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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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리뷰

한강 <서시>

by 브린니 2020. 6. 27.

서시

 

 

어느 날 운명이 찾아와

나에게 말을 붙이고

내가 네 운명이란다. 그동안

내가 마음에 들었니, 라고 묻는다면

나는 조용히 그를 끌어안고

오래 있을 거야.

눈물을 흘리게 될지, 마음이

한없이 고요해져 이제는

아무것도 더 필요하지 않다고 느끼게 될지는

잘 모르겠어.

 

당신, 가끔 당신을 느낀 적이 있었어,

라고 말하게 될까.

당신을 느끼지 못할 때에도

당신과 언제나 함께였다는 것을 알겠어,

라고.

 

아니, 말은 필요하지 않을 거야.

당신은

내가 말하지 않아도

모두 알고 있을 테니까.

내가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을 후회했는지

무엇을 돌이키려 헛되이 애쓰고

끝없이 집착했는지

매달리며

눈먼 걸인처럼 어루만지며

때로는

당신을 등지려고도 했는지

 

그러니까

당신이 어느 날 찾아와

마침내 얼굴을 보여줄 때

그 윤곽의 사이 사이,

움푹 파인 눈두덩과 콧날의 능선을 따라

어리고

지워진 그늘과 빛을

오래 바라볼 거야

떨리는 두 손을 얹을 거야

거기, 당신의 뺨에,

얼룩진.

 

                                          ―한강

 

 

【산책】

어느 날 운명이 나타나 내가 네 운명이야, 라고 말한다면?

어느 날 마음이 몸 밖으로 나와서 내가 네 마음이야, 라고 말한다면?

영혼이, 감정이, 오장육부가,

내가 알지 못하는 나의 것들이 한꺼번에 달려와 내게 매달린다면?

 

내가 잊고 살았지만 내게 속한 것들이 아주 많다.

그러나 사실 그것이 있는지 없는지조차 알지 못한 채 아무런 걱정 없이 살고 있다.

나의 운명은 나를 정말 여기까지 이끌고 온 것일까.

나의 마음은 나를 마음에 들어할까.

운명이 찾아왔을 때 무어라고 인사를 할까.

 

운명이 나를 아는 것처럼 나도 운명을 잘 알고 있는 것일까.

왜 이곳으로 나를 끌고 왔느냐고 원망을 할까.

나를 여기까지 잘 이끌어줘서 고맙다고 인사를 할까.

 

운명은 나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있을까.

“내가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을 후회했는지 무엇을 돌이키려 헛되이 애쓰고 끝없이 집착했는지”

운명은 내가 무엇을 사랑하도록 재촉했을까.

내가 후회할 때 위로하고 격려했을까.

잃어버린 것을 돌이키려고 헛된 수고를 하면서 집착할 때 나를 포기하게 만들었을까.

 

어쩌면 운명은 나를 움직이지 않고 그냥 지켜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모든 결과가 결정지어져 있는 게 아니라 결과가 드러나는 순간 그것이 운명이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미’가 아니라 지금 여기 이 순간, 끝이 날 때, 이것이 운명인지도 모른다.

 

운명은 연인처럼 오래도록 숨어 있던 연인처럼

어느 날 문득 나를 찾아와 자신의 얼굴을 보여준다.

나는 운명의 얼굴을 쓰다듬는다.

떨리는 손으로.

 

이 시의 제목이 왜 <서시>일까.

서시란 처음을 여는 시이다.

그렇다면 운명이란 최초의 어떤 것인가?

처음이자 마지막이란 뜻인가?

내가 태어난 것이 운명일 수도 있다.

혹은 내 인생의 종착역?

 

운명은 처음부터 모든 것을 알고 있다?

운명이 본 모습을 나타냈을 때 과연 당신은 어떻게 그를 맞이할 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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