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글(시, 짧은 소설)' 카테고리의 글 목록 (18 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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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글(시, 짧은 소설)168

聖 가족 聖 가족 아내와 아들이 붙어서 말싸움을 하고 있다 둘 다 상처 입은 짐승 같다 원망과 분노로 서로 잡아먹을 듯하다 다 내 탓이다 아버지와 남편에게 퍼부을 비난을 서로에게 쏟는다 미안하다, 용서해다오 나는 말 한 마디 못하고 한쪽 구석에서 보고만 있다 벽을 보고 무릎을 꿇는다 상처와 미움이 어디서 오는 줄도 모르고 근원이 몸 밖 다른 어디에 있는데 서로 할퀴고 물어뜯는다 알량한 가장의 체면을 살려주려고 내게는 아무 말 않고, 참다 참다 서로의 고통이 더 크다고 다투고 있다 나를 둘러싼 모든 불가능 때문에 더 슬픈 가족 침묵으로 일관하다. 사랑을 말 할 수 없다! 나를 죽이고 행복하라 서로 등을 꿰맨 삼각형 사느냐 죽느냐, 깊은 구렁 사이 널뛰는 가족 폐허가 된 집구석, 경건해지다 2020. 6. 6.
혼인금지법 A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쪽으로 가고 있어. 내가 오늘 기막힌 뉴스를 들었거든. 커피 마시면서 얘기해줄게. A는 운전을 하면서 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A는 늘 과장된 몸짓과 높은 톤으로 대화를 이끌곤 했었다. 이번엔 또 무슨 일이기에 미리 전화까지 했는지 모르겠다. A는 커피숍 주문대 앞까지 와서야 어서 빨리 나오라고 재촉하기 일쑤였다. 아니면 미리 카페에 와서 담배를 한 대 피운 뒤 B에게 전화를 걸어 오늘 하루치 분량을 다 채우지 못했다면 커피 마시러 나오라고 넌지시 권했다. A는 늘 유쾌했다. 그들이 만날 때면 언제나 커피숍 3층 발코니 맨 끝 자리였다. ‘두 남자의 집’은 4층짜리 건물로 3층까지 카페로 사용하고 꼭대기 층엔 주인이 살았다. 요즘 대부분의 카페가 전체 금연구역인데 이 자리에서만은 .. 2020. 6. 5.
불 : 예술가들의 경우 불 : 예술가들의 경우 예술가들의 고통은 그들이 사는 세계가 지금 여기가 아니라 저 먼 어디 다른 곳이라는 것이다 거기가 어디인지 그들도 알지 못한다 그들은 가끔 그곳에서 행복하지만 지금 여기선 기억하지 못한다 그들은 대개 아름다운 아내와 함께 산다 새벽이나 저녁, 개를 데리고 산책을 한다 그는 아내의 말을 잘 들어주고 꽤 그럴싸한 상담자 노릇을 하지만 자기 이야기는 잘 하지 않는다 그들은 예술로 자신을 표현한다 어쩌면 예술이 자기 자신이 되고 그는 없어진다 그가 어디로 갔는지 자신도 잘 모른다 그가 돌아오는 데는 몇 분이 걸리기도 하고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리기도 한다 하지만 그들은 반드시 돌아온다 그의 몸이 이곳에 실재하기 때문이다. 어느 날 갑자기 깊은 산책에서 돌아온 그가 서랍에서 권총을 꺼내 아내.. 2020. 6. 3.
딸기 5월 끝날 딸기를 샀네 더는 딸기를 먹을 수 없으려나 했는데 철이 지난 딸기 농협 골목 리어카에서 빠알간 향내가 유혹하네 홀려서 한 바구니 집어들었네 집에 있는 식구들 생각나네 새콤달콤한 행복을 나눠 먹는 보아도 보아도 늘 그리운 시린 얼굴들 2020. 5. 31.
드레스덴의 폴란드 여자 아우슈비츠에서 유태인들이 수십 만 죽었다고 열을 올리고 있지만 사실 더 많이 죽은 건 우리 폴란드 인이야. H가 말했다. 군인, 부랑자, 집시, 노인, 아이들, 그냥 남자, 여자들도 떼로 죽었어. 사람이면 다. 종류에 상관없이. H는 맥주를 마셨고 치즈와 함께 소시지와 당근을 우적우적 씹었다. 모두 독일산이었다. 왜 폴란드 사람들이었지? B가 물었다. 왜냐고? 왜가 어딨어. 사람이 죽는데. 아, 그래? 미안해. 웃기네. H는 조롱하듯 B를 바라보았다. B는 기가 좀 죽었다. 이유라고? 글쎄 폴란드가 독일에 가까워서? 우리가 유태인과 비슷하게 생겼니? H가 물었다. B는 무어라고 대답할 수 없었다. 그 시대에 살지도 않았고 나치의 심리상태를 아는 것도 아닌데 뭘 어쩌란 말인가. 흔적조차 없애고 싶을 만큼 .. 2020. 5. 30.
대파를 썰다 눈물의 시간이 시작되었다 아내는 식칼을 두고 망설인다 거침없이 베고 썰 것인가 전투 전에 이슬이 맺힌다 생전 처음 아내를 뒤로 물리고 그가 검을 든다 아내 눈에서 피눈물 나게 했던 과거 때문인가 이번만큼은 물러서지 않겠다는 결의가 대단하다 이토록 하찮은 일에 칼을 빼들고 설치다니 그 많은 유혹에 차례로 굴복하고 돌아와서 기껏 파 써는 일에 힘을 쏟는다 국 끓일 대파는 동그랗고 잘게 썰어야 한다 육개장처럼 큼지막할 것도 없고 어슷 썰 것도 아니다 일정한 간격으로 곱게 썰면 그만 그가 썰어놓은 대파는 간격이 멀고 끄트머리도 상한 것이 간당간당한 결혼 생활 같다 피 땀 눈물, 마지막 춤을 아내는 BTS 노래를 흥얼댄다 눈이 맵지 않다고 뽑내는 그를 향해 너는 안경 썼잖아 당신은 늘 비겁해 라식한 아내는 눈이 .. 2020. 5. 29.
인생 누군가 로또복권을 발기발기 찢어서 엘리베이터 앞에 뿌려놓았다 당첨 되지 못한 인생의 불운을 표현한 설치미술 같다 마음을 갈가리 찢을 만큼 미친 분노가 문득, 터져나온 것일까 어쩌면 분노보다 두 배 더 깊은 아픔이 몸속 어딘가 웅크리고 있는 걸까 그가 궁금하다 우리 아파트 같은 라인 몇 층 어디, 살고 있을 슬픈 남자 그리고 여자 2020. 5. 28.
B가 A를 다시 만났을 때 B는 수줍은 아이처럼 노트 한 권을 건넸다. B가 세상에 없었을 때를 기억하며 쓴 것들이었다. 감옥에서도 일기를 썼단 말인가? A가 물었다. 아니, 나와서 그때를 생각하면서 써본 거지. A는 노트를 받아들고 한참을 가만히 앉아 있었다. 아무도 읽은 적 없는 것이겠지. A가 말했다. 응. B가 대답했다. 이것 참. 한 사람의 숨겨진 인생을 본다는 게……. 그냥 말로 하면 안 될까. 보기 싫다면 이리 줘. B가 손을 내밀었다. 아냐, 아니, 그런 건 아니고. 왠지 좀 숙연해져서 말이야. 이런 건 내 체질이 아니어서 말이지. 그냥 커피 한 잔 하면서 읽어보라는 것뿐이야. 그래, 그럼 우선 커피 한 잔 하고, 담배 피면서 천천히 읽도록 하지. 그는 벽을 바라보고 있다. 이미 3년 반이.. 2020. 5. 28.
늙음 거칠고 성기던 머리칼이 겸손하게 고개를 숙인다 이마가 더 빛나고 너그러워진다 바람이 불면 세차게 뻗쳐오르더니 이제 바람의 반대쪽으로 드러눕는다 가시와 엉겅퀴도 뿌리가 다 드러나 기진맥진하고 단단하던 돌들도 부스러진다 푸른 어깨가 파도의 끄트머리처럼 주저앉고 뻣뻣하던 무릎이 고요해진다 늙다, 자기 인생에 대해 부끄러워할 줄 알게 되다 수치를 가르치는 나이듦 사는 것이 모욕이라는 것쯤 젊은들 모르랴 이가 닳아서 먹을 수 없다 쓴 맛을 느낄 수 없다 행복한 단맛뿐 추억이 주는 달콤한 향락 속에서 나는 죽어가고 있다 단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과거를 상상하며 미래로 빠져든다 늙은 남자에겐 내일이 전부다 오늘 잘 살았다 고맙다 2020. 5.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