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시 산책] 홍지호 <고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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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리뷰

[명시 산책] 홍지호 <고향>

by 브린니 2022. 6. 5.

고향

 

 

너는 거기 있다

 

집에 내려가면 어머니가 계시고

마당에는 고양이가 산다

고양이를 보면 왜 아는 사람들을 생각하는지

 

읽지도 않을 책을 가방에 가득 넣고, 라고 쓰려다

잊지도 않을, 이라고 쓰고 있었네

 

고양이였다면 상처 주지 않았을까 생각했습니다

 

기침을 하자 자리로 돌아갑니다

뒷모습과 돌아가는 길을 오래 바라보았지

나는 한 번도 걷지 못할 길이었습니다

 

고양이를 만졌던 오른손을 바라보며

다음에는 빈손으로

오지 말아야지 다짐했습니다

 

오른손으로는 오른눈을 비벼도

왼눈이 충혈되고

충혈은 눈물과 무관한 응시였습니다

 

고양이가 걷는 길을 따라가자

얼굴에 거미줄이 붙는다

인간이 다니지 않는 길이었습니다

 

당신이 결혼하자 했을 때는 많이 놀랐는데

결혼한다 했을 때는 놀라지 않았습니다

 

집에 내려가면 어머니가 계시고

마당에는 고양이

 

무거운 가방을 메고 오래 걸었습니다

 

다음에는 빈손으로도

오지 말아야지 다짐했습니다

나는 여기에 있습니다

 

홍지호

 

 

산책

 

고향에는 무엇이 있을까.

가족,

친구,

어린 시절 함께 살았던 이웃,

 

그리고 옛 애인?

 

당신이 결혼하자 했을 때는 많이 놀랐는데

결혼한다 했을 때는 놀라지 않았습니다

 

누군가 나를 사랑한다고 했을 때

청혼을 받았을 때

그때 어떤 느낌이었는가.

 

눈물 나려고 하지 않았던가.

 

사랑한다는 말에는 왠지 슬픔이 배어 있는 것 같다.

 

누군가에게 사랑 고백을 받는 날

벅차오르는 감정 때문에

눈에 눈물이 맺혔던 기억이 있지 않는가.

 

혹은

누군가를 열렬히 사랑하기에

마음이 너무나 아파

눈물이 흐른 적은 없는가.

 

고향에는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혹은 사랑했던 사람이.

 

아니면 나를 사랑했던 사람,

사랑했으나

지금은 남의 사람이 된 그 사람이

살고 있다.

 

 

많은 시들이

사랑이나 이별을 노래하는데

주로 내가 당신을 사랑하거나

당신과 이별하거나

당신과의 사랑 때문에 아파하는데

 

이 시는 나를 사랑했으나

다른 사람과 결혼한 사람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런데 고향에 그 사람이 있다.

혹은 고향에 가면 그 사람이 떠오른다.

 

시적 화자는 그 사람을 잊지 못하는 것일까.

 

시인도 그 사람을 사랑했던 것은 아닐까.

그런데 왜 그 사람의 청혼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일까.

아니면 피치 못할 다른 이유라도 있었을까.

 

 

잊지도 않을, 이라고 쓰고 있었네

 

잊지도 못하는 게 아니라

잊지도 않을,

아주 강력한 의지의 표현이다.

 

잊지 않겠다.

누군가를 잊지 않겠다고 다짐할 정도로 뇌리에 완전히 새겨진 이름,

그런 사람이 있는가.

 

원수가 아니라면 정말이지 지독하게 사랑한 사람이 아닐까.

 

고향에 그 사람이 있다?

 

 

다음에는 빈손으로도

오지 말아야지 다짐했습니다

나는 여기에 있습니다

 

고향에 오지 않는 이유가

그 사람이 고향에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 사람과 나는 고향에 함께 있었는데

두 사람 다 고향을 떠난 것 같다.

 

그러다 나는 가끔 고향엘 오는데

올 때마다 그 사람이 생각나고,

결코 잊지 못한다.

아니 결코 잊지 않을 것 같다.

 

그래서 고향에 오면 그 사람이 생각나기에

이제 더는 오지 않으려고 한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인다.

나는 여기에 있다고!

 

나는 지금 고향에 있다고.

고향에 오면 나를 만날 수 있다,

어쩌면 나는 언제나 여기 있을 것이다.

나는 결코 고향을 떠날 수 없을지도 모른다.

 

 

너는 거기 있다

 

거기는 어디일까.

먼 곳일까.

 

아닐 수도 있다.

 

거기가 고향일 수도 있다.

그래서 나는 고향에 간다.

 

여기는 어디일까.

먼 곳일 수도 있고,

시적 화자가 사는 곳일 수도 있고,

여기가 고향일 수도 있다.

 

아니라면

여기와 거기는 특정 장소가 아닐 수도 있다.

 

단지 마음의 거리

가닿을 수 없는, 만날 수 없는

지금은 따로 존재하는 (마음의) 장소일 수도 있다.

 

그러나 내가 여기 있다고 말하는 시인의 감정은 무엇일까.

미련이 남았나?

다시 옛사랑을 회복하고 싶은 걸까.

 

고향을 잊지 못하는 것은

고향에 있는 사람을 잊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고,

고향을 떠났지만 그 사람과 함께 했던 추억을 못 잊는 것일 수도 있다.

물론 고향 그 자체를 잊지 못하고,

떠나지 못해 고향 언저리를 헤맬 수도 있다.

 

고향이 여기라면

거기는 다른 곳이며

거기가 고향이라면

여기는 또 다른 장소이다.

 

그러나 어쩌면 마음은 한결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고향은 사랑하는 마음이 언제나 여기 있음을 말하는

상징이나 은유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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