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시 산책] 송종규 <트럼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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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리뷰

[명시 산책] 송종규 <트럼펫>

by 브린니 2022. 7. 13.

트럼펫

 

 

벽장이 열리자 호수가 나왔다 호수가 열리자 느티나무가 나왔다 느티나무가 열리자 소복한 햇살이 나왔다 햇살이 열리자 애드벌룬이 나왔다 그것은 높이 날아올랐다 그것은 최상의 포즈로 솟구쳤다 그것은 불현듯 사뿐히, 내려앉기도 했다

 

이 공원에서 나는 나를 오독했고 번번이 발을 헛디뎠다 내가 나를 나무랄 틈도 없이 생은 자주 빗나갔다

 

방이 열리자 벽장이 나왔다 벽장이 열리자 소복한 시간이 나왔다 시계를 열자 햇살과 거대한 느티나무가 나왔다 느티나무를 열자 햇살과 거대한 느티나무가 나왔다 느티나무를 열자 아주 두꺼운 문장이 나왔다 나는 그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경이로운 소리들이 땅 아래 뿌리와, 공중에 뜬 초록 잎사귀들 사이를 오르내렸다 빛들이 후두두둑 떨어져 내렸다

 

방문을 닫아건다 이제 나는 안전하다

푸른, 빛들로 가득한 방

 

송종규

 

 

산책

 

이 공원에서 나는 나를 오독했고 번번이 발을 헛디뎠다 내가 나를 나무랄 틈도 없이 생은 자주 빗나갔다

 

어쩌면, 사실, 가장,

잘 알지 못하는 게 아닐까?

 

그래서 내가 나를 읽으면 언제나 잘못 읽을 수밖에 없고,

(가장 좋은 독서는 오독일 수 있고)

내가 나를 잘못 읽으니

번번이 미끄러지거나 헛디디거나 길을 잃는다.

그래서 또 나는 내가 왜 그랬을까, 하고 반성 아닌 후회를 하고.

 

내가 나를 나무랄 시간도 없이 인생은 내가 가고자 하는 방향을 벗어나

목적을, 목표를, 골대를 빗나갔다.

 

생은 늘 알 수 없는 것들로 가득하다.

 

 

트럼펫을 불면 주변의 공기가 흩어져 내린다.

트럼펫을 불면 빛들도 떨어져 내린다.

 

빛과 공기들이 실내에 쌓인다.

오색 찬란한 빛이 공기들 사이 사이에서 영롱하게 빛난다.

 

트럼펫이 내는 소리는 빛이 반짝거리는 듯한 파동을 내면서 공기를 뒤흔든다.

호수 표면에 찰랑거리는 빛처럼

나뭇가지 사이를 뚫고 들어오는 빛처럼

 

빛이 소리를 낸다.

 

 

트럼펫 소리는 아침을 깨우고,

밤과 어둠을 몰아낸다.

 

높고 짙은 목소리로 새벽 공기를 깨트린다.

밝고 경쾌하게 날랜 발걸음으로 아침을 활짝 열어젖힌다.

 

빛들이 후두두둑 떨어져 내렸다

 

악기 소리가 빛과 이토록 잘 어울릴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트럼펫은 빛을 퍼붓는다.

 

트럼펫은 빛의 폭포를 만들어낸다.

 

 

트럼펫은 나를 깨우는 소리를

아침의 소리를

빛의 소리를 낸다.

 

발을 헛디디거나 방향이 틀어졌을 때

트럼펫은 나를 깨우면서 앞으로 전진하게 한다.

 

새로운 날들이 온다.

푸른 빛들로 가득한 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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