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소설] 버림받은 자의 슬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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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글(시, 짧은 소설)

[짧은 소설] 버림받은 자의 슬픔

by 브린니 2020. 6. 17.

버림받은 자의 슬픔

 

 

 

B가 도착했을 때 카페에는 TOTO의 Africa가 흐르고 있었다. A는 벌써 커피 한 잔을 거의 다 마시고 있었고, 재떨이에는 꽁초가 네 개나 있었다. A는 담배를 피우면서 의료 보고서를 읽고 있었다. 발을 까닥거리며 토토의 음악에 박자를 맞추면서.

 

토토가 미국 화장실 변기 만드는 회사라지.

A가 말했다.

 

한때 우리나라 화장실마다 토토 변기를 볼 수 있었어.

난 토토 음악을 좋아했어.

토토라고 하니까 ‘창가의 토토’가 생각나. 빅히트를 친 책이었어.

‘어린 왕자’나 ‘나의 라임오렌지 나무’처럼 어른이나 아이나 다 읽을 만한 책들이 스테디셀러가 되는 것 같아.

우리나라 사람들은 성장 소설 같은 느낌의 책들을 좋아하기도 하지.

어린 시절이 가장 아름답고 행복했다고 생각하기도 하고.

심리학자들은 트라우마에 대해 말하면서 과연 어린 시절이 가장 행복할까 묻기도 하지.

요즘은 줄었지만 한때 뉴스엔 아동 학대가 심심찮게 나왔지. 그런 일을 겪은 아이들의 어린 시절은 정말 지옥일 거야.

성장하지 못하고 애어른이 되겠지.

 

뭘 읽고 있나?

B가 물었다.

이거? 아, 이건 말이야. 환자 중 한 명이 쓴 일기 같은, 뭐 그런 거야. 자기 자신에 대해 써보라니까 이런 걸 써왔단 말이야. 자네도 좀 읽어보겠어?

 

A는 B에게 보고서를 내밀었다. B는 약간 글 중독이 있는 터라 뭐든지 보이면 눈을 처박고 읽곤 했다.

자네를 위해 커피는 내가 가져오지. 잘 읽어봐. 자네가 뭘 느끼는지 궁금해.

A는 B를 두고 카페 주인이 오늘은 뭘 또 실험하고 있는지 보려고 카운터로 향했다.

B는 물을 한 모금 마시고는 보고서를 읽어 내려갔다.

 

사람들은 가끔 어디론가 멀리 떠나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스무 살의 나도 그랬다. 나는 내 인생이 없는 곳으로 가고 싶었다. 사람들은 자기 인생이 완전한 실패뿐이라는 것을 느낄 때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어디로 돌아갈 수 있단 말인가, 탄식하면서 과거 어디쯤으로 돌아가 잘못된 매듭을 풀고 삶을 다시 시작하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나는 그렇게 생각할 수 없었다. 현재의 삶은 과거의 끝에 맞닿아 있다. 생은 지속한다. 과거의 어느 한 부분에 칼을 대고 시간을 자를 수 없다. 인생은 엿가락처럼 늘어지고 들러붙어 있다. 과거로부터 달아날 수 있는 인간은 아무도 없다. 지금 내 삶은 과거의 결과이다.

 

나는 한 번도 다른 삶을 산 적이 없다. 늘 똑같은 시간의 반복이었다. 어쩌면 내가 다른 삶을 살게 될까봐 두려웠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마음 깊은 곳에는 이렇게 살기 싫다는 짜증 같은 것이 숨어 있었다. 도대체 이렇게 살지 않는다면 어떻게 살겠다는 것일까.

 

꿈은 없다. 그저 현실만 있을 뿐이다. 한 번도 긍정해본 적 없는, 억지로 뒤집어 씌워진 남의 것 같은 삶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 가짜 삶이 내 진짜 삶이다. 내겐 그것밖에 없다. 내 것이 아닌데 그것뿐인 것.

 

동시에 내겐 막연한 몽상뿐이다. 현실이 없다. 꿈을 옮겨놓을 현실이 없다는 것은 삶이 텅 빈 공백뿐이었음을 말해준다.

나는 비쩍 마르고 키만 컸다. 시력이 좋지 않아 커다란 뿔테 안경을 썼다. 나는 내 얼굴을 거울에서 보는 것이 싫었다. 그 얼굴은 세상에 없는 다른 사람의 것 같았다. 나는 왜 이런 얼굴을 뒤집어쓰고 다니는 것일까. 나보다 다른 사람들이 그 얼굴을 더 많이 볼 테니 또 얼마나 역겨울까. 나는 다른 사람이 나를 보고 역겨워 하는 모습을 보면서 두 번 짜증이 났다.

 

예전에 나는 나로 인해 누군가 고통받는다는 사실이 그다지 기분 나쁘지 않았다. 나 때문에 타인이 고통 받을 수 있다니. 아주 부정적이지만 내가 타인과 관계 맺고 있다는 증거가 아니겠는가. 세상 사람들이 전부 다 행복하지는 않고 어느 정도 고통 받으며 산다는 것이 공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어렸지만 사악했다.

 

네가 살아 있다는 게 내 허리의 짐이야.

언젠가 어머니가 이렇게 말했던 것 같기도 하다. 내가 지어낸 말인지도 모른다. 어머니는 14살 때 완전히 떠났다. 어린 시절 고통을 겪으며 자란 사람들 모두 자신이 악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자기 몸에 밴 것 모두가 고통뿐이므로 타인에게 줄 수 있는 것도 고통뿐이다. 타인에게 고통을 주는 인간에게서 어떻게 선을 찾을 수 있겠는가. 그들은 모두 존재 자체만으로 악하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지금 이대로 남에게 인정받는 것이다. 얼룩이 묻었지만 순수하게 봐 달라고 떼를 쓰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어느 순간 순수하지 않은 다른 모든 사람들을 경멸한다. 자신들은 순수를 꿈꾸고 있으므로 마치 순수한 사람들이 이미 되어버린 것처럼 착각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느 날 진짜 순수한 무언가를 만난다면 어, 내가 꿈꿔왔던 것과 다르잖아, 하고 놀라서 달아날 것이다.

 

세상은 결코 선과 악의 싸움터가 아니었다. 인간은 손댈 수 없는 보다 큰 악과 자신이 저지르는 사소한 악 사이에서 고통당할 뿐이었다. 나는 내 고통으로부터 달아나려고 그들을 파괴한다. 나는 그들보다 악하고 그들은 나보다 덜 악하다. 그러나 결국 상대적일 뿐이다. 서로 맞물고 있는 이상 아무도 악으로부터 빠져나가지 못한다.

 

악이란 상대방의 존재 이유가 나를 위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리고 악은 반드시 상대가 나를 섬기도록 조종한다. 상처받은 사람들은 나를 매혹하는 존재에게 나를 바친다. 그러나 역으로 상대가 나를 미치도록 열망하도록 조종한다. 하지만 늘 저자세이다. 복종하고 상대의 욕망에 쓰임 받는다. 그러나 한편으론 그가 나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도록 조종한다. 밑에서 슬슬 기면서 위의 존재를 통제한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할까. 너에게 나를 바친다. 너는 나를 인정하고 사랑하고 보호해야 한다. 오직 나만을. 악은 위에서 지배하는 것만은 아니다. 악은 뒤에서 옆에서 아래에서도 사람을 놀릴 수 있다.

 

악은 정면에서 자기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다. 간혹 어떤 상황에서 악이 얼굴을 드러내는 아주 짧은 순간이 있다. 그러나 악에 사로잡힌 자가 보는 것은 악의 얼굴이 아니라 사로잡힌 자, 자기 자신의 얼굴뿐이다. 나는 늘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으며 피해자이고 내가 불행한 이유는 모두 다 내 탓이 아니므로 나는 반성할 수도 없고 현재의 상태를 벗어날 수도 없다. 나는 늘 악한 상태로 있지만 그것을 알 수조차 없다. 나는 순수하고 죄가 없다. 그러나 나는 악으로만 존재한다. 인생이여, 저주여! 나는 상대방에게 악을 건네주고 사랑과 인정받기를 원한다.

 

나는 개다. 버림받은 골목에서 헤매고 있다. 내 텅 빈 공허를 알아봐준 고마운 사람에게 상처를 준다. 나는 조금 만족하지만 금세 그를 배신하고 슬퍼서 운다. 나는 또 버림받는다. 어머니에게 다시 버림받을 수 있다면 나는 어머니를 모욕할 수 있으리라. 그녀의 가슴에 치명적인 독을 심어줄 수 있을 것이다. 그녀의 죽음 같은 병을 헤집고 들여다보고 싶다.

술을 마시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무리들이 있었다. 가끔 나도 거기 끼였다. 사실 아무것도 심각한 것이 없으면서도 일부러 심각한 표정으로 술을 마셨다. 이런 표정을 지어야 스스로를 속일 수 있고, 남도 속는다. 여자아이들은 이런 표정을 짓고 술을 마시는 남자들에게 낚인다.

 

새벽까지 술을 마시고 오후에 다시 아르바이트를 하기 위해 자취방을 나선다. 일을 하고 있다는 착각이 들 때가 가장 기분이 좋다. 아르바이트가 직업이 돼버린 무리들은 뭔가 하고 있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무엇을 하고 있는지는 잊는다. 나는 그들과 술을 마시고 자취방으로 돌아와 책을 읽는다.

 

나는 주로 철학나부랭이를 읽었다. 비참한 인생에 욕을 퍼붓기 위해서는 기원을 알아야 했다. 왜 몇 몇 사람들은 인생을 즐길 특권을 갖고 있는 반면 다른 대부분의 사람들을 특권자들이 누리는 작은 것 하나라도 얻기 위해 땅바닥을 기어야 하는가.

 

지금까지 과거는 수치만 주었다. 미래는 어떻게 될지 모른다. 그러나 그런 수치가 계속 반복된다면 아마도 자살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죽었다면 태어나자마자 죽었어야 한다. 아니면 어머니가 나를 버리고 떠났을 때 죽었어야 한다. 하지만 그땐 너무 어렸다. 생과 사는 인간이 어쩌지 못하는 영역이다. 인생은 모욕 자체이다.

 

나약한 인간들은 늘 은밀하게 숨는 것 같지만 자기를 드러내지 못해 안달을 한다. 모르는 사람에게까지 자기를 알릴 용기는 없다. 그저 몇몇 아는 사람들이 나를 인정해주면 족하다. 단 한 명이라도 나를 자기보다 더 나은 사람이라고 인정해주면 흐뭇할 뿐이다. 내가 너보다 더 나아. 이것이 그들의 모토이다. 절대 평가 따위는 원하지 않는다. 1:1의 상대 평가. 너만 이기면 된다. 이것이 악에 사로잡힌 자의 게임의 법칙이다.

 

내가 너보다 훨씬 더 불행하지만 바로 그것 때문에 내가 너보다 더 나아. 그것을 증명하는 것이 그들의 사는 목적이다. 상대적이고 모순적인, 텅 빈 내면이 주는 안전한 역설. 우리는 서로 잘 알고 있고, 너보다는 내가 더 낫다는 것을 인정하는 한 앞으로도 우리는 잘 살 수 있을 거야. (내가 너보다 낫다고 믿지만 상대도 똑같이 자신이 나보다 더 낫다고 믿고 있다.) 서로의 불행을 저울질하면서 불행의 수준을 가늠하면서 그들은 고향을 떠나지 않는다. 서로가 서로에게 거울이 돼줘야 한다.

 

인생은 어떤 목표를 위해 헌신하는 데 의미가 있는 게 아니라 그냥 존재하는 데 가치 있다. 그것에는 존엄이나 품위 따위는 없었다. 비슷한 처지의 여자들과 쉽게 잠을 자고 일어나는 아침보다 더 참혹한 시간은 없다. 인생은 다 그렇고 그런 것이지, 내 속에 있는 무수한 타인들이 합창을 했다. 내 속에 있는 악을 다른 사람들도 똑같이 가지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은 그 어떤 것보다 비참하다. 내가 가진 악이 별 볼 일 없이 초라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쪽팔려서 죽을 것 같다.

성난 얼굴로 돌아보라, 천만에. 악의 얼굴로 돌아보라. 거기 내가 있다. 나와 똑같은, 그러나 나를 넘어서는. 나, 그 이상의. 다른 얼굴.

 

어때?

A는 B가 보고서를 다 읽기를 기다렸다가 물었다.

글쎄, 이 친구는 자신이 악하다고 믿고 있는 건가?

아니면 다른 사람들의 악 때문에 자신이 고통당하고 있다고 믿고 있을 수도 있고.

뭐, 고통이야 주고받을 수 있는 것이니까. 악한 것과 고통 받는 것은 다르니까.

 

무엇을 선이라고 말하고, 무엇을 악하다고 말할 수 있겠나.

글쎄, 자네와 같은 의사들은 선과 악의 이분법의 경계 아니면 그 이상에 서 있지 않나. 의술이란 선과 악이 끼어들 틈이 없지 않나.

원칙으로는 그렇지만 의학이 해서는 안 될 악한 일들을 많이 벌이기도 했으니까.

인간생체 실험 같은 것은 그렇겠지.

 

그러니까. 이걸 읽은 소감이 어떠냐 말이야.

버림받았다는 느낌이 존재감을 잃어버리는 계기가 되는 모양이군. 악하다는 느낌보다는 슬픔, 아니면 연민을 느끼게 해.

그렇지. 하지만 이 글을 쓴 친구가 진짜 악하다면 어떻겠나.

 

악한 것 같지는 않네. 자신을 악하다고 말하는 악인이 얼마나 될까. 대부분 자신이 악하지 않다고 심지어 선을 위해 이런 짓을 한다고 믿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건 그래. 하지만 자신이 악하다고 믿는 진짜 악인도 있을 수 있고, 실제로 있기도 해.

 

이 친구는 그런 악마는 아니야. 그저 악에 대해 깊은 생각에 빠져 있을 뿐이지. 자기가 악하다고 느끼면서 깊이 아파하고 있는 것 같아.

아무튼 이 환자는 흥미롭게도 불행한 자들은 자신의 불행을 자랑하고, 그 불행 때문에 악한 사람이 되어서 다른 악인들과 경쟁한다는 거야. 거기서 더 심각한 불행, 더 악한 심성? 뭐 그런 걸 내세우며 우월 의식을 갖게 된다고 믿고 있어. 그것이 악한 사람들이 자신에게 갖고 있는 어떤 존재감 같은 거라는 얘기지.

그런 사람들끼리 그런 이유로 진짜 싸우게 되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

악이 악을 물들이는 거지. 악을 전염시키는 거야. 누군가 그런 이야기를 했어. 악은 전도하지 않아도 된다. 악한 것은 일부러 전염시키지 않아도 자연적으로 옮게 되어 있다는 거지. 근묵자흑이랄까.

 

이 사람은 버려지고 난 뒤 자신이 스스로 악에 물들었다고 말하고 있어.

실제로 이 사람이 무슨 짓을 했나?

별 일 없어. 그저 생각일 뿐이야. 모든 게. 아무것도 하지 않아. 생각만 하지.

어떤 환상 같은 건가.

글쎄 스토리를 만들지는 않아. 다만 그런 생각만 잔뜩 할 뿐이야.

무슨 치료를 하나?

그저 몇 마디 상담을 할 뿐이야. 거의 환자 혼자 떠들다 가.

아무 말 하지 않고 있는 것도 힘들겠군.

그렇지 않아. 아무 말도 하지 않게 돼. 그들의 말을 듣고 있으며 나도 아프니까.

자넨 좋은 의사야.

그렇지 않아. 감정이입하는 건 의사에겐 치명적이니까.

 

이제 커피나 마시지.

두 사람은 말없이 커피만 마셨다. A는 담배를 두 대 더 피웠다. B는 보고서를 뒤적이며 뭔가 새롭게 읽히는 구절이 있는지 살폈다.

 

비참한 인생에 욕을 퍼붓기 위해서는 기원을 알아야 했다.

 

B는 이 보고서를 쓴 사람이 어떤 기원을 발견했는지 궁금했다. 기원이라……, 태초에……?

 

TOTO의 Africa만 두 시간째 흘러나왔다. 좋았다. 카페에 온 사람들은 어떤 노래가 흘러나오는지 신경도 쓰지 않은 채 서로 떠들고 있었다. 두 시간 더 이 노래만 나왔으면 좋겠다. 화장실 변기가 부르는 아프리카. 뭔가, 태초의 땅…… is Ari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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