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글(시, 짧은 소설)' 카테고리의 글 목록 (17 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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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글(시, 짧은 소설)168

[창작 시] 달콤한 인생 달콤한 인생 그는 당뇨병에 걸렸다 커피를 마실 수 없고 야식으로 치킨과 피자를 먹을 수 없다 3년 전 실직과 최근 얻은 직장 스트레스가 원인일 수 있다 새벽마다 잠에서 깬다 실내 온도 24°C 생의 절망으로 몸을 부르르 떤다 이대로 죽는다면 아내와 아들은 과부와 고아가 된다 오직 신만이 그들을 보호할 수 있다 일어나 스탠드를 켜니 아내의 수첩이 보인다 목살 2근, 파절임과 소스, …… 내일 장 볼 목록이 적혀 있다 언제까지 내일이 반복될까 목살에 소금 후추 간 간한 후에 칼집 내어 힘줄 끊기 밀가루 충분이 입히기 기름 넉넉히 두르고 고기 올리고 통마늘 올린다(약불) 통마늘 익으면 꺼내고 팬에 기름을 제거하고 버터 1큰술 넣고 센 불에 굽는다 지겹고 똑같은 일상이어서 부디 내일도 계속 되기를! 그는 기도를.. 2020. 6. 15.
뜻밖의 변화들― 혼인금지법 2 뜻밖의 변화들 ― 혼인금지법 2 혼인금지법이 발효되자 직접 관련이 없어 보이는 곳에서부터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출산율이 높아졌다. 아이들이 태어나면 정부에서 양육해준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젊은 부부들이 아이 낳기를 주저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아이를 낳는다는 기쁨 플러스, 그 아이를 양육하는 데 돈이 들지 않는다는 프리미엄까지 얻었으니 굳이 피임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수십 년 동안 출산율이 곤두박질쳤었는데 혼인금지법 시행 불과 1년 만에 플러스로 돌아선 것이다. 뿐만 아니라 버려지는 영아들도 크게 줄었다. 미혼모들이 아기를 낳아 혼자 기를 수 없어 버리는 경우가 있었지만 이제는 당당하게 정부 출산 신고를 하게 된 것이다. 다만 구청에 출생 신고를 하려면 반드시 부모가 같이 가야만 .. 2020. 6. 14.
[창작 시] 수련 수련 물에 몸을 띄우고 물의 일렁임을 피부에 덮는다 물에 귀를 대고 물의 알갱이들이 토닥거리는 소리를 듣는다 물에 몸을 뉘이고 저녁 노을이 물에 흘러넘치는 걸 느낀다 몸에도 빛이 스며들어 불을 지핀다 초록잎은 연약한데 잘게 흩어져 가느다란 꽃대를 감싸고 이마에 핀 주홍빛 꽃은 여인을 품고 있다 손가락만 한 세월 깊은 여자 물에 몸을 반쯤 잠그고 바람이 들고 나는 것을 훔친다 바람은 물과 몸을 반쯤 섞어 놓았다 물은 짙푸르게 멍들고 몸은 점점 투명해진다 물 위의 꽃 물 아래 꽃 물과 몸의 경계에서 꽃은 피고 잠들고 눈을 뜬다 2020. 6. 13.
[창작 시] 산책 산책 아파트 단지와 개천 사이로 난 길이 있다 초입에 작달막한 기둥 두 개 차들을 막고 서 있다 길은 4차선 도로와 맞닿아 있고 거기서만 차들이 쌩쌩 달릴 수 있다 금지된 것은 생명을 보살핀다 개천에는 아주 가끔 오리들이 헤엄치지만 대개는 말라 있다 전신주 아래 누군가 전염병을 막는 일회용 마스크를 벗어 놓았다 방범용 CCTV 카메라가 나를 바라본다 나는 무엇을 감추고 있는가 손톱달은 부끄러워하고 만월은 불길하다 이 길은 몇 번이나 아내와 걸었다 아내를 먼저 들여보내고 혼자 걷고 있다 저녁 먹은 것이 가슴부터 목까지 차오르고 비튼다 이러다 죽겠다 죄를 고백하고 양심을 토해놓고 싶다 봄인데 날씨는 쓸쓸하다 숨차게 뛰어보려다 그만둔다 패딩 점퍼에 손을 깊이 찌르고 후드를 덮어 쓴다 몇 분 뒤 몸이 가렵고 돌.. 2020. 6. 12.
[창작 시] 뼈에 대한 명상 뼈에 대한 명상 마트에서 싼값에 냉동 갈치를 샀다 구워보니 살이 너무 얇아 프라이팬에 들어붙어 먹을 수 없다 뼈를 다 발라놓은 종잇장 같은 갈치 조림으로 상에 올려도 무보다 살이 없다 역시, 생선엔 뼈가 있어야 한다 세상 모든 것에 뼈가 들어 있다 날렵하게 휘는 뱀의 몸뚱어리에도 새들의 날개 속에도 도사리고 있다 공룡 화석에도 세월의 뼈가 찍혀 있고 고고학은 뼈에서 비롯되었다 뼈는 인류의 역사를 말한다 등뼈를 곧추 세우면서 비로소 사람이 되었다 헤겔은 말했다. 정신에 뼈가 있다. 아, 말에도 뼈가 있다! 독이 되고, 가시로 박힌다 생선을 놓고 논쟁하는 저녁식사 녹슬고 부러진 칼이 올라와 아내의 가슴을 베고 남편의 배를 가른다 피가 낭자한 식탁 이제야, 이 집 부부가 사는 맛이 우러나고 있다. 2020. 6. 10.
[창작 시] 지천명 지천명 젊을 때 나는 일상의 한복판에 뛰어든 신화의 시간을 살았네 사치와 향락과 게으름과 몽상의 나날들이었네 요즈음 나는 죽음과 일상이 겹치는 나날을 살고 있네 병듦과 나이듦, 욕망이 소멸하는 시간 깊은 후회와 한숨의 아침저녁 뒤돌아보거나 반성 따위는 없었네 과녁을 벗어난 화살은 자유로웠네 내 나이 쉰 둘 회개와 용서와 구원을 위하여 칼집에 꽂힌 칼처럼 고요한 생활, 질서의 반복 청춘은 교만했으나 백발은 고개를 숙이네 신께서는 장래 일 아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고 오늘은 미래보다 강하네 슬픔보다 더 아픈 평화 두 번째 인생이 시작되려나 보네 2020. 6. 9.
[창작 시] 짧은 연애 짧은 연애 1 몇 번의 연애와 배신과 상처에 지쳐갈 쯤 그대를 만났네 그해 겨울은 눈이 퍼부었네 비틀, 비틀대며 위태롭게 경복궁 돈화문 창경궁 광화문 뒷길을 걸었네 눈 속에 파묻힐까 그대 품에 파고들었네 키가 크고 코트 자락이 바닥에 쓸리던 남자 뒤에 숨어 옛 기억을 잠시 잊었네 내리는 눈이 먼 곳으로 데려갔네 여러 사람 앞에서 축하받는 날 그대는 빈손으로 찾아왔네 기뻤네 사람들 사이에 그대가 서 있는 것만으로도 그대와 몰래 파티장을 빠져나와 밤길을 걸었네 마지막 전철을 타려고 시청역 코인락커 앞에 멈췄네 그대가 건네는 열쇠로 함을 열었을 때 거기, 수줍은 들국화 한 묶음 놓여 있었네 쑥스러워하는 소년이 내 곁에 서 있었네 2 무작정 걷기만 했네 돈화문 뒷길 눈이 없던 가을날 벤치에 앉아 이야기를 나눴네.. 2020. 6. 8.
마트에서 일하는 손님 마트에서 일하는 손님 어느 날 마트에 손님이 하나 찾아왔다. 그는 카트를 끌고 이곳저곳을 돌며 상품을 샀다. 이것저것 마구 카트에 담는 게 아니라 상품 하나하나를 아주 꼼꼼히 살핀 뒤 가격도 비교하면서 쇼핑을 했다. 몇 시간 동안 매장을 돌아다닌 후 그가 사들인 상품은 몇 개 되지 않았다. 그는 계산하기 전 매장 직원에게 매니저를 만날 수 있느냐고 물었다.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직원이 물었다. 아뇨, 여쭤볼 게 있어서요. 그가 대답했다. 직원은 매니저에게 무전을 했고, 매니저가 곧 달려왔다. 그는 매니저와 잠시 동안 이야기를 나눴고, 계산을 한 뒤 매장을 나갔다. 며칠 뒤 손님이 다시 찾아왔다. 물건을 몇 개 샀고, 매장 직원에게 매니저를 불러달라고 말했다. 직원이 무슨 문제라도 있느냐고 또 물었다. .. 2020. 6. 8.
하얀 어둠 하얀 어둠 폭설 경보 내린 날 세상은 온통 흑백필름으로 찍은 사진 같다 집과 나무들 술렁이던 가게들 색色을 버리고 고요해진다 붉은 패딩을 입고 종종걸음 치는 남자, 이제 막 지하주차장을 빠져 나온 파란 자동차만이 도드라져 보인다 하지만 잠시 프랑스 국기처럼 펄럭이던 그들 모두 눈을 덮고 점멸한다 사람과 사물들 하얀 어둠 속으로 깊이 빠져든다 2020. 6.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