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브 본느프와 <싸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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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리뷰

이브 본느프와 <싸움터>

by 브린니 2020. 7. 1.

싸움터

 

 

1

패배한 슬픔의 기사가 있다

그가 샘물을 지켜주었기에, 나는 깨어난다

그것은 나무들 덕택이다

물소리 속에 계속 이어지는 꿈.

 

그는 말이 없다. 그의 얼굴은 온갖 샘물과

절벽을 쏘다니다, 내가 찾아낸 죽은 형제의 얼굴.

정복당한 밤의 얼굴, 찢어진 어깨의 새벽에

고개 수그린 얼굴.

 

그는 말이 없다. 패배한 자가 싸움이 끝난 뒤

변명할 만한 말로써 무엇을 말할 수 있겠는가?

그는 처참한 얼굴을 땅바닥에 떨군다

죽는다는 것만이 그의 유일한 외침, 참다운 휴식이다.

 

죽은 자의 다알리아꽃처럼

과연 그는 피어날 수 있을까?

우리들에까지 죽음 세계의 소리를 내지르는

11월 흐릿한 물의 앞뜰에서.

 

내게 책임이 있는 날, 내가 다시 정복한 그날의

참담한 새벽에 기대어,

나는 영원히 매장된 내 비밀스런 악마의

영원한 존재가 흐느끼는 것을 들은 듯하다.

 

오 내 힘의 기슭이여! 그대는 다시 나타나리라

나를 이끌어간 날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있게 해다오

그림자여, 그대들은 이제 더 이상 없다. 그림자가 다시 태어나야 한다면,

밤 속에서 그리고 밤을 통하여 그렇게 되리라.

 

                                     ―이브 본느프와(프랑스, 1923-2016)

 

 

【산책】

많은 인생의 시련에서 실패한 경험이 있다.

애초부터 이길 수 없는 싸움도 있었고, 다 이긴 싸움에서 뒤통수를 맞고 패배한 적도 있다.

아군으로부터 배신을 당해서 진 적도 있다.

갖가지 이유로 쓰라린 패배를 경험했다.

 

그래서 그 패배가 다시 승리가 되었는가.

그렇지 않다.

패배는 그냥 패배였다.

 

혹 다음에 한 번 이겼다고 해서

예전에 수없이 졌던 전적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패배는 그냥 패배의 기억으로, 흔적으로 남는다.

정말 기분 더럽다.

 

패배하지 않기 위해서는 첫째로 지혜로워야 한다.

이 싸움에서 질 것인지 이길 수 있을 것인지 잘 파악해야 한다.

질 싸움이라면 시작하지 말고, 어쩔 수 없이 시작된 싸움이라면 지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것이 안 된다면 지더라도 잘 져야 한다.

앞날을 도모할 수 있도록 최소한으로 져야 한다.

깡그리 망해서는 안 된다.

패배가 완벽해서 더 이상 일어설 수 없도록 깔아뭉개져서는 안 된다.

 

패배가 명명백백해서 항복을 해야 한다면

상대 장수를 잘 골라서 항복해야 한다.

피도 눈물도 없는 놈에게 끌려가서는 뼈도 못추린다.

항복하면 살 집도 주고, 먹을 것도 주고, 다음에 싸울 수 있도록 여유를 주는 자를 만나야 한다.

그래야 살 수 있다.

 

인생이란 패배하더라도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죽음이 오기 전까지는 100번 져도 백번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패배는 어쩔 수 없다. 그러나 살아남아서, 끝까지 살아남아서 계속 살아야 한다.

혹 아는가. 살아남은 놈이 이기는 세상이 올지.

 

죽어도 살아남아야 한다.

패배한 자는 말이 없지만 아직 살아 있다.

그거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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