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린니의 서재
본문 바로가기

전체 글682

장정일 <햄버거에 대한 명상> 햄버거에 대한 명상 ㅡ 가정 요리서로 쓸 수 있게 만들어진 시 옛날에 나는 금이나 꿈에 대하여 명상했다 아주 단단하거나 투명한 무엇들에 대하여 그러나 나는 이제 물렁물렁한 것들에 대하여도 명상하련다 오늘 내가 해보일 명상은 햄버거를 만드는 일이다 아무나 손쉽게, 많은 재료를 들이지 않고 간단히 만들 수 있는 명상 그러면서도 맛이 좋고 영양이 듬뿍 든 면상 어쩌자고 우리가 가운데서 빠질 수 있겠는가? 자, 나와 함께 햄버거에 대한 명상을 행하자 먼저 필요한 재료를 가르쳐주겠다. 준비물은 햄버거 빵 2 버터 1 1/2큰술 쇠고기 150g 돼지고기 100g 양파 1 1/2 달걀 2 빵가루 2컵 소금 2 작은술 후추가루 1/4 작은술 상치 4잎 오이 1 마요네즈 소스 약간 브라운 소스 1/4컵 위의 재료들은 힘.. 2020. 7. 3.
안나 안드레예브나 마흐마또바 <그는 세상에서> 그는 세상에서 그는 세상에서 세 가지를 좋아했었네 저녁 예배 때 찬송, 하얀 공작들 그리고 아메리카의 낡은 지도를 좋아했었지. 그는 아이들이 우는 것을 싫어했고, 나무딸기 차와 여자의 히스테리를 싫어했었지. …… 그런데 나는 그의 아내였었네. ―안나 안드레예브나 마흐마또바 (러시아 1889-1966) 【산책】 한 남자가 있다. 경건하고, 우아하고, 먼 나라 여행을 꿈꾸는. 한 남자가 있다. 짜증을 잘 내고, 차보다는 커피나 술을 좋아하고, 여자를 잘 이해하지 못한다. 이런 남자라면 사랑하고 싶은가? 이 남자와 함께 살 수 있는가? 그런데 한 여자가 있다. 이 남자가 좋아하는 것을 잘 알고 있고, 이 남자가 싫어하는 것을 잘 알고 있고, 결정적으로 이 남자 자체를 잘 알고 있다. 아마도 사랑했으며 아마도 .. 2020. 7. 3.
배낭이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평신도 성경 묵상은 평신도에 의한 평신도를 위한 묵상입니다. 화석화된 동어 반복의 신학적 용어들은 때때로 우리 삶의 부조리한 고통을 위로하지 못한다고 느낄 때가 있습니다. 보다 피부에 와 닿는 실제적인 깨달음과 설명이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 나눔을 하기 원합니다. 여행을 위하여 배낭이다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마태복음 10장 10절) 이 땅에서 우리의 삶은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여행과 같습니다. 천상병 시인은 죽을 때가 되었을 때, 이 땅의 삶을 ‘소풍’으로 표현하며, “잘 놀다 간다”고 말하였습니다. 기독교인의 삶 역시 이 땅의 삶이 여행과 같지만, 우리에게는 단지 놀다 갈 수는 없는 소명이 있습니다. 우선은 내 안에 성령께서 부어주신 그리스도의 씨앗이 장성한 분량까지 .. 2020. 7. 2.
김경주 <시인의 피> 시인의 피 무대 위에서 그가 맡은 역할은 입김이다 그는 모든 산소에 흘러 다닌다 그는 어떤 배역 속에서건 자주 사라진다 일찍이 그것을 예감했지만 한 발이 없는 고양이의 비밀처럼 그는 어디로 나와 어디로 사라지는지 관객에게 보이지 않는다 입김은 수없이 태어나지만 무대에 한 번도 나타나서는 안 된다 매일 그는 자신이 지은 입김 속에서 증발한다 종일 그는 자신의 입김을 가지고 놀이터를 짓는 사람이다 입김만으로 행렬을 만들고자 그는 일생을 다 낭비한다 한 발을 숨기고 웃는 고양이처럼 남몰래 출생해버릴래 입김을 찾기 위해 가끔 사이렌이 곳곳에 울린다 입김은 자신이 그리 오래 살지는 않을 것이라며 무리 속에서 헤매다가 아무도 모르게 실종되곤 했다 사람들은 생몰을 지우면 쉽게 평등해진다고 믿는다 입김은 문장을 짓고 .. 2020. 7. 2.
이브 본느프와 <램프, 잠자는 사람> 램프, 잠자는 사람 1 그대 없이는 잠들 수가 없었다, 그대 없이는 내려가는 계단을 아예 내려가려고 하지 않았다. 나중에야 나는 알아차렸다, 죽음 속을 내려가는 길이 있는 이 땅이 또 하나의 꿈이라는 것을. 그때 나는 바랐다. 내 열병의 베갯머리에 그대가 존재하지 않기를. 그대가 밤보다도 더 어두운 존재이기를. 그리하여 무용한 세계 속에서 내가 소리 높이 말했을 때 너무도 광막한 잠의 길 위에서 나는 그대를 붙잡았다. 내 속에서 누르는 신神, 그것은 내가 떠도는 기름으로 빛나게 했던 강기슭, 그대는 알고 있었다 밤이면 밤마다 줄곧 괴롭히는 내 심연의 발걸음을, 밤이면 밤마다 찾아오는 나의 새벽, 이룰 수 없는 사랑을. 2 나는 그대 쪽으로 몸을 기울이고 있었다. 숱한 돌의 골짜기여 나는 듣고 있었다 그대.. 2020. 7. 2.
내가 능히 이 일 할 줄을 믿느냐 *평신도 성경 묵상은 평신도에 의한 평신도를 위한 묵상입니다. 화석화된 동어 반복의 신학적 용어들은 때때로 우리 삶의 부조리한 고통을 위로하지 못한다고 느낄 때가 있습니다. 보다 피부에 와 닿는 실제적인 깨달음과 설명이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 나눔을 하기 원합니다. 예수께서 거기에서 떠나가실새 두 맹인이 따라오며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더니 예수께서 집에 들어가시매 맹인들이 그에게 나아오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능히 이 일 할 줄을 믿느냐 대답하되 주여 그러하오이다 하니 이에 예수께서 그들의 눈을 만지시며 이르시되 너희 믿음대로 되라 하시니 그 눈들이 밝아진지라 예수께서 엄히 경고하시되 삼가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 하셨으나 그들이 나가서 예수의 소문을 그 온 .. 2020. 7. 1.
이브 본느프와 <싸움터> 싸움터 1 패배한 슬픔의 기사가 있다 그가 샘물을 지켜주었기에, 나는 깨어난다 그것은 나무들 덕택이다 물소리 속에 계속 이어지는 꿈. 그는 말이 없다. 그의 얼굴은 온갖 샘물과 절벽을 쏘다니다, 내가 찾아낸 죽은 형제의 얼굴. 정복당한 밤의 얼굴, 찢어진 어깨의 새벽에 고개 수그린 얼굴. 그는 말이 없다. 패배한 자가 싸움이 끝난 뒤 변명할 만한 말로써 무엇을 말할 수 있겠는가? 그는 처참한 얼굴을 땅바닥에 떨군다 죽는다는 것만이 그의 유일한 외침, 참다운 휴식이다. 죽은 자의 다알리아꽃처럼 과연 그는 피어날 수 있을까? 우리들에까지 죽음 세계의 소리를 내지르는 11월 흐릿한 물의 앞뜰에서. 내게 책임이 있는 날, 내가 다시 정복한 그날의 참담한 새벽에 기대어, 나는 영원히 매장된 내 비밀스런 악마의 영.. 2020. 7. 1.
이윤학 <간척지> 간척지 내 가슴속에는 수문이 있다 내 가슴을 가로질러가는 방파제 위로 뿌연 먼지를 일으키며 덤프트럭들이 지나다니고 있다 겨울의 한낮, 방파제 아래에 앉아 한가로이 바다낚시를 하는 사람들이 보인다, 나는 수문 위로 올라가 만조의 바다를 바라보곤 한다 민물도 갯물도 아닌 넓은 웅덩이를 차지한 썩어가는 물, 아직도 아무것도 살지 못하는 버려진 간척지, 내 가슴속의 웅덩이의 물은 출렁거리고 있다 이걸 어떻게 퍼낼까 이걸 우려내는 데 얼마나 많은 날들이 필요할까, 그것이 가능한 일이기나 한 건가 내 가슴속의 수문은 열리지 않는다, 나는 끝없이 흘러 고이는 물을 가둬두고 있다 ―이윤학 【산책】 가슴속에 흐르지 못하는 물이 있다. 흘려 내보지는 못하고, 자꾸 밀려들기만 한다. 수문이 있지만 늘 잠겨 있다. 밖으로 나.. 2020. 7. 1.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평신도 성경 묵상은 평신도에 의한 평신도를 위한 묵상입니다. 화석화된 동어 반복의 신학적 용어들은 때때로 우리 삶의 부조리한 고통을 위로하지 못한다고 느낄 때가 있습니다. 보다 피부에 와 닿는 실제적인 깨달음과 설명이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 나눔을 하기 원합니다. 예수께서 배에 오르사 건너가 본 동네에 이르시니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데리고 오거늘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어떤 서기관들이 속으로 이르되 이 사람이 신성을 모독하도다 예수께서 그 생각을 아시고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마음에 악한 생각을 하느냐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 어느 것이 쉽겠느냐 그러나 인자가 세상에서 죄.. 2020. 6.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