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린니의 서재
본문 바로가기

전체 글682

사랑 사랑 사랑인데 감추는 사람들이 있다 헤어졌는데 모르는 사람이 있다 미워하는데 좋은 척 하는 사람도 무엇을 어떻게 선택하는가 고민에 빠진 사람들도 있다 알고 있는데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모른다고 착각하는 것은 아닌데 결국 그렇게 끝나버리는 일도 있다 변명할 기회도 없이 진심과는 무관하게 사실 그대로만 드러난 채 왜곡과 변형을 거쳐 사건이 종결될 때 팩트 외 스토리는 묻힐 때 억울하고 분하고 원통할 때 복수를 다짐하고 십년 계획을 세웠으나 아무런 힘도 없을 때 비겁해서 숨고 숨은 것마저 들켜 창피해서 다시 숨으려고 주위를 둘러볼 때 아무도 날 보는 사람 없고 세상이 투명해질 때 사랑은 어디에 있는가 오래 처박아 두어 낡은 사랑은 2023. 7. 31.
결정론자 자크 결정론자 자크 그는 사랑은 자질이라고 말했다 아무나 사랑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어처구니 없는 일이라고 사악한 것은 사람의 기질이라고도 했다 의도치 않게 죄을 지었다고 터무니 없는 변명을 늘어놓는 것은 예의를 모르는 것이라며 웃었다 그래서일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사람을 쉽게 믿었고 금세 사랑에 빠졌고 고민 없이 용서했다 상대가 곧 반격하고 자신을 파멸시키려 들 것을 모르는 사람처럼 착한 것도 어리석은 것도 자질이며 기질이었다 돌은 깊이 박히지 않으면 누군가의 손에서 무기가 된다 구르는 것은 날 수 있고 다른 어딘가에 박힐 수 있다 돌은 바위가 아니다 산다는 것이 노력해서 되는 일이던가 인생은 원하는 곳으로 난 길이 아니므로 예기치 않게 불행을 만나는 일 따윈 발생하지 않는다 미래란 존재하지 않는다 과.. 2023. 7. 29.
인생공부 인생공부 카페에 일가족이 들어왔다 정확하게 13명이었다 불길했다. 숫자부터 사람들이 떠들어대는 소리까지. 그들은 경상도 사투리로 13잔의 차를 주문하고 드디어 케이크를 꺼내 생일 잔치를 벌였다 그들은 나름 교양있었다 가족들은 웃으며 생일 축하 노래를 불렀다. 해피버스데이 투 유 해피버스데이 투 유 노래는 들리지 않았다 침묵하는 생일 축하송 박수소리는 작지만 잘 들렸다 촛불은 할머니가 껐다 그녀의 생일이었나 보다 무슨 이유인지 나갔다 들어온 식구 둘 셋이 늦게 자리했다 다 끝났다며 다른 가족들이 놀렸다 가족들은 케이크를 분주하게 나눠 먹었다 다들 웃고 있어서 행복해 보였다 SNS 시대에 여럿이서 웃고 떠드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장마철이라 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고 초록이 더 파랬다 카페에는 이런저런 장.. 2023. 7. 23.
[명시 산책] 여성민 <비밀> 비밀 이 정원에선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아요 이미 모든 일이 일어난 것처럼 내 몸의 뼈가 피리였다는 것을 나에게만 말해요 이국적인 습관을 갖기 위해 밤에는 뜨거운 불을 삼키고 구멍마다 불이 들어오면 빛이 새어나오는 몸을 이끌어 밤의 정원으로 갑니다 정원은 기이한 소리로 가득해지고 세상에 없는 슬픈 소리를 냈다는 중국 피리에 대해 생각하죠 숲에 혼자 서 있죠 내가 알지 못하는 얼굴의 윤곽들이 떠올라요 얼굴은 모두 축축해요 흐르지 않고 코발트로 있어요 내 발은 허파보다 부드러워요 피리의 구멍처럼 코발트 얼굴은 늘어나고 아름답고 따듯한 코발트를 하나씩 밟아 나는 정원을 가로지릅니다 누군가의 얼굴에 푹푹 빠졌던 발에는 향기가 남아요 달콤한 코발트 코발트에 발이 물들며 모르는 죽음에게 가요 정원에선 아무런 일도.. 2023. 7. 22.
편혜영 장편소설 <홀> 편혜영 장편소설 ◆ 홀이란 구멍을 뜻한다. 골프를 즐기는 분들은 홀에 대한 느낌이 특별할지도 모른다. 홀은 작은 구멍에서부터 싱크홀이라고 부르는 거대한 구덩이에 이르기까지 모든 곳에 생겨나는 구멍을 말한다. 요즘처럼 장마가 심한 경우 하늘에 구멍이 뚫렸다고 말하기도 한다. 실연을 당하면 마음에 구멍이 난 것 같다고 말한다. 마음이 텅 비어 버린 느낌을 그렇게 말한다. 지나가다 어느 곳에 구멍이 뚫려 있고 “들여다보지 마시오” 라고 쓰여 있으면 정말이지 구멍 안을 들여다보고 싶은 충동이 강하게 든다. 그러나 들여다보면 아무것도 없다(별 것 없다). 도넛을 다 먹으면 무엇이 남을까?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그렇지 않다. 도넛을 다 먹고 나면 구멍이 남는다. 도넛은 도넛과 구멍으로 이루어져 있으니까. 새 옷을.. 2023. 7. 16.
방백 <사랑> ―아름다운 노랫말 12 사랑 텅 빈 마음으로 텅 빈 방을 보네 텅 빈 방 안에는 텅 빈 니가 있네 텅 빈 니 눈 속에는 텅 빈 내가 있네 아무도 모르게 너와 내가 있네 지금 난 눈 감고 생각하네 기억 두려움 시간 슬픔 너는 눈 뜨고 되뇌이네 사랑 사랑 사랑 사랑 누런 달빛 아래서 텅 빈 술병을 들고 오늘의 운세를 볼 때에 맑은 바람이 분다 이윽고 너와 나는 사라지고 새로운 어떤 사람이 뜨거운 기계를 만지작거리다 다시 되뇌여본다 사랑 사랑 사랑 사랑 사랑 사랑 사랑 사랑 (1) 백현진 방준석 - 사랑 (영화 '경주'의 타이틀 곡 | Official Music Video) - YouTube ◆ 텅 빈 마음으로 텅 빈 방을 보네 마음이란 처음부터 텅 비어 있는 것일까? 아니면 가득 차 있다가 어느 때, 어느 일로 텅 비게 되는 것일.. 2023. 7. 14.
[명시 산책] 여성민 <연애의 국경> 연애의 국경 정글은 손과 손 사이에 있다 내가 너에게 손을 내밀 때 사실은 뿌리를 내미는 것이다 대개 잠복기를 갖지만 잠복기 없는 케이스가 발견되기도 하는데 그런 경우 정글은 순식간에 확장된다 이때 국경이 발생한다 국경은 외부에 있지 않다 정글의 국경은 정글의 내부에 있다 국경은 생태학적으로나 지리학적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손과 손이 맞닿는 순간의 일 그러니까 정글의 국경은 사건이다 언젠가 한번 정글을 여행한 적이 있다 정글을 걸으며 사람의 몸에서 먼저 사라지는 것은 말이다 우리는 느낌을 확장한다 뿌리를 더듬으며 걷지만 뿌리를 내리지는 않는다 손을 내밀어 서로의 국경을 더듬는다 그러니까 연애는 국경과 국경이 만나는 일이다 네 쪽으로 국경을 확장하는 일이다 나도 너처럼 정글의 빗소리가 그리워지는 순간이 있다.. 2023. 7. 10.
뒤라스 X 고다르 대화 ◆ 장-뤽 고다르 (Jean-Luc Godard) 프랑스 문화원에서 프랑스 영화를 공짜로 틀어주던 시절, 장 뤽 고다르의 를 본 적이 있다. 처음엔 그 영화의 제목도 모르고 감독이 누군지 배우가 누군지도 몰랐다. 프랑스어는 지금도 잘 모른다. 나중에서야 그 영화가 그 유명한 ‘네 멋대로 해라’인지 알게 됐다. 그때 아무것도 모르면서 ‘세상에 이런 영화도 있구나’ 하면서 너무나 재미있게 보았었다. 그 뒤 감독 이름을 알게 되었고 란 책을 읽었다. 어쩌면 책을 영화보다 먼저 읽었는지도 모른다. 누벨바그라는 영화 스타일을 만들어낸 천재 감독, 장 뤽 고다르. 그의 영화는 가식 없는 현실을 보여주었고, 동시에 완벽하게 연출된 현실을 보여주었다. 그의 영화는 영화라기보다는 소설에 가까웠고, 카메라로 쓰는 소설이라.. 2023. 7. 8.
에드워드 호퍼 2 에드워드 호퍼 2 흘러가는 길 위에서 호퍼는 생각한다 멈춰선 호퍼에게서 내면이 흘러내린다 풍경에 서서 집(안)을 바라보는 시선(들) 실내로 들어선 풍경들 건물들에는 사람의 흔적이 느껴지지 않고 오전 7시의 가게는 문을 열지 않았다 선착장 노동자들이 남겨둔 수레와 공장 굴뚝의 연기 여름한나절 일요일 이른 아침 혹은 오전 11시 호텔방에서 편지를 읽는 여자 2층 테라스에서 신문을 든 남자 이야기는 숨어 있고 인생의 수수께끼는 풀기 어렵다 거리와 공원, 철도역, 항구와 닿은 집들 사람들은 어디서나 북적이지만 그림에선 지워진다 텅 비어 있는 심연의 외곽 거기서 발견하는 것은 밖을 내다보는 한 사람 그리고 동시에 바깥에서 안을 들여다보는 알 수 없는 시선 I after me 단 한 여자만을 바라보고 그린다는 것 .. 2023. 6.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