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스 빠스제르나끄 <가을>
본문 바로가기
독서 리뷰

보리스 빠스제르나끄 <가을>

by 브린니 2020. 6. 26.

가을

 

 

내 집 식구들 각기 떠나보내고,

가까운 사람들 모두 오랫동안 흩어져 있으니,

가슴과 자연 속의 모든 것은

일상의 고독으로 가득 차 있다.

 

그리고 이제 여기 오두막집엔 당신과 나

숲속에선 인적이 드물어 사막인 양하고

옛 노래에 있듯이 샛길과 조그마한 행길은

반쯤 잡초로 무성하였다.

 

이제 수목으로 덮인 벽들이

슬픔에 잠긴 우리 둘만을 바라보고 있다.

우리는 뛰어넘지 못할 운명의 장벽,

우리는 공공연히 파멸해 가리라.

 

우리는 한 시에 자리에 앉아 세 시면 일어나고,

나는 책을 읽고 당신은 수를 놓는다.

새벽 무렵엔 우리가 언제

키스를 그만둔 지 알아채지 못하리라.

 

좀더 멋지게 분방하게

나뭇잎이며, 소란피워라, 흩날려라.

그리하여 어제의 고배苦杯의 잔에

오늘의 우울이 넘치게 하라

 

애착, 동경, 매력이여!

9월의 소음 속에 흩어지도록 하자!

가을의 바스락거리는 소리 속에 모든 것 묻고,

죽어 버리든지 반쯤 미치려무나!

 

아담한 숲의 나무들이 나목裸木이 되듯이

당신도 바로 그렇게 옷을 벗어 버리고,

그때, 비단실로 술을 단 잠옷 바람으로

내 팔에 안기려무나.

 

삶이 우환보다 싫증이 날 때

당신은 ― 파멸로 가는 길의 축복.

그리고 미의 본질 ― 그것은 용기,

바로 이것이 우리를 서로 끌어당긴다. ―

 

                           ―보리스 빠스제르나끄(러시아, 1890-1960) *1958년, <의사 지바고> 노벨문학상 결정

 

 

【산책】

가을이 왔다.

가족들은 떠나고 이웃들도 없다.

사람의 가슴도, 자연도 모두 고독으로 가득 차 있다.

오두막집엔 나와 연인만 남았다.

인적도 드물고 길은 반쯤 잡초로 무성하다.

 

벽이 슬픔에 잠긴 연인들을 바라본다.

연인들은 넘지 못할 운명의 장벽 앞에 있고,

점점 파멸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이 시는 <의사 지바고>에서 주인공 유리 지바고가 쓴 시 25편 중 하나이다.

 

외딴 마을에 유폐된 듯 살고 있는 연인들이 겪는 쓸쓸함과 고독을 노래하고 있다.

모든 것이 쇠락하고 있는 가을날,

연인들도 서로 무심하게 독서와 뜨개질로 하루를 보내고,

새벽엔 입맞춤조차 없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나

연인들은 반쯤 미쳐서 새로운 사랑 행위를 하고,

미의 본질을 향해 나아간다.

인생의 절정이지만 곧 쇠락을 맞이할 운명이다.

연인들은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불타는 사랑을 한다.

 

둘이서만 사랑하면 세상에 다른 아무것도 없어도 된다고 큰소리치지만

연인 둘만 남는다면 거기에 고독이 스며든다.

함께 있어도 고독한 느낌

인생이란 어느 것 하나만을 고집할 수 없다.

 

인간이 성숙해지는 데는 행복한 시절보다는

고독하고 절망적인 시기가 더 필요한지도 모른다.

어찌 보면 이런 시기에 연인과 함께 있다는 것이 더없이 큰 행복인지도 모른다.

사실 지나친 고독이나 절망은 파멸로 이끌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도저히 넘을 수 없는 어떤 운명과도 같은 세상의 흐름 속에서 개인은 무력할 수 있다.

어쩌면 그 무력감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힘은 어떤 미의 본질을 찾아가는 것이 아닐까.

 

혁명의 시대를 지나온 고독한 시인의 면모가 잘 드러난 시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빠스제르나끄는 고독 속에 죽어갔지만

<의사 지바고>에 나오는 유리 지바고는 연인과 함께 있기에

오늘 하루도 치열하게 살 수 있다.

 

사랑하는 연인이여,

당신은 파멸로 가는 길의 축복이며 미의 본질이며 삶에 대한 용기이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