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브 본느프와 <램프, 잠자는 사람>
본문 바로가기
독서 리뷰

이브 본느프와 <램프, 잠자는 사람>

by 브린니 2020. 7. 2.

램프, 잠자는 사람

 

1

그대 없이는 잠들 수가 없었다, 그대 없이는

내려가는 계단을 아예 내려가려고 하지 않았다.

나중에야 나는 알아차렸다, 죽음 속을 내려가는 길이 있는

이 땅이 또 하나의 꿈이라는 것을.

 

그때 나는 바랐다. 내 열병의 베갯머리에

그대가 존재하지 않기를. 그대가 밤보다도 더 어두운 존재이기를.

그리하여 무용한 세계 속에서 내가 소리 높이 말했을 때

너무도 광막한 잠의 길 위에서 나는 그대를 붙잡았다.

 

내 속에서 누르는 신神,

그것은 내가 떠도는 기름으로 빛나게 했던 강기슭,

그대는 알고 있었다 밤이면 밤마다 줄곧 괴롭히는 내 심연의 발걸음을,

밤이면 밤마다 찾아오는 나의 새벽, 이룰 수 없는 사랑을.

 

2

나는 그대 쪽으로 몸을 기울이고 있었다. 숱한 돌의 골짜기여

나는 듣고 있었다 그대의 묵직한 휴식의 소리를,

나는 보고 있었다 그대를 가리는 그림자 속에 아주 나지막이

잠의 거품이 허옇게 이는 슬픈 장소를.

 

나는 그대가 꿈꾸는 것을 듣고 있었다. 오오 단조로운 둔한 자여,

때때로 보이는 않는 바위에 부서져

얼마나 멀리 그대 목소리는 사라져갈 것인가!

그 목소리의 그림자 속에 가냘프게 속삭이는 기다림의 격류를 밀어 헤치면서

 

저쪽, 울긋불긋한 꽃 빛깔의 뜰 가운데,

방자한 공작 한 마리 죽음의 빛으로 자라고 있다.

하지만 그대, 그대에게 필요한 것은 꿈틀거리는 나의 불꽃뿐,

그대는 유연한 말의 밤에 살고 있다.

 

그대는 누구인가? 그대에 대해 내가 알고 있는 것은

그대의 목소리에 담겨 있는 미완성 의식儀式의 놀람과 서두름뿐

그대는 책상 꼭대기에서 어둠을 나눠갖는다,

오오 유일하게 빛나는 것이여, 그대의 손은 얼마나 벌거벗었는가!

 

―이브 본느프와(프랑스, 1923-2016)

 

 

【산책】

램프라는 말만 들어도 알라딘의 요술 램프를 떠올리는 사람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무엇이든 원하는 대로 모든 소원을 들어주는 요술 램프, 램프의 요정 지니.

지니는 인공지능 기기의 이름이기도 하다. 모든 것을 다 해결해준다는.

 

알라딘 요술 램프의 요정 지니

 

이브 본느프와의 시 <램프, 잠자는 사람>은 불꽃이 피는 진짜 램프를 소재로 인간 존재의 깊은 내면을 그리고 있다.

 

램프를 들고 죽음으로 가는 길을 내려가면 어떤 풍경이 있을까.

 

램프의 불이 꺼지고, 빛이 한 줌도 없는 세계.

죽음과 같은 잠의 세계뿐일 때

신은 그 세계의 지배자로서 인간을 누르고

인간은 자신의 내면의 발걸음 소리를 듣는다.

밤이 깊은데 오히려 새벽처럼 깬다.

이룰 수 없는 사랑 때문에.

 

램프는 내면 가장 어둡고 깊은 곳, 심연이라고 불리는 곳으로 나를 인도한다.

심연이란 바닥을 알 수 없는 깊은 구렁을 뜻한다.

그러니까 심연을 가장 밑바닥이라고 불러서는 안 된다.

텅 빈 구멍이라고 불러야 한다.

그냥 텅 비어서 아무리 깊이 들여다봐야 끝을 볼 수 없다.

그러므로 심연을 들여다보라는 말은 거짓말이다.

본다고 해서 보이는 것도 아니고, 봐봤자 아무것도 없다.

텅 빈 깊은 어둠뿐.

 

아마도 심연은 죽음의 모습이 아닐까.

깊고 어두운, 끝이 없는 허공.

죽으면 우주의 한 모퉁이로 빨려 들어가는 것일까.

우주 역시 끝이 없는 어둠뿐일 테니까.

 

그렇다. 그때 램프를 들고 있어야 한다.

깊고 어두운 심연으로 들어갈 때 반드시 불타는 램프를 손에 쥐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 어둠의 길을 걸어갈 수 있다.

끝에 아무것도 없을지라도 죽음을 걷는 것이 순례자의 몫이다.

 

성경에도 기름을 준비한 슬기로운 다섯 처녀만이 천국에 들어가 신랑과의 혼례에 참여할 수 있다.

 

램프, 죽음의 동반자.

천국의 빛.

'독서 리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안나 안드레예브나 마흐마또바 <그는 세상에서>  (0) 2020.07.03
김경주 <시인의 피>  (0) 2020.07.02
이브 본느프와 <싸움터>  (0) 2020.07.01
이윤학 <간척지>  (0) 2020.07.01
이민하 <지하 이웃>  (0) 2020.06.30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