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린니의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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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 시] 공원에서 공원에서 오후 3시 유월의 태양이 만만치 않다 아파트 단지 중앙공원의 분수는 아직 터지지 않았다 새싹정류장에 아이들이 오려면 시간이 좀 남았다 뭔가를 기다리는 몇 분에서 한 시간 초조와 불안과 기대가 뒤섞이며 일곱 가지 감정이 공존하는 시간 그 시간의 틈 사이에 야쿠르트 아줌마가 앉아 있다 전동카트를 앞에 두고 휴대전화를 켜놓고 눈을 내려 뜨고 있다 지나가는 사람들 많다면 많고 적다면 적은데 아줌마를 바라보는 사람도 많다면 적다 사는 것은 지난하다 알아채지 못했을지라도 40년 동안 동네 곳곳을 그녀들이 지나갔다 사는 것은 배고픔의 경제다 퍽 오래 살아도 사는 것에 면역이 생기지 않는다 노인들은 바이러스 때문에 밖을 나설 수 없다 닭을 서른 마리만 고아 먹으면 살 수 있을 텐데, 라고 말한 사람은 스물 아.. 2020. 6. 28.
이브 본느프와 <참다운 이름> 참다운 이름 나는 이름 붙일 것이다, 그대가 있었던 그 성城을 사막이라고 그 목소리를 밤이라고, 그대의 얼굴을 부재不在라고, 그리고 그대가 불모의 땅에 쓰러지게 될 때 나는 이름 붙일 것이다, 그대를 데려간 번갯불을 허무라고 죽음은 그대가 사랑했던 나라. 그러나 나는 간다, 영원히 그대의 어두운 길을 통해서. 나는 부순다, 그대의 욕망, 그대의 형태, 그대의 기억을 나는 연민의 정을 품지 않는 그대의 적敵. 나는 그대를 싸움이라고 이름 붙일 것이다, 나는 그대에 대해서 싸움의 자유를 가질 것이다, 또한 나는 가질 것이다, 내 손에 그대의 어두운 꿰뚫어진 얼굴을, 내 마음 속에 천둥치는 비바람 훤히 비치는 그런 나라를. ―이브 본느프와(프랑스, 1923-2016) 【산책】 내 마음대로 누군가의 이름을 바꿔.. 2020. 6. 28.
[창작 시] 자연에게 돌려주다 자연에게 돌려주다 바르셀로나 교향악단이 올해 첫 연주회를 열었네 코로나 바이러스 팬데믹 이후 처음이라네 객석을 가득 메운 것은 사람이 아니라 식물들이었네 객석마다 식물들이 여유롭게 앉아서 모짜르트와 하이든을 들었네 교향곡을 마시고 흠뻑 젖은 식물들은 바이러스와 싸우는 사람들에게, 의료진과 병원으로 실려나갔네 스위스 알프스 산 꼭대기에서 6명의 익스트림 예술가들이 짜릿한 공연을 벌였네 지미집에 달린 휠 사이를 걷고 산봉오리 사이에 걸린 줄 위에서 자전거를 타고 폴댄스를 추고 사람은 아무도 없었네 신기한 공연은 산이 보았네 대자연이 보았네 인간은 자연에서 받기만 했는데 이제 뭔가 돌려주려 하네 사람이 만들어낸 가장 고귀한 것, 예술을! 2020. 6. 27.
예브게니 알렉산드로비치 예프뚜셴꼬 <나는 위조지폐라도 찍어낼 테다> 나는 위조지폐라도 찍어낼 테다 어린아이인 나에게서 순진함을 털어 내버리며, 그들은 내 당근스프 위에 바퀴벌레와 함께 지혜를 뿌려 놓았다. 덧대어 기운 내 셔츠 그 봉합선 속에 꿰매어진 벼룩들이 작은 소리로 지혜를 속삭여 주었다. 그러나 가난이 지혜는 아니며 돈 또한 지혜는 아니다. 그들이 텅 빈 내 위장을 강타한 뒤로 나는 발작적으로 움직이며, 조금씩, 어쭙잖게 성인이 되어 갔다. 나는 나이프들의 과장된 은어를 사용했다. 나는 누군가가 내버린 담배꽁초에서 싸늘한 타액의 연기를 피워 마셨다. 나는 내장을 통해 전쟁의 굶주림을 터득했다. 내 늑골들이 나에게 러시아의 지형을 가르쳐 주었다. 흔히 말하는 명성을, 아무도 나에게 주질 않았다. 병아리 목 잡아채듯 나 혼자서 그렇게 움켜잡았다. 전시의 기차역처럼 비.. 2020. 6. 27.
한강 <서시> 서시 어느 날 운명이 찾아와 나에게 말을 붙이고 내가 네 운명이란다. 그동안 내가 마음에 들었니, 라고 묻는다면 나는 조용히 그를 끌어안고 오래 있을 거야. 눈물을 흘리게 될지, 마음이 한없이 고요해져 이제는 아무것도 더 필요하지 않다고 느끼게 될지는 잘 모르겠어. 당신, 가끔 당신을 느낀 적이 있었어, 라고 말하게 될까. 당신을 느끼지 못할 때에도 당신과 언제나 함께였다는 것을 알겠어, 라고. 아니, 말은 필요하지 않을 거야. 당신은 내가 말하지 않아도 모두 알고 있을 테니까. 내가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을 후회했는지 무엇을 돌이키려 헛되이 애쓰고 끝없이 집착했는지 매달리며 눈먼 걸인처럼 어루만지며 때로는 당신을 등지려고도 했는지 그러니까 당신이 어느 날 찾아와 마침내 얼굴을 보여줄 때 그 윤곽의 사이 .. 2020. 6. 27.
가라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 *평신도 성경 묵상은 평신도에 의한 평신도를 위한 묵상입니다. 화석화된 동어 반복의 신학적 용어들은 때때로 우리 삶의 부조리한 고통을 위로하지 못한다고 느낄 때가 있습니다. 보다 피부에 와 닿는 실제적인 깨달음과 설명이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 나눔을 하기 원합니다. 예수께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한 백부장이 나아와 간구하여 이르되 주여 내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워하나이다 이르시되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 백부장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사옵나이다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에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예수께서.. 2020. 6. 26.
보리스 빠스제르나끄 <가을> 가을 내 집 식구들 각기 떠나보내고, 가까운 사람들 모두 오랫동안 흩어져 있으니, 가슴과 자연 속의 모든 것은 일상의 고독으로 가득 차 있다. 그리고 이제 여기 오두막집엔 당신과 나 숲속에선 인적이 드물어 사막인 양하고 옛 노래에 있듯이 샛길과 조그마한 행길은 반쯤 잡초로 무성하였다. 이제 수목으로 덮인 벽들이 슬픔에 잠긴 우리 둘만을 바라보고 있다. 우리는 뛰어넘지 못할 운명의 장벽, 우리는 공공연히 파멸해 가리라. 우리는 한 시에 자리에 앉아 세 시면 일어나고, 나는 책을 읽고 당신은 수를 놓는다. 새벽 무렵엔 우리가 언제 키스를 그만둔 지 알아채지 못하리라. 좀더 멋지게 분방하게 나뭇잎이며, 소란피워라, 흩날려라. 그리하여 어제의 고배苦杯의 잔에 오늘의 우울이 넘치게 하라 애착, 동경, 매력이여! .. 2020. 6. 26.
[창작 시] 6月 6月 나비의 날개 반으로 접혀 떨어지고 8개 꽃잎 하나씩 떨어지는데 바람은 나무 위에서 겁을 내며 내려오지 않네 새들은 무중력에 머물며 정지, 허공에 집을 짓네 불구의 날개로 나비들이 꽃을 찾는데 한때 8개의 꽃잎을 지닌 파란 꽃은 꽃대만으로 자존심을 세우네 6월의 늦은 밤, 나무들 가지를 축 늘어뜨리고 죽은 꽃잎들 사이 나비의 시체를 쓸어담고 있네 떠났던 전염병이 다시 돌고 사람들 몇몇 날씨를 이야기하며 걷다 섰다 하네 중년 여성은 손전화를 받더니 급히 길을 건너네 사람들 계속 서성이네 2020. 6. 26.
이민하 <체육 입문> 체육 입문 한 사람이 공놀이를 한다 공은 공중을 돌아 이마를 타고 흘러내린다 공이 바닥에 닿기 전에 발은 움직인다 다시 머리 위로 솟구칠 때 구부러진 발등과 이마는 키스처럼 가깝고 두 사람이 공놀이를 한다 공은 두 손에서 뻗어 가슴을 향해 파고든다 공중에 떠 있는 눈은 온몸을 잡아당기고 공을 떨어뜨리지 않으려고 두 사람은 점점 멀어진다 공이 덤불에 처박혀 달걀처럼 깨질 때 공을 주우러 간 그림자는 기차처럼 길고 두 손을 털고 사람들이 떠난 길 위에 수만 갈래 힘줄을 뻗는 공은 지구보다 넓고 하늘이 한 뼘 더 두꺼워진 다음 날 낯선 공이 떠도는 공터에 모여 세 사람이 공놀이를 한다 공은 공중으로 솟구쳐 공중으로 나아간다 바닥에 떨어지지 않으려고 방향을 잡고 공은 새가 된다 한 사람에게 날아가지만 세 사람의.. 2020. 6. 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