 조용미 <당신의 아름다움> 당신의 아름다움 당신은 늘 빛을 등지고 있다 내가 만든 구도이다 당신의 아름다움은 객관적이어야 한다 당신은 당신 자신을 넘어서야 한다 더불어 당신의 아름다움은 윤리적이어야 한다 당신은 최종적으로 아름다워야 한다 당신의 아름다움은 빈틈없어야 한다 당신의 아름다움은 고독한 사건이 되어야 한다 당신의 아름다움은 나로부터 발생한다 당신의 아름다움은 내게 늘 가장 큰 시련이다 당신 뒤에는 빛이 있다 당신은 빛을 조금 가리고 있다 ―조용미 【산책】 그러므로 당신은 빛을 숨기고 있다. 혹은 감추고 있다. 어쩌면 당신 뒤에 후광이 있는지도 모른다. ◆ 당신 뒤에 빛이 있기에 당신은 어둠 속에 있다. 당신의 아름다움은 빛나지 않는다. ◆ 당신의 아름다움이 나로부터 발생하는 한 당신의 아름다움은 밖으로 나오지 못한다. 당.. 2022. 8. 1.
[명시 산책] 송종규 <트럼펫> 트럼펫 벽장이 열리자 호수가 나왔다 호수가 열리자 느티나무가 나왔다 느티나무가 열리자 소복한 햇살이 나왔다 햇살이 열리자 애드벌룬이 나왔다 그것은 높이 날아올랐다 그것은 최상의 포즈로 솟구쳤다 그것은 불현듯 사뿐히, 내려앉기도 했다 이 공원에서 나는 나를 오독했고 번번이 발을 헛디뎠다 내가 나를 나무랄 틈도 없이 생은 자주 빗나갔다 방이 열리자 벽장이 나왔다 벽장이 열리자 소복한 시간이 나왔다 시계를 열자 햇살과 거대한 느티나무가 나왔다 느티나무를 열자 햇살과 거대한 느티나무가 나왔다 느티나무를 열자 아주 두꺼운 문장이 나왔다 나는 그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경이로운 소리들이 땅 아래 뿌리와, 공중에 뜬 초록 잎사귀들 사이를 오르내렸다 빛들이 후두두둑 떨어져 내렸다 방문을 닫아건다 이제 나는 안전하다 푸른.. 2022. 7. 13.
[명시 산책] 문보영 <지나가는 개가 먹은 두 귀가 본 것> 지나가는 개가 먹은 두 귀가 본 것 거리 한복판이다 사랑하는 사람 S에게 몹쓸 소리를 들은 Z의 두 귀가 땅바닥에 떨어졌다 지나가던 개는, 순간을 놓치지 않고 Z의 두 귀를 주워 먹었다 Z의 두 귀는 Z보다 먼저 죽어 천국에 도착했다 동시에 귀의 몸은 배 속에 남았으므로 Z는 개의 배에서 나는 소리를 평생 들어야 했다 너는 아빠가 누구니? 너무 작아요 정확히 어디에 사시죠? 설탕 단지 좀 건네 달라니까요? 와 같은 타인의 말은 개의 배 속에서 나는 소리로 들렸다 개의 배 속에서 나는 소리를 인간의 언어로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 죽은 귀는 먼저 가서 천국을 둘러보았다 1. 천사들 지우개 가루를 뭉쳐 회색 공을 만들 듯 죽은 이의 심장을 동글게 동글게 굴려 재활용하고 있다 2. 망원경 하나의 독립된 인격체.. 2022. 7. 12.
[명시 산책] 김행숙 <노랫말처럼> 노랫말처럼 말에 음악을 입혔네, 음악에 말을 입혔지 한 몸이 되어 흘렀어 모든 것이 가능해질 것 같았어 노랫말처럼 나는 네게로 흘러갔으면 좋겠어 잠 없이 꿈꾸다가 문득, 짧은 노랫말처럼 내가 멈추는 곳, 그곳은 어딜까 꿈에서 깨면 왜 슬플까 새는 깃털을 어디에 떨어뜨렸는지 모르지 여름날 누구의 부채 속에서 어떤 바람을 만들고 있는지 모르지 흘러갔다 돌아오지 못한 것들이 있었어 나는 내가 다른 곳에 있다고 생각해 나는 내가 다른 곳에서 흘러왔다고 생각해 생각에는 주인이 없지 문을 다 열어놓고 있었지 ―김행숙 【산책】 말에 음악을 입혔네, 음악에 말을 입혔지 시를 노래한다. 시에 곡조를 붙인 것을 가곡이라고 한다. 선구자, 비목, 봉선화, 그리운 금강산 등등. 시에 곡을 입힌 노래는 가곡이든 가요이든 마음을.. 2022. 7. 11.
마르시아스 ; 신과 싸우는 예술가(2) ― 그리스 신화 읽기 7 그리스 신화, 이야기의 시작 유대 이스라엘에서 시작된 유일신 사상은 기독교에 이르러 절정에 달했다. 세상의 신은 오로지 유일하신 하나님 여호와뿐이며 그분이 세상을 창조했으나 인간의 타락으로 죽게 되었고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원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유일신교에 가장 대척이 되는 것이 바로 그리스 신화이며 여러 신들이 인간과 아웅다웅하며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스 신화의 신들은 세상을 창조했다기보다는 세상의 일부이며 인간을 창조했으나(혹은 인간은 자연발생적으로 세상에 나왔다) 그 인간을 사랑하기보다는 경쟁자로 보고 서로 다툰다. 그리스의 신은 유일무이하며 공명정대하며 완벽한 신이 아니다. 그들은 인간보다는 위대하고 능력이 많지만 완벽하지는 않다. 단지 인간을 조금 뛰어넘는.. 2022. 7. 10.
[명시 산책] 황유원 <루마니아 풍습> 루마니아 풍습 루마니아 사람들은 죽기 전 누군가에게 이불과 베개와 담요를 물려준다고 한다 골고루 밴 살냄새로 푹 익어 가는 침구류 단단히 개어 놓고 조금 울다가 그대로 간다는 풍습 죽은 이의 침구류를 물려받은 사람은 팔자에 없던 불면까지 물려받게 된다고 한다 꼭 루마니아 사람이 아니더라도 죽은 이가 꾸다 버리고 간 꿈 냄샐 맡다 보면 너무 커져 버린 이불을, 이내 감당할 수 없는 밤은 오고 이불 속에 불러들일 사람을 찾아 낯선 꿈 언저리를 간절히 떠돌게 된다는 소문 누구나 다 전생을 후생에 물려주고 가는 것이다, 물려줘선 안 될 것까지 그러므로 한 이불을 덮고 자던 이들 중 누군가는 분명 먼저 이불 속에 묻히고 이제는 몇 사람이나 품었을지 모를 거의 사람의 냄새 풍기기 시작한 침구류를 가만히 쓰다듬다가 .. 2022. 7. 10.
[명시 산책] 찰스 부코스키 <지옥은 닫힌 문이다> 지옥은 닫힌 문이다 배를 곯고 살 때도 나는 출판사의 거절 통지에 개의치 않았다. 편집자들이 참 멍청하구나 생각하고는 계속 글을 쓰고 또 썼다. 그래도 그렇게 행동으로 거절해 주니 다행이라 생각했다. 최악은 텅 빈 우편함이었다. 마음이 약해지거나 기대를 한 적이 있었다면 거절한 편집자를 한번 만나 보고 싶은 정도랄까. 남자든 여자든 그 사람의 얼굴 차림새, 방을 건너오는 걸음걸이, 목소리 눈에 담긴 표정을 보고 싶었다…… 딱 한 사람만이라도 딱 한 번만이라도. 알다시피 눈에 보이는 거라고는 나를 변변찮다 말하는 종이 한 장뿐이라면 편집자를 신의 반열에 오른 존재로 생각하기 십상이다. 망할 놈의 예술을 한답시고 배를 곯을 때는 지옥은 닫힌 문이다 가끔 문 열쇠 구멍으로 그 너머가 얼핏 보이는. 젊든 늙었든.. 2022. 7. 2.
[명시 산책] 임승유 <과거> 과거 언덕을 오르고 있었다. 내가 언덕을 오르고 있어서 언덕은 내려갈 수 없었다. 고개를 숙일 수 없었다. 몰래 웃을 수도 없었다. 어디 가서 몰래 웃고 오기라도 한 것처럼 언덕을 오르면 언덕은 먼저 가서 언덕이 되어 있었다. 기다리고 있었다. 기다리기 싫어서 먼저 안 간 어느 날 언덕이 사라지기라도 한 것처럼 눈앞이 캄캄한 적도 있지만 언덕을 보면서 언덕을 오르면 언덕은 어디 안 가고 거기 있었다. 한번 언덕이 되면 언덕은 멈출 수 없다. 가다가 멈춘 언덕이라면 언덕은 다 온 것이라고. 잠깐 딴 생각을 하다가 언덕을 잊어버린 언덕처럼 앉아 있으면 네가 지나갔다. ―임승유 【산책】 당신은 자신의 과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자신의 과거가 아름다웠는가? 아니면 슬프고, 안타까움으로 가득 차 있는가? 과.. 2022. 6. 30.
[명시 산책] 이지아 <라보나 킥> 라보나 킥 스포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기록과 승패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여유 있는 준비와 광고는 시민들을 열광시키고 정신을 빼앗는다 스포츠의 목적은 다수의 건강이 아니며 현실을 망각하는 것 미디어를 통해 휴식을 얻고 싶은 사람은 통신이 고장난 상태를 참을 수 없고, 급기야 상담원은 모델명을 불러달라고 한다 티브이 뒷면 낡은 기호들을 더듬더듬 불러 부속품은 단종되었다고 한다 흑백과 잡음이 섞인 뇌속을 아무리 들춰봐도 응원은 들리지 않으며 경기를 시작한다 불안에는 공이 필요하고 불만에는 선수가 필요하다 밤을 견디려면 스포츠를 잘 봐야 하고 맥주를 마시다 잠이 들고 꿈에서 만난 사람을 현실에서 다시 볼 때 이상한 훈련을 받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끝나면 진짜가 시작되는데 상대가 차가운 시멘트라면 나는 바닥에 얼.. 2022. 6. 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