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린니의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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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파를 썰다 눈물의 시간이 시작되었다 아내는 식칼을 두고 망설인다 거침없이 베고 썰 것인가 전투 전에 이슬이 맺힌다 생전 처음 아내를 뒤로 물리고 그가 검을 든다 아내 눈에서 피눈물 나게 했던 과거 때문인가 이번만큼은 물러서지 않겠다는 결의가 대단하다 이토록 하찮은 일에 칼을 빼들고 설치다니 그 많은 유혹에 차례로 굴복하고 돌아와서 기껏 파 써는 일에 힘을 쏟는다 국 끓일 대파는 동그랗고 잘게 썰어야 한다 육개장처럼 큼지막할 것도 없고 어슷 썰 것도 아니다 일정한 간격으로 곱게 썰면 그만 그가 썰어놓은 대파는 간격이 멀고 끄트머리도 상한 것이 간당간당한 결혼 생활 같다 피 땀 눈물, 마지막 춤을 아내는 BTS 노래를 흥얼댄다 눈이 맵지 않다고 뽑내는 그를 향해 너는 안경 썼잖아 당신은 늘 비겁해 라식한 아내는 눈이 .. 2020. 5. 29.
헤르만 헤세 <데미안> 데미안은 누구일까? 이 책을 읽고 나서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다면, 작가의 의도에 근접한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헤르만 헤세는 기독교 선교사 아버지 밑에서 자라나면서 인도 여행을 통해 동양의 종교와 가치관을 접했습니다. 기독교 가치관과 동양 종교의 가치관을 동시에 접하면서 세상을 이해하는 두 가지의 가설을 바라보았을 것입니다. 서구 기독교의 직선적 세계관, 선과 악을 둘로 나누는 이분법적 세계관에 비해서 동양의 세계관은 윤회를 바탕으로 한 원형적 세계관이며 선과 악이 명확히 구분되지 않아 탄생과 죽음이 하나로 이어지는 생명사상입니다. 기독교의 신은 전적으로 선한 신이며 악한 마귀를 굴복시키는 속성을 갖지만, 동양의 신은 그 자체로 선과 악을 함께 내포하여 생명과 탄생, 죽음과 파괴가 반복되는 영원 회귀.. 2020. 5. 29.
인생 누군가 로또복권을 발기발기 찢어서 엘리베이터 앞에 뿌려놓았다 당첨 되지 못한 인생의 불운을 표현한 설치미술 같다 마음을 갈가리 찢을 만큼 미친 분노가 문득, 터져나온 것일까 어쩌면 분노보다 두 배 더 깊은 아픔이 몸속 어딘가 웅크리고 있는 걸까 그가 궁금하다 우리 아파트 같은 라인 몇 층 어디, 살고 있을 슬픈 남자 그리고 여자 2020. 5. 28.
아이가 TV 보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라 아이를 잘 키워보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힌 엄마들은 집에서 TV를 없애버리는 대결단을 단행합니다. 집 거실을 책장으로 채우고 빼곡이 책을 꽂아 아이가 TV보다는 책을 보아야 한다는 대명제를 실천합니다. 여기에 더해서 스마트폰까지 사주지 않는 강력한 결단력을 가진 엄마도 있습니다. 아이는 학교에 다녀온 뒤 학원을 두어 군데 들르고 도서관처럼 꾸며진 집 거실에 앉아 먼저 숙제를 하고 오늘 해야할 공부량을 채운 뒤 독서를 합니다. 하루 종일 아이가 만나는 사람은 학교 선생님, 친구들, 학원 선생님, 문구점 아저씨, 엄마, 형제 뿐입니다. 가끔 아빠가 일찍 들어오는 날에는 아빠를 만나기도 합니다. 아이의 삶은 공부와 책, 막간에 놀이터에서 노는 것, 가족간의 대화로 구성됩니다. 등굣길이나 쉬는 시간에 만나는 아이.. 2020. 5. 28.
아이의 의견, 어디까지 들어줘야 할까 요즘 아파트 단지 놀이터를 보면, 젊은 아빠들이 아이들을 데리고 나와 함께 놀아주는 모습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습니다. TV 프로그램 ‘슈퍼맨이 돌아왔다’의 영향과 여성들의 사회진출 욕구가 강해진 탓에 육아에 신경을 쓰는 아빠들이 늘어나는 있는 추세입니다. 물론 바람직한 현상이긴 하지만, 동시에 우려되는 부분도 있습니다. 아빠가 엄마처럼 다정하고 아이의 욕구에 즉각 반응해 주는 것은 좋지만, 한편으로는 아이에게 슈퍼에고로 자리잡을 존재가 사라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부분입니다. 마치 엄마에게 하듯이 아빠에게도 떼를 쓰고 당연히 아빠가 져줄 거라고, 경험을 통해 익히 아는 아이들은 막무가내로 천상천하 유아독존이 되기 쉽습니다. 슈퍼에고는 인간에게 꼭 지켜야할 도덕과 윤리, 질서를 가르쳐줍니다. 그것을 지키.. 2020. 5. 28.
B가 A를 다시 만났을 때 B는 수줍은 아이처럼 노트 한 권을 건넸다. B가 세상에 없었을 때를 기억하며 쓴 것들이었다. 감옥에서도 일기를 썼단 말인가? A가 물었다. 아니, 나와서 그때를 생각하면서 써본 거지. A는 노트를 받아들고 한참을 가만히 앉아 있었다. 아무도 읽은 적 없는 것이겠지. A가 말했다. 응. B가 대답했다. 이것 참. 한 사람의 숨겨진 인생을 본다는 게……. 그냥 말로 하면 안 될까. 보기 싫다면 이리 줘. B가 손을 내밀었다. 아냐, 아니, 그런 건 아니고. 왠지 좀 숙연해져서 말이야. 이런 건 내 체질이 아니어서 말이지. 그냥 커피 한 잔 하면서 읽어보라는 것뿐이야. 그래, 그럼 우선 커피 한 잔 하고, 담배 피면서 천천히 읽도록 하지. 그는 벽을 바라보고 있다. 이미 3년 반이.. 2020. 5. 28.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흔히 독서모임을 하면 밀란 쿤데라의 에 대해서 이야기를 할 때, 이런 물음을 던집니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냐?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냐? 만약 전자라면 책 속에서 어떤 인물이 참을 수 없을 만큼 가벼운 인물이어야 할 것입니다. 만약 후자라면 일반적인 인간 존재가 너무나 가벼워서 참을 수 없다는 철학적 사변이 나와야 할 것입니다. 이 논쟁에 대해 해결도 보지 못한 채 흔히 독서모임의 주체들은 또 이런 이야기를 나눕니다. 이 책 속 인물 중에서 토마시와 사비나는 가볍게 살았다. 그러나 테레자는 무겁게 살기를 원했다. 그러나 나는 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물론 토마시는 아들마저 내팽개친 채 자유로운 삶을 살아갑니다. 수많은 여성들과 관계를 하면서 어떤 책임있는 행동도 하지 않.. 2020. 5. 27.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평신도 성경 묵상은 평신도에 의한 평신도를 위한 묵상입니다. 화석화된 동어 반복의 신학적 용어들은 때때로 우리 삶의 부조리한 고통을 위로하지 못한다고 느낄 때가 있습니다. 보다 피부에 와 닿는 실제적인 깨달음과 설명이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 나눔을 하기 원합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마태복음 5장 3절) 예수님은 광야의 시험을 통과하신 후에 제자들을 부르시고 온 갈릴리를 두루 다니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고 병든 자를 고치셨습니다. 그러자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예수님은 그들을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셔서 이 말씀으로 가르치셨습니다. 누가복음에서는 그냥 ‘가난한 자’라고 나오는데, 마태복음에는 ‘심령이 가난한 자’라고 나옵니다. 어떤 학자들은 마태가 영적인 .. 2020. 5. 27.
늙음 거칠고 성기던 머리칼이 겸손하게 고개를 숙인다 이마가 더 빛나고 너그러워진다 바람이 불면 세차게 뻗쳐오르더니 이제 바람의 반대쪽으로 드러눕는다 가시와 엉겅퀴도 뿌리가 다 드러나 기진맥진하고 단단하던 돌들도 부스러진다 푸른 어깨가 파도의 끄트머리처럼 주저앉고 뻣뻣하던 무릎이 고요해진다 늙다, 자기 인생에 대해 부끄러워할 줄 알게 되다 수치를 가르치는 나이듦 사는 것이 모욕이라는 것쯤 젊은들 모르랴 이가 닳아서 먹을 수 없다 쓴 맛을 느낄 수 없다 행복한 단맛뿐 추억이 주는 달콤한 향락 속에서 나는 죽어가고 있다 단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과거를 상상하며 미래로 빠져든다 늙은 남자에겐 내일이 전부다 오늘 잘 살았다 고맙다 2020. 5.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