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라크네 ; 신과 싸우는 예술가 ― 그리스 신화 읽기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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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리뷰

아라크네 ; 신과 싸우는 예술가 ― 그리스 신화 읽기 6

by 브린니 2022. 6. 7.

신과 싸우는 예술가 ― 아라크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신들은 유치하고, 아량이 없고, 질투가 심하고, 참을성이 없고, 잔혹하고, 매정할 때가 많다. 특히 그리스 올림푸스 신들은 자신들의 명예나 자존심을 건드리는 인간이나 요정들에게 가혹한 징벌을 서슴치 않는다. 자식 자랑을 하는 니오베의 자식들을 모조리 죽여버리는 것이 바로 올림푸스 신들이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재주를 믿고 신에게 도전을 하는 예술가들에게도 아주 가혹한 형벌을 내리곤 했다. 그 주인공들은 아라크네, 마르시아스, 판 등이다.

 

아라크네를 제외하고 마르시아스나 판은 반 이상은 신적인 존재들이다. 그러나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인물들은 모두 신적인 인물들이고, 역으로 올림푸스 신들은 오히려 인간적인 면모를 보이는 경향이 있다. 인간이라고 해도 대부분 제우스의 아들이나 딸 아니면 유명한 신들의 계보에 속한다. 그러니까 그리스 신화의 인물들은 반쯤의 신적인 인물들이다그리스 신화는 올림푸스 신들과 신적 존재들, 인간들이 서로 얽히면서 여러 가지 이야기들을 만들어낸다아라크네와 마르시아스, 판 등은 자신이 지닌 예술적 재능을 과대평가한 탓에 신과 대결을 펼쳤다가 거의 죽음에 이르는 형벌을 받은 존재들이다

 

보기에 따라서는 아라크네와 마르시아스, 판 등이 신보다 더 뛰어난 예술가였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은 신과 싸웠고, 안타깝게도 패했다. 사실 패한 것도 그들이 올림푸스의 신들보다 재주가 없어서라기보다는 신들보다 힘이 없어서였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예술대결에서는 이겼지만 권력 대결에서 패했는지도 모른다신과의 싸움은 시작부터 기울어진 경기장에서 펼치는 목숨을 건 전투였으니까 말이다.

 

 

아라크네 Αράχνη() Arachne()

 

아라크네는 리디아 출신 콜로폰의 염색 기술자 이드몬의 딸로 테어났다. 아라크네는 베를 짜는 솜씨가 빼어나 주변에서 명성이 아주 높았다. 숲의 님페까지도 아라크네를 찾아와 그 솜씨에 감탄할 정도였다. 주위의 칭찬이 자자하자 아라크네의 콧대도 점점 높아졌다. 아라크네는 결정적으로 겸손하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의 재능이 베 짜는 여인들의 수호신인 아테나 여신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다고 큰소리치곤 했다. 자신의 천부적 재능은 신이 내려주신 것이 아니라 마치 자기 자신이 개발한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그녀의 교만은 하늘을 찔러 아테나 여신의 귀에 들어가고 말았다.

 

아테나 여신은 노파로 변장하고 아라크네를 찾아가 아테나 여신에게 겸손하게 용서를 구하라고 충고했지만 아라크네는 되려 노파를 꾸짖으며 말했다

 

내가 왜 아테나 여신을 두려워해야 하나요? 아테나 여신이 베 짜는 재능의 신이라면 나와 한 번 겨뤄서 누가 진짜 최고인지 가려보는 게 어떨까요?”

 

 

아라크네는 당돌하게도 아테나 신에게 도전장을 내밀고 만 것이었다. 그러자 아테나 여신은 노파의 모습을 벗고 본연의 모습을 드러냈다. 그 자리에 있던 님페와 리디아의 여인들은 모두 아테나에게 공손하게 고개를 숙이고 겁에 질려 땅에 엎드렸다. 하지만 아라크네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여신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자신의 실력을 굳게 믿고 있는 아라크네는 여신의 등장에도 한치도 물러서고 아테나 여신이 나타난 것이 아주 잘 된 일인양 어깨를 으쓱했다. 아라크네는 자기의 자만심이 자신을 불행의 구덩이로 뛰어들게 했다는 사실을 그때까지는 잘 몰랐다. 그녀는 여전히 인간이 신을 이길 수 있다고 믿었다. 최소한 예술적 재능에서만큼은. 그러나 문제는 그녀의 예술적 재능이 아니라 교만이었다.

 

아테나는 아라크네의 도전을 받아들였다. 아니, 어쩌면 아라크네가 아테나 여신의 도전을 받아들인 것인지도 모른다.

 

아테나 여신은 제우스를 중심으로 높은 왕좌에 근엄하게 앉아있는 올림푸스 12신의 위풍당당한 모습을 수놓았다. 그리고 신에게 도전한 인간은 어떤 벌을 받을지 예상할 수 있는 미세화를 네 귀퉁이에 짜 넣었다.

 

스스로를 제우스와 헤라라고 칭한 대가로 산으로 변해버린 트라키아 왕 하이모스와 그의 아내 로도페, 헤라와의 다툼에서 지고 학이 되어 자신의 백성에게 전쟁을 선포하는 키그마이이족의 여왕, 감히 헤라와 미모를 다투다 황새로 변한 라오메돈의 딸 안티고네, 헤라의 저주를 받아 돌계단으로 변해버린 딸을 부둥켜안고 우는 키니라스의 모습 등 신의 권위에 도전한 인간들의 비참한 최후를 수놓은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올리브 가지로 가장자리를 둘러서 마무리했다. 아테나는 신성을 강조하고 신의 권위에 도전한 인간에게 경고의 메시지를 날렸다.

 

반면 아라크네는 올림푸스 주신들의 애정행각을 화려하게 베틀에 펼쳐 놓았다. 황소, 독수리, 백조, 황금 소나기, , 목자, 뱀으로 변신하여 불륜을 저지르는 제우스, 사나운 황소와 숫양과 말과 돌고래로 변신하여 여성을 겁탈하는 포세이돈, 에리고네를 속이기 위해 포도송이로 변한 디오니소스와 헤라의 눈을 피해 말로 변신하고 오케아노스의 딸 필리라에게 접근한 크로노스 등을 묘사하고 담쟁이덩굴과 꽃들로 가장자리를 마무리했다. 아라크네는 수를 통해 신이 저지르는 몹쓸짓에 대해 고발하고 있었던 것이다

 

 

시합이 끝났을 때 아테나는 물론 질투의 여신 젤로스조차도 아라크네의 훌륭한 솜씨를 부정할 수 없었다. 제아무리 여신이라 해도 도저히 흠잡을 데가 없었던 것이다. 금발의 처녀신 아테나는 경쟁자 아라크네의 탁월한 손재주에 마음이 상했다. 화를 참지 못한 아테나는 신들을 모욕한 불경한 아라크네의 작품을 찢어 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회양목 북을 들고 아라크네의 이마를 서너 번 내리쳤다

 

이드몬의 딸 아라크네는 억울한 마음에 들보에 목을 매고 말았다. 아테나 여신은 불쌍한 생각이 들어 아라크네를 다시 살려냈다. 아테나가 아라크네에게 헤카테의 액즙을 끼얹자 그녀의 몸이 변하기 시작했다. 머리카락도 빠지고 코와 귀도 사라지고 머리는 물론 몸 전체가 작아졌다. 그리고 양쪽 옆구리에 가느다란 손가락들이 자라났다. 그녀는 평생 줄에 매달려 있어야 하는 거미로 변하고 만 것이었다. 어쩌면 목숨을 보존하는 것이 죽음보다 더 가혹할 수도 있다. 거미가 아주 세밀하게 집을 짓는 것도 아라크네의 베를 짜는 솜씨를 유전적으로 이어받아서인지도 모른다.

 

 

 

아라크네는 겸손하지 않았고, 교만하고 대단한 자부심을 갖고 있는 예술가였다. 하지만 그녀의 겸손하지 않은 삶의 태도는 그녀를 죽음으로 몰고 갔다. 많은 사람들의 칭송을 받는 것은 즐거운 일이지만 이에 대한 경계심 없이 오직 칭찬을 즐기기만 한다면 자신의 인생을 망치는 경우도 간혹 있다. 이것은 많은 사람들의 질투와 시샘을 불러오게 되고 예기치 않은 불행을 초래하는 일이 될 수도 있다. 승승장구하다가 한 번의 실수의 인생을 망치는 유명인들을 자주 보곤 한다. 누구나 아라크네처럼 자신의 재능만 믿다가 낭태를 볼 수 있기에 겸손하게 말하고 행동하는 것은 정말 중요하다. 그러나 겸손처럼 어려운 일이 세상에 어디 있을까. 겸손을 겸손하고 말하고 행동하려고 노력한다고 해서 되는 일이 아니다. 겸손은 자신의 인성의 한가운데 유전자처럼 박혀 있어야 하는 자질이다. 어릴 때부터 자신의 인격의 중요한 부분으로 자리잡고 있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재능있는 사람들이 자신의 재능을 자랑 좀 한다고 해서 뭐라고 할 필요가 있을까. 사실 자신이 잘났다고 생각하고 사는 것이 인간 아닌가. 하지만 프리미어리그에서 득점왕을 차지한 손흥민 선수가 그의 겸손한 인성 때문에 더욱 빛이 난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천재에게 겸손을 요구해서는 안 되지만 겸손한 천재가 있다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아라크네가 죽음과도 같은 형벌을 받은 것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그것은 그녀가 최초의 페미니스트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아라크네는 자신의 수에 신들의 몹쓸 행위들을 그려놓았다. 신들이 자신의 욕망을 인간이나 신이 아닌 하급 생물들에게 실현하는 거의 폭력적인 행위들을 고발한 것이다. 지금의 미투운동과 같다.

 

올림푸스 신 가운데 하나였던 아테나는 신들을 모욕하는 아라크네를 두고 볼 수 없었다. 신들의 행위는 정의롭지 않다거나 윤리적으로 옳지 않다고 해서 비난해서 안 되는 것이었다. 그것은 오직 신들의 특권이며 신들의 권력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라크네는 그런 신들의 행위는 가감 없이 표현하고 비판하면서 예술을 통해 조롱했던 것이다. 이것이 신들에게는 도전이었고, 죽을 이유였다. 아라크네는 자신의 교만과 거침없는 비판 때문에 거미로 변하고 말았다.

 

어쨌든 아라크네의 베 짜는 솜씨는 인간에게 베 짜는 재능을 부여하는 여신의 능력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하지만 신보다 더 신과 같은 능력은 인간을 행복하게 만들지 못하는 모양이다. 이것은 신들을 두려움에 떨게 하기 때문이다. 신의 노여움이란 두려움의 표현일 수도 있으니까.

 

아테나 여신의 분노 때문에 아라크네의 창조적인 예술 능력은 사라지고 그녀는 그저 단순한 모양의 실을 잣는 거미로 변신하고 만 것이다. 인간이 벌레로 변하는 이런 변신 모티프는 이후 카프카의 <변신>과 같은 작품에서도 나타나는데 주인공 그레고리 잠자 역시 아무런 이유 없이 벌레로 변하고 만다. 혹시 그레고리 잠자도 신에게 도전하다가 형벌을 받은 것은 아닐까. 과연 그레고리 잠자는 무슨 죄를 범했을까. 

 

 

카프카의 <심판(소송)>에서도 아무런 죄없이 죽는 주인공의 모습이 나오는데 알 수 없는 죄 때문에 죽는 것은 어쩌면 인간의 원죄를 상징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원죄란 인간 개인이 직접 지은 죄가 아니기 때문에 왜 원죄 때문에 죽어야 하는지 많은 사람들이 의아해하는 것도 사실이다. 원죄란 사실 누군가 지은 죄가 나에게도 연좌제처럼 적용되어 나도 그 원죄 때문에 벌을 받는 것이 아니다. 원죄란 죄를 지을 가능성이 인간에게 본능적으로 존재하고 죄를 지을 수 있는 상황에서 죄를 짓지 않고 그 죄를 이겨낼 때 진정한 인간성을 획득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하지만 인간이 원죄를 갖는 이상 죄의 유혹으로부터 달아날 수 있는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고, 대체로 죄에 굴복하는 경향을 보인다. 기독교에서는 인간이 짓는 모든 죄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구원자가 대신 속량하기 때문에 인간은 자신의 죄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리스 신화에는 인간에게 그 어떤 구원자도 존재하지 않기에 인간이 신의 형벌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가능성은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아라크네는 목숨을 보존했지만 그녀의 삶은 인간이 아닌 거미로서 줄을 뿜어 자신의 집을 짓는 일을 반복할 뿐이었다. 그리고 그 거미줄에 걸린 희생자들을 포식하는 데 일생을 보내고 만다. 예술가에서 한낱 벌레 포식자로 전락한 것이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신들은 왜 인간에게 무자비한 형벌을 내리는 것일까. 자신의 재능을 뽐내고 겸손하지 못한 게 그렇게 죽을 만한 죄인가. 이런 의구심이 많이 들 것이다. 그러나 신화란 어떤 종교의 경전도 신 자체를 설명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저 어떤 신적인 것에 대한 인간의 동경과 두려움과 불안, 그리고 인간을 능가하는 슈퍼울트라 존재에 대한 경이를 표현한 흥미로운 이야기인 것이다. 그래서 신화라기보다는 전설에 더 가깝다. 신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고 해서 신의 속성을 말해주는 것도 아니다. 다만 어떤 신적인 존재가 인간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신과 인간이 함께 살아가면서 어떤 일들이 벌어질 수 있는지에 대한 인간의 생각을 글로 표현한 것이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신들을 자신을 능가하는 존재로 여기며 그들을 숭배했다. 농사를 짓는 부류는 농사의 신을, 사냥을 하는 부류는 사냥의 신을, 예술가들은 예술의 신을 추앙했다. 그러나 신이 농부보다 더 농사를 잘 짓거나 신이 사냥꾼보다 사냥을 더 잘하거나 예술가보다 예술의 신이 더 솜씨가 뛰어났던 것만은 아닐 것이다. 오르페우스만 보더라도 신보다 더 뛰어난 음악을 연주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하지만 신에게 도전하고, 신을 업신여겨서는 안 될 것이다. 소위 선을 넘는 일은 인간에게 허락되지 않았다. 인간은 자신의 한계를 알고 겸손해야만 했다. 인간은 홀로 존재하지 않고, 무리를 이루며 산다. 인간은 어느 한 분야에서 특출날 수 있지만 모든 영역에서 완벽할 수 없다. 묵묵히 자신의 영역에서 최고가 되는 일은 정말 중요하지만 그렇다고해서 그것이 그를 신과 같은 완벽한 존재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현대에서도 야구의 신, 축구의 신 등으로 불리는 사람들이 있다. 야신, 축신도, 신보다 더 뛰어나다고 자신을 스스로 추앙할 수는 없다. 그래서 겸손은 늘 최고라고 불리는 사람들에게 요구되는 필수 덕목인지도 모른다.

 

얼마전 손흥민은 브라질 축구선수 네이마르를 향해 네이마르는 세계 최고 선수지만 자신은 최고가 되기 위해 발전해 나가는 과정에 있을 뿐이라고 말했다. 그 직후 네이마르와 손흥민은 SNS 맞팔을 하는 등 급속하게 가까워졌다. 세계 최고가 서로를 인정할 때 친구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상호존중은 인간관계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덕목이라고 할 수 있다. 

 

아라크네도 저의 능력은 베 짜는 능력을 주신 아테나 신 때문에 비롯된 것이라고 겸손하게 한 마디만 했더라면 화를 면했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그러나 한편으로 최고의 예술가에게 신이 넓은 아량으로 그의 재능을 칭찬하고 북돋아주었더라면 아라크네도 신 앞에서 더욱 겸손한 자세로 임했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아라크네와 같은 재능있는 예술가가 인간세계에서 사라진 것은 정말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도 있다. 오늘날에도 재능있는 젊은이들이 기성세대의 벽에 막혀 꿈을 펼치지 못하는 일이 자주 일어난다. 그런 면에서 아라크네 전설은 여러 가지 생각해볼 문제를 던져주고 있다.

 

 

 

그리스 신화는 신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지만 신의 인간에 대한 사랑이나 구원 등을 말하지 않는다. 그리스 신들은 매우 인간화되어 있고, 인간보다 우월하지만 신적인 완벽함을 갖고 있지 않다. 인간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지도 않는다. 그렇다고 엄청나게 두려운 존재도 아니며 인간과 멀리 떨어지지 않고, 가까이에 존재한다. 인간은 신을 친숙하게 여기며 함께 산다. 인간과 신이 사이가 좋은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멀리하지도 않는다. 신은 인간과 경쟁하고 질투하고 싸우고 죽이기도 하지만 인간의 아름다움과 뛰어난 능력을 부러워하고 욕망한다. 인간의 신의 특별한 능력을 추앙하고, 동경하지만 대신 신의 정의롭지 못하고, 윤리적이지 않은 행동을 비판하고 조롱한다. 이렇게 신화는 흥미진진하고 드라마틱한 이야기들을 들려주면서 인간의 삶을 윤택하게 만들었다. 그것이 그리스 신화가 지금까지 사랑받는 이유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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