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주 <시인의 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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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리뷰

김경주 <시인의 피>

by 브린니 2020. 7. 2.

시인의 피

 

 

무대 위에서 그가 맡은 역할은 입김이다

그는 모든 산소에 흘러 다닌다

그는 어떤 배역 속에서건 자주 사라진다

일찍이 그것을 예감했지만

한 발이 없는 고양이의 비밀처럼

그는 어디로 나와

어디로 사라지는지

관객에게 보이지 않는다

입김은 수없이 태어나지만

무대에 한 번도 나타나서는 안 된다

매일 그는 자신이 지은 입김 속에서 증발한다

종일 그는 자신의 입김을 가지고

놀이터를 짓는 사람이다

입김만으로 행렬을 만들고자

그는 일생을 다 낭비한다

한 발을 숨기고 웃는 고양이처럼

남몰래 출생해버릴래

입김을 찾기 위해

가끔 사이렌이 곳곳에 울린다

 

입김은 자신이

그리 오래 살지는 않을 것이라며

무리 속에서 헤매다가

아무도 모르게 실종되곤 했다

사람들은 생몰을 지우면

쉽게 평등해진다고 믿는다

입김은 문장을 짓고

그곳을 조용히 흘러나왔다

 

                                              ―김경주

 

 

【산책】

숨도, 호흡도 아닌 입김이라니!

시의 운명을 매우 적절하게 말한 것 같다.

그저 입김처럼 겨우 태어났다가 쉽게 죽는 연약한 공기의 일종.

 

그러나 추운 겨울 유리창에 입김을 불고 거기 글자를 쓸 수 있다.

시를 쓸 수 있다.

입김이 마르면 흔적 없이 사라지는 시를.

 

세상에서 시가 사라지면 어떻게 될까.

정말 사이렌을 울리며 시를 찾게 될까.

 

"입김만으로 행렬을 만들고자 그는 일생을 다 낭비한다"

시인의 운명을 표현하는 멋진 구절이다.

 

부질없는 입김으로 행렬을 만드는 것처럼 겨우 단어 몇 개로 우주를 만드는 시인.

존재감이라고는 입김만큼도 없는 입김.

입김도 입김한다?

 

시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입김은 문장을 짓고 그곳을 조용히 흘러나왔다”

 

그저 시는 시 한 줄 쓰고 조용히 물러나는 것이 소명이다.

시가 남겨 놓은 시가 사람을 움직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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