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시아스 ; 신과 싸우는 예술가(2) ― 그리스 신화 읽기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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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리뷰

마르시아스 ; 신과 싸우는 예술가(2) ― 그리스 신화 읽기 7

by 브린니 2022. 7. 10.

그리스 신화, 이야기의 시작

 

유대 이스라엘에서 시작된 유일신 사상은 기독교에 이르러 절정에 달했다. 세상의 신은 오로지 유일하신 하나님 여호와뿐이며 그분이 세상을 창조했으나 인간의 타락으로 죽게 되었고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원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유일신교에 가장 대척이 되는 것이 바로 그리스 신화이며 여러 신들이 인간과 아웅다웅하며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스 신화의 신들은 세상을 창조했다기보다는 세상의 일부이며 인간을 창조했으나(혹은 인간은 자연발생적으로 세상에 나왔다) 그 인간을 사랑하기보다는 경쟁자로 보고 서로 다툰다. 그리스의 신은 유일무이하며 공명정대하며 완벽한 신이 아니다. 그들은 인간보다는 위대하고 능력이 많지만 완벽하지는 않다. 단지 인간을 조금 뛰어넘는 슈퍼인간이다.

 

그리스 신들은 각자 자신들이 맡은 영역에서는 독보적이지만 다른 영역에서는 다른 신들의 힘을 빌리거나 협조해야 한다. 신들은 서로 싸우고 동시에 협동하면서 자신들의 목적을 이룬다. 유대교와 기독교의 신이 율법을 강조하고 윤리와 도덕, 정의를 부르짖는 반면에 그리스의 신들은 욕망을 옹호하고, 도덕으로 얽매지 않는다. 그들은 정의를 외치는 동시에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서는 정의 대신 실리를 택한다. 그리스 신들은 매우 자의적으로 법과 정의를 선택해서 사용한다.

 

그들은 매우 인간적인 신들로서 인간들과 경쟁하며 인간들과 어울려 신인들을 만들어낸다. 반신반인들이나 반인반수가 수없이 많다. 신과 요정, 정령들이 셀 수 없다. 인간이었다가 신이 되기도 하고, 신이지만 인간처럼 나약하기도 하다. 신들의 세계엔 여러 등급이 있고, 올림푸스 신들 외에는 탁월한 능력을 지닌 신도 그렇게 많지 않다. 하늘, 태양, , 바람 등을 관장하는 신이 있지만 지배자라기보다는 일종의 마스코트나 아이콘 같은 느낌이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 신화에는 머리가 셋 달린 개나 수없이 많은 뱀을 머리에 달고 있는 여자 등 수없이 많은 괴물들이 나온다. 신이나 영웅들은 이런 괴물들을 물리쳐서 자신의 위치를 확보한다. 인간사에도 이렇게 많은 장애들이 등장하고 인간들은 이런 장애들을 헤쳐나가면서 인생을 살아가야 한다. 그리스 신화에는 곳곳에 괴물들이 나타나 길을 가로막는다. 이것을 극복하는 자는 영웅이 되고, 신의 위치에까지 오르기도 한다.

 

그리스 신화의 최고의 특징은 신과 인간이 완전히 별개의 존재가 아니라 서로 오고 갈 수 있다는 것이다. 신이 인간과 통정을 해서 반신반인을 낳는 것에서부터 신의 아들이 영웅적인 행위를 펼치며 그 영웅적인 인간이 죽어서 불멸의 신이 되는 것까지 신은 인간과 완전히 다른 존재가 아니라 상호침투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이다.

 

이러한 설정을 하고 있기에 인간과 신은 서로 대립하고 싸우고, 서로 욕망하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인간과 신은 전쟁을 하거나 개별적인 힘겨루기를 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애초에 인간은 신을 인간을 능가하는 슈퍼인간으로 인정하고 있다. 힘과 능력으로 절대 싸워서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신들 역시 인간을 한방에 쓸어버릴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지만 인간의 존재를 인정하고 함께 살아간다. 신들은 인간을 욕망하고 인간과 통정해서 자식을 낳기도 하고, 그들을 보호하고 돕는다.

 

그리스 신화에서 중요한 것은 신들이 아닌지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인간이 신을 어떻게 보는가일 것이다. 신화를 만들어낸 것은 신이 아니라 인간이기 때문이다. 인간보다 엄청난 힘을 지녔고, 세상을 좌지우지하는 능력을 소유했으며 인간을 창조했거나 혹은 인간을 다스릴 수 있는 권력을 지닌 신에 대해 인간을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행동을 보이는가이다. 그리스 신화는 궁극적으로 그리스인들이 신을 어떤 존재로 여기며 어떻게 반응하는가에 대한 질문과 일종의 해답인 것이다.

 

어쩌면 신들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그리스인들의 생각이었는지도 모른다. 다만 신이 있다면 그 신에 대해 인간은 어떤 생각과 말과 행동을 하면서 신과 더불어 살아야 하는가의 문제이다. 결국 인간이 어떻게 살 것인가를 신이라는 거울에 비추어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면서 반응하는 것이다. 거울이 없다면 거울을 보면서 자신의 모습을 가다듬을 수 없지만 거울이 있는 이상 그 거울에 자신을 비춰보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하지만 신은 볼 수 없고, 제대로 알 수도 없다. 그렇기에 자신이 상상 정도로만 신을 그리고 그 신이 지금 여기 있다면 어떤 것을 요구할지 미루어 짐작해보는 것이다. 신이 있다는 것을 가정하는 삶과 아예 신이 없다고 여기고 사는 것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신이라는 거울이 없을 때 인간은 자신이 어떤 존재이며 어떻게 살아야 할지 정확한 판단을 하기 어려울 수 있다. 그래서 인간은 신탁에게 인생에 대해 끝없이 질문한다. 어떤 해답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물을 수 있는 대상이 있다는 것이 더 중요한 것인지도 모른다.

 

예컨대 자신의 기술을 자랑하고 뽐내는 아라크네나 마르시아스와 같은 인간이 있을 때 만약 신이 있다면 저들을 어떻게 생각할까, 하고 물어보는 것이다. 그리고 그 해답을 스스로 얻는 것이다. (신탁이나 신의 말과 행동을 통해서.)

 

그리스 신화는 신의 존재나 속성에 대해 말하기보다는 인간 속에 있는 신의 존재나 속성을 더 잘 부각하고 있다. 인간은 그 속에 신을 품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동시에 그 신의 속성 역시 인간 속에 있다. 인간이 지닌 많은 것들은 신의 속성이다. 성경에서는 신이 질투한다고 말한다. 그리스 신화의 신들은 그야말로 질투의 신들이 질투란 인간 속성 중에서도 매우 강렬한 어떤 것이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그리스 신화는 인간성을 말하면서 인간 속에 있는 신들을 이야기한다. 인간 속에 없는 신이란 없는 신과 같다고나 할까.

 

그리스 신화는 끝없는 순환의 역사를 상징한다. 기독교와 같은 창조와 구원, 최종 심판과 같은 직선적인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신과 인간들은 끊임없이 생산하고 성장하고 죽고, 불멸한다. 그리스 신화의 이야기는 지금도 만들어질 수 있다. 주인공들은 집을 떠났다가 숱한 모험을 하고 다시 집으로 돌아온다. 신과 인간은 영웅들을 낳고, 그들은 집을 떠나고 다시 돌아온다. 끝없는 순환이다. 이야기는 시작되지만 끝나지 않고, 원점으로 돌아와 다시 시작된다. 그리스 신화에는 이야기는 있지만 역사는 없고, 신과 영웅, 인가의 역사는 이야기를 만들고, 그 이야기들은 다시 되풀이된다. 완전한 반복이 아니고 수없이 변형되고 여러 갈래로 나눠지면서. 신들의 계보는 단순한 가계의 계보가 아니라 서로 엮이고 갈라지면서 복합적인 계보를 만들어낸다.

 

그리스 신화의 어떤 인물은 어느 계보에 속해 있지만 다른 계보에도 속해 있는 것이 보통이다. 신들의 계보에도 인간의 계보에 있을 수 있다. 많은 영웅들은 신과 인간의 중간계에서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만들어낸다.

 

음악의 신, 아폴론

 

신과 인간들은 서로 경쟁하는데 유독 예술영역에서 그렇다. 예술 중에서도 음악은 신과 인간을 이어주는 가교역할을 한다. 신들을 숭배하는 각종 의식과 축제에서 음악은 빼놓을 수 없는 기능을 담당한다. 술과 함께 음악은 축제의 흥을 돋우는 촉매제 역할을 한다. 노래도 중요하고, 악기를 연주하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

 

 

그리스 신화에서 음악을 관장하는 최고의 신은 아폴론이다. 아폴론은 태양의 신이며 이성의 신이기도 하고, 신탁을 내리는 신이다. 아폴론은 합리성과 절대성의 상징이기도 하다. 디오니소스처럼 감각과 감성과 감정, 술과 쾌락을 관장하는 신과는 대립적인 위치에 있다. 아폴론은 제우스만큼 강렬한 힘을 가지고 있으며 그에 필적할 만한 권력을 지닌 최고의 신이다. 신탁의 신으로서 인간의 운명을 미리 말하고 이를 실현하기도 한다. 또한 아폴론은 리라를 가지고 다니며 음악을 연주하고 그 음악으로 자신과 다른 신들을 기분 좋게 한다. 음악은 다른 신들을 숭배하는 데 사용되기도 하지만 그 자신을 돋보이게 하는 데도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천상의 음악이라는 말처럼 올림푸스 산을 울리는 아폴론의 음악은 그 자체로 숭배의 대상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인간들은 감히 신에게 대적할 수 없다. 그러나 가끔 예술적인 영역에서는 신과 다툰다. 그것은 매우 사소한 것일 수 있지만 신이 지닌 영광을 인간이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자 하는 욕망을 불러 일으키기에 충분하다. 예술은 정치나 경제 등 현실적인 것들과는 달리 그것을 초월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단순히 먹고 사는 문제를 넘어서서 어떤 천상의 것을 소유하고 즐기는 듯한 기분을 선사하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어떤 창조의 영역을 추구하는 것이다. 신을 숭배하고 신을 닮으려고 하는 것이 종교라면 예술은 그 신에게 도달하는 통로 구실을 하는 것인 동시에 신이 지닌 어떤 초월적인 무언가를 스스로 향유하려는 욕망과 같은 것이다. 동굴에 풍요와 사냥을 기원하는 벽화를 그린 것은 신들에게 비는 행위인 동시에 그 그림을 통해 풍요와 사냥 자체를 즐기는 행위이기도 하다. 더욱이 음악은 보다 초이성적이며 보이지 않는 천상의 것을 향유하는 데 적합하다. 신들이 즐기는 음악을 인간이 연주하고 향유하는 것은 그야말로 신의 영역에 곧바로 접근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음악을 잘 연주하며 즐기는 예술가는 마치 신이 된 듯 높아질 수밖에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마르시아스, 아폴론에 도전하다!

 

마르시아스는 숲의 정령 사티로스(혹은 실레노스)의 하나이며 종종 대지의 여신 키벨레의 추종자로 묘사된다. 마르시아스는 사티로스답게 반수반인의 형상에 아울로스(피리의 일종)를 불고 있는 모습으로 신화에 등장한다. 그의 부모는 전설적인 피리의 명인 올림포스 혹은 히아그니스라고도 하고, 오르페우스를 낳은 트라키아의 왕 오이아그로스라고도 한다.

 

 

아울로스는 좌우 두 개의 관으로 이루어진 피리로 열광적이고 관능적인 음색이 특징이며, 디오니소스의 제례 때 주로 쓰였다. 고대의 중요한 악기 중 하나로 꼽히는 아울로스는 마르시아스가 직접 발명하여 불고 다녔다고도 하고, 아테나가 만들었다가 버린 것을 우연히 주워서 불게 되었다고도 한다.

 

아테나 여신은 신들의 연회 때 즉석에서 사슴의 뼈를 깎아서 메두사의 죽음을 애통해하는 고르곤 자매들의 목소리를 모방해서 피리를 만들었다. 이것은 고음과 저음의 두 피리가 서로 화음을 맞추어 지극히 아름다운 음율을 내도록 고안된 것이었다. 크게 만족한 아테나는 이 피리를 아울로스(Aulos)라 불렀다. 아울로스는 탁월하게 아름다운 소리를 냈지만 피리를 부는 아테나의 얼굴은 일그러졌고, 헤라와 아프로디테가 웃음을 터뜨렸다.

속이 상한 아테나 여신은 프리기아로 가서 개울물에 자신의 피리 부는 모습을 비추어보고는 아울로스를 멀리 던져버리면서 누구든 그것을 가져가서 부는 자는 무서운 벌을 받게 될 거라고 경고했다. 그런데 아울로스는 키벨레의 시종으로 요란하게 북을 치고 노래를 부르며 프리기아 숲을 돌아다니던 마르시아스의 눈에 띄었고, 그 뒤로 마르시아스는 늘 그것을 불고 다녔다.

 

마르시아스는 아울로스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리를 낸다고 생각했고, 급기야 음악의 신 아폴론에게 도전장을 내밀기에 이르렀다. 아폴론의 리라 연주와 자신의 아울로스 연주 중 어느 것이 더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지 겨루어보자는 것이었다.

 

아폴론은 마르시아스의 도전을 받아들이며 패배자가 승리자의 어떤 요구도 달게 받아야 한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무사이(뮤즈) 여신들을 심판관으로 연주 시합이 벌어졌다.

 

두 연주자는 모두 혼신의 힘을 기울여 연주를 했지만 우열을 가릴 수 없었다. 아폴론은 마르시아스에게 악기를 거꾸로 들고 연주하자고 제안했다. 리라는 거꾸로 들고도 잘 연주할 수 있지만 아울로스는 그렇지 못했고, 결국 승리는 아폴론에게로 돌아갔다.

 

 

감히 음악의 신에게 도전한 오만의 벌은 가혹했다. 아폴론은 마르시아스를 소나무에 매단 다음 산 채로 가죽을 벗겨버렸다. 마르시아스의 몸에서 흐르는 피는 그의 친구인 다른 사티로스들과 님페들이 흘린 눈물과 함께 강물을 이루었고, 그 강에는 마르시아스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아폴론이 마이안드로스 강에 버린 마르시아스의 피리는 나중에 그리스의 전설적인 아울로스 연주자 사카다스에 의해 시키온에서 발견되어 아폴론 신에게 바쳐졌다.

 

예술, 욕망과 권력의 다른 이름?

 

그러나 아폴론의 제안은 옳지 못했다. 그가 이성과 합리성의 신이지만 그의 제안은 이를 뒤집는 것이었다. 악기는 생긴 모양대로 기능대로 연주해야 한다. 그런데 그는 악기 연주법을 무시하고 이를 뒤집어서 연주한다. 이것은 리라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한 조건이며 이를 통해 아폴론은 큰 이득을 보았다. 승부의 공평성에서 결함을 보이는 것이다. 아폴론은 마르시아스에게 분풀이를 한 뒤 자신의 리라를 부숴버렸다고 한다. 왜일까. 그것은 자신에 대한 또 다른 징벌일 것이다. 자기 스스로 자신의 이미지를 깨뜨린 것이다. 그는 공정하지 못한 게임의 룰을 제시하면서 스스로 지닌 이성과 합리성의 신이라는 상징성을 깨뜨리고 만다. 비록 음악 연주 대결에서 승리했지만 신으로서 자신의 이미지에는 큰 손상을 입은 것이다. 자신에게 도전하는 미천한 마르시아스를 징벌했지만 정작 망가진 것은 자신의 신으로서의 권위인 것이다. 그래서 아폴론은 리라를 망가뜨린다. 그의 영광의 마스코트 중 하나인 리라를 깨뜨림으로써 그는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아폴론은 마르시아스의 오만을 징벌하였음에도 자신의 리라를 부수고 말았을까. 왜 그리스 신화는 신의 부족함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일까. 신이 정당하지 못한 방법으로 자신보다 열등한 존재와의 대결에서 이기고 패배자를 가혹하게 벌하는 것을 어떻게 이해야 할까. 신을 완벽한 존재가 아닌 뭔가를 결여한 존재로 묘사하는 것을 왜일까. 물론 이것은 인간의 결함을 신에게 투사하는 기술 방식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왜 인간의 결함이 마치 신의 결함에서 비롯된 것처럼 이야기하는 것일까. 마르시아스는 자신의 오만함 때문에 벌을 받게 되었지만 이는 아폴론의 농간, 공정하지 못한 대결방식 때문이라고 말함으로써 인간(혹은 열등한 존재) 신과 인간을 동시에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예술의 분야는 승부를 가리기 힘든 요소가 많다. 듣는 사람에 따라 피리 소리를 더 좋아할 수 있고, 어떤 사람은 하프 소리를 더 좋게 들을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을 승자와 패자로 나누는 것 자체가 별로 지혜로운 것이 못 된다. 더욱이 그 악기의 특성을 이용해 대결 방식을 바꾸는 것은 정당하지 못하다.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싸우는 것은 공평한 처사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이 대결에서 진 마르시아스는 가혹한 벌을 받았고, 이겼지만 찜찜한 아폴론은 자신의 악기 리라를 부수고 만다. 아폴론에게 졌다고 판정내릴 존재가 없었기에 아폴론은 자신에게 스스로 판결을 내린다. 어쩌면 이 부분이 그리스 신화의 위대한 점일 수도 있다. 신도 자신의 결함에 대해 안타까워할 수 있다. 이것이 그리스 신화의 인간다운 매력이 아닐까.

 

기독교도였던 단테는 이를 두고 "아폴론이여, 내 가슴 속으로 들어와 마르시아스를 그 사지의 덮개 속에서 벗겨 냈을 때처럼 그대의 영감을 불어 넣어 주소서(신곡 천국 제 119-21)"하고 노래했다.

 

 

아풀론이 마르시아스를 영적으로 다시 태어나게 한 것으로 해석한 것이다. 마르시아스의 재능을 질투하여 그를 파멸시킨 옹졸한 신이 아니라, 기존 껍질을 벗기고 새로운 예술가로서의 경지로 다시 태어나게 도와줬다는 것이다. 매우 상징적인 해석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마르시아스는 그 뒤에 매우 영적인 음악을 연주하는 음악가로 거듭날 수 있었을까. 신화의 이야기가 거기서 끝났기에 결말을 알 수 없다.

 

성경에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천사들의 우두머리였던 루시퍼가 하나님처럼 높임을 받는 존재가 되고 싶어 하다가 반역하는 사건이 나온다. 그는 하나님께 대항하다가 천사에서 악마로 타락하고 만다. 이 사건 역시 군대장관이 반역한 것이 아니라 음악장관이 반역한 것이다. 예술 분야에서는 인간이나 천사나 모두가 자신이 최고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어쩌면 예술이야말로 최고의 권력욕이 작용하는 분야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천상의 음악이라는 말처럼 하늘을 움직이는 힘을 지닌 음악이 하늘을 넘보는 일이 생기는 것은 그처럼 최고의 경지에 오른 음악가의 욕망도 큰 것이라는 반증이 아닐까.

 

이야기 : 자유로운 상상이 빚어내는 모든 것

 

마르시아스의 아울로스에서 보듯이 신을 숭배하는데 사용되는 음악이나 악기가 도리어 신을 능가하려는 욕망의 도구로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을 볼 때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고, 신들은 그것에 대해 징벌한다. 이것을 두고 신의 질투라고 볼 수도 있고, 인간의 욕망에는 반드시 한계가 있어야 한다는 교훈이라고 볼 수도 있다. 아름다운 음악이나 예술이 단지 인간을 풍성하게 만드는데 사용되지 않고, 음악가의 권력욕에 이용당해서는 안 된다는 교훈도 읽을 수 있다. 물론 공정한 대결이 필요하고, 올바른 판정이 중요하다는 것을 일깨우기도 한다.

 

그러나 보다 핵심적인 것은 그리스 신화, 이 스토리가 인간의 삶을 한층 더 풍성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를 통해 인간은 지적으로 감성적으로 인격적으로 풍부하게 성장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욕망을 충족하게 위해 노력할 수 있고, 남을 즐겁게 하기 위해 봉사할 수도 있다. 그러나 어느 한쪽으로 치우친다면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다. 그런데 그리스 신화와 같은 이야기를 통해 인간은 자신의 개성을 충족하는 방식과 남과 더불어 행복하게 살아가는 방법을 터득하게 될 것이다.

 

마르시아스가 단지 인간의 욕망을 상징하고 아폴론이 신의 속성을 대변한다고만 볼 수 없다. 두 가지 모두 인간 속에 있는 여러 속성들 중 하나이고, 이것들이 충돌하면서 만들어내는 이야기 자체가 흥미진진하다는 데 의미가 있다. 어느 것이 옳고 그르다기보다는 어느 것이 더 낫고, 못하다기보다는 이런 이야기들이 인간의 성숙을 촉진한다는 데 있다. 인간에게는 자유롭게 상상하고, 선택하고, 추구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 설령 그 자유가 오류에 빠지거나 심지어 범죄의 가능성이 있다손 치더라고 그 자유는 억압되지 않고 발휘되어야 한다. 그리스 신화는 그리스인들의 욕망과 소원이 자유롭게 펼쳐진 이야기의 장이다. 범과 정의와 도덕과 윤리의 문제가 충돌할지라도 그것 중 어느 하나에 우위를 둘 것이 아니라 자유롭게 펼쳐지는 이야기 속에서, 이야기를 통해 인간은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여유를 얻게 되고, 이를 통해 성숙하게 되어 정의나 윤리와 같은 문제에 대해 스스로 반응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리스 신화는 단지 이야기할 뿐 어떤 결론을 내리지 않고, 열린 결말을 지향한다. 이야기에 대한 해석과 교훈은 스스로 얻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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