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린니의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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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 시] 장마의 시작 장마의 시작 아내에겐 일진이 사나운 날이었다 아침부터 아들 녀석과 싸우고 오후엔 변기가 막혀 버렸다 아들 녀석은 집에서 빈둥거리며 돈만 축내고 먼 도시에 사는 애인을 보겠다고 집을 나갔다 언제 깨질지 모르는 연애에 내 돈을 투자할 생각은 없어 연애하고 싶으면 네가 벌어서 해 아내가 악다구니를 쓴다 아들은 희희낙낙 외출을 하고 비가 온다 장마인지 홍수인지 거세게 내린다 먼 도시에도 스무살 연인에게도 이 집구석에도 장마의 세찬 물줄기처럼 변기도 뻥 뚫렸으면 아내의 마음도 시원하게 뚫렸으면 하루종일 남편의 마음은 조마조마하다 아내의 심장에 달린 시한폭탄이 언제 터질까 눈치를 본다 눈동자가 시계초침처럼 빠르게 왔다갔다 한다 다행이다 밤이 깊었다 이불 속에서 심장이 터져 피가 낭자한 일은 없겠지 헉헉, 남편은 스.. 2020. 6. 30.
이민하 <지하 이웃> 지하 이웃 천장엔 불빛이 눌어붙었고 바닥엔 발이 닿지 않았고 밖에는 비가 오는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았다. 옆집 부부의 심야 격투도 없고 세상모르고 코를 고는 세탁기 소리도 없고 골목에는 개가 짖는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았다. 혀가 찐득하게 아팠고 머리칼이 전깃줄처럼 늘어져 있었고 두 분은 뜨고 있는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았다. 나는 산책을 나갔고 사람들에게 인사를 건넸고 누군가 나를 안은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았다. 어떤 사람들은 소리가 나지 않는 대화를 했고 어떤 사람들은 곁눈으로 흘깃, 나의 영정 사진을 들여다보는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았다. 발을 두고 나온 사람들이 날아서 집으로 갔다. 안아줄 사람이 오기 전에 날개를 버렸다. ―이민하 【산책】 영화 ‘기생충’의 지하방에는 고유의 냄새가 .. 2020. 6. 30.
이브 본느프와 <또 하나의 소리> 또 하나의 소리 모든 것이 멈출 때 머리칼을 흔들거나 의 재를 뿌리면서 그대는 무슨 몸짓을 시도하려 하는가, 그리하여 존재의 자정이 책상을 비치는 것은 언제인가? 모든 것이 침묵을 지킬 때 그대의 검은 입술 위에서 그대는 어떤 기호를, 어떤 가난한 언어를 지키려고 하는가, 아궁이에 불이 꺼져버릴 때 마지막 불씨를 지키려 하는가? 나는 그대 속에서 살아가리라, 그리고 나는 그대 속에서 모든 빛을 꺼내리라, 모든 화육化肉, 모든 암초, 모든 법을. 그리하여 내가 그대를 끌어올린 허무 속에다 나는 번갯불의 길을 열리라, 아니면 아직껏 소리친 적이 없는 가장 커다란 외침을. ―이브 본느프와(프랑스, 1923-2016) 【산책】 “그리하여 존재의 자정이 책상을 비치는 것은 언제인가?” 모든 것이 다 사라질 때 지.. 2020. 6. 30.
[짧은 소설] 혼인금지법 3 : 상속금지법 혼인금지법 3 그래서 한 사람이 죽으면 그 사람의 모든 재산이 국가에 귀속된다고? 바에 앉은 손님이 소리를 높였다. 이 사람, 왜 그렇게 소리를 지르나. 카페 주인이 달래며 말했다. 그게 말이야. 사람이 자기 재산을 소유하는 데도 기한이 있다는 거지. 자신이 살아 있을 동안만 자신이 자기 소유를 점유하고 사용할 수 있다는 거지. 어차피 죽으면 자신이 소유할 수 없으니까. 그건 그렇지. 하지만 내 소유가 없어진다는 게 말이나 되나. 내 자손이라도 물려받아야지. 글쎄. 과연 그럴까. 왜 자네 소유가 자네 자식에게 상속되어야 하나. 그건 무슨 근거지? 법에 그렇게 되어 있잖나. 그러니까 법을 바꾸는 거지. 이젠 상속을 못한다, 하고 말일세. 그게 말이 돼? 왜 말이 안 되지? 법에 상속하기로 되어 있는데 그걸.. 2020. 6. 29.
보리스 빠스제르나끄 <유명해진다는 것은> 유명해진다는 것은 유명해진다는 것은 아름답지 못하다. 그것이 사람을 높이 치켜올려 주는 것이 아니다. 고문서를 만들지 말고 원고를 아낄지어다. 창작의 목적은 자기를 바치는 것이지, 센세이션이나 성공이 아니다. 아무것도 아니면서 세상 사람들의 입술에 오르는 것은 창피한 노릇이다. 하지만 자신을 거짓되게 일컫지 말지며, 마침내는 우주의 사랑을 자기에게 끌어오며, 미래를 부르는 소리를 듣도록 살지어다. 여백일랑 운명 속에 남길 것이며 종이 위해 남길 것이 아니니라. 온 인생의 한 장 한 절은 난 외의 여백에 적을지니라. 무명無名 속에 잠겨 그 속에서 자기의 발걸음을 숨길지니라 안개 속에 한 고을이 숨어, 지척을 분간할 수 없듯이. 다른 사람들이 생생한 발자취를 따라 한 뼘 한 뼘 너의 길을 가리라. 그러나 패.. 2020. 6. 29.
[창작 시] 우울한 연애의 기록 우울한 연애의 기록 2020년 8월 스무살 청춘 무작정 두 번째 연애에 뛰어들고 전염병을 피해 먼 도시로 피난한다 좀비 촉수를 지닌 바이러스는 불길하게 진화한다 키스보다 여러 갈래로 침투해 세포를 파괴한다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극장에서 코미디 영화를 보고 걸어본 적 없는 거리를 걷고 숲이 푸른 언덕을 오른다 한 번도 입은 적 없는 지역상표 옷을 사고 동네 미용실에 들러 퍼머를 하고 서로를 보며 웃는다 미친듯이 돼지불백과 냉면을 먹고 깨끗한 물로 증류한 소주로 입가심을 한다 벌써 취기가 오르는가 저녁놀이 붉게 타오른다 덩그러니 널찍한 민박집 방 누군가에게는 처음이었을 사랑을 한다 미친듯이 세상은 깡그리 병들었다 허튼소리를 하고 세상이 병들었는데 왜 사람이 아픈 것이냐 죽느냐 사느냐 정답은 뭐냐 낄낄거리며 .. 2020. 6. 29.
김소연 <수학자의 아침> 수학자의 아침 나 잠깐만 죽을게 삼각형처럼 정지한 사물들의 고요한 그림자를 둘러본다 새장이 뱅글뱅글 움직이기 시작한다 안겨 있는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는 것에 대해 안겨 있는 사람을 더 꼭 끌어안으며 생각한다 이것은 기억을 상상하는 일이다 눈알에 기어들어 온 개미를 보는 일이다 살결이 되어버린 겨울이라든가, 남쪽 바다의 남십자성이라든가 나 잠깐만 죽을게 단정한 선분처럼 수학자는 눈을 감는다 보이지 않는 사람의 숨을 세기로 한다 들이쉬고 내쉬는 간격의 이항대립 구조를 세기로 한다 숨소리가 고동 소리가 맥박 소리가 수학자의 귓전에 함부로 들락거린다 비천한 육체에 깃든 비천한 기쁨에 대해 생각한다 눈물 따위와 한숨 따위를 오래 잊고 살았습니다 잘 살고 있지 않는데도 불구하고요 잠깐만 죽을게, 어디서도 목격한 적.. 2020. 6. 29.
가라 하시니 귀신들이 나와서 돼지에게로 들어가는지라 *평신도 성경 묵상은 평신도에 의한 평신도를 위한 묵상입니다. 화석화된 동어 반복의 신학적 용어들은 때때로 우리 삶의 부조리한 고통을 위로하지 못한다고 느낄 때가 있습니다. 보다 피부에 와 닿는 실제적인 깨달음과 설명이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 나눔을 하기 원합니다. 또 예수께서 건너편 가다라 지방에 가시매 귀신 들린 자 둘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를 만나니 그들은 몹시 사나워 아무도 그 길로 지나갈 수 없을 지경이더라 이에 그들이 소리 질러 이르되 하나님의 아들이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 하더니 마침 멀리서 많은 돼지 떼가 먹고 있는지라 귀신들이 예수께 간구하여 이르되 만일 우리를 쫓아내시려면 돼지 떼에 들여보내 주소서 하니 그들.. 2020. 6. 28.
이민하 <7인분의 식사> 7인분의 식사 두 사람은 악수하고 두 사람은 얘기하고 두 사람은 웃고 한 사람은 빈 의자 옆에 앉아 창밖을 본다 악수는 셋이서 못 하나? 일곱이서 손을 잡으면 그건 체조가 되나? 밖에는 흰 눈이 목련꽃처럼 떨어지는데 일곱 사람이 모이면 1인분의 밥공기처럼 일곱 개의 우정이 분배될까 번갈아 짝을 맞추면 스물한 개의 우정이 발명될까 서넛씩 대여섯씩 뭉치면 동심원처럼 늘어나는 기하급수의 우정을 위해 종소리가 울려 퍼지듯 주방에는 낡은 냄비 낯선 냄비 동시에 끓고 일곱 사람이 동시에 입을 열면 세 쌍의 대화와 한 명의 독백이 발생할까 한 쌍의 대화가 탱크처럼 독백 위를 지나가고 세 쌍의 대화가 함께 폭발하면 거대하게 부푸는 핵구름 아래서 내통하는 입과 귀가 몰래 낳는 기형의 비밀들 목을 비틀면 벌컥, 거품부터 .. 2020. 6. 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