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백 <사랑> ―아름다운 노랫말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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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기로운 일상생활

방백 <사랑> ―아름다운 노랫말 12

by 브린니 2023. 7. 14.

사랑

 

 

텅 빈 마음으로 텅 빈 방을 보네

텅 빈 방 안에는 텅 빈 니가 있네

텅 빈 니 눈 속에는 텅 빈 내가 있네

아무도 모르게 너와 내가 있네 지금

 

난 눈 감고 생각하네

기억 두려움 시간 슬픔

너는 눈 뜨고 되뇌이네

사랑 사랑 사랑 사랑

 

누런 달빛 아래서

텅 빈 술병을 들고

오늘의 운세를 볼 때에

맑은 바람이 분다

 

이윽고

너와 나는 사라지고

새로운 어떤 사람이

뜨거운 기계를 만지작거리다

다시 되뇌여본다

 

사랑 사랑 사랑 사랑

사랑 사랑 사랑 사랑

 

(1) 백현진 방준석 - 사랑 (영화 '경주'의 타이틀 곡 | Official Music Video) - YouTube

 

 

텅 빈 마음으로 텅 빈 방을 보네

마음이란 처음부터 텅 비어 있는 것일까?

아니면 가득 차 있다가 어느 때, 어느 일로 텅 비게 되는 것일까.

 

깊은 마음을 심연이라고 부르는데

심연이란 텅 비어 있어 깊이를 알 수 없는 장소라고 한다.

 

어떤 물리적인 장소를 말하는 것은 아니고

끝도 없이 바닥을 알 수 없는 무엇이다.

 

 

텅 빈 방 안에는 텅 빈 니가 있네

그렇게 텅 빈 마음으로 텅 빈 방을 본다.

그런데 그렇게 텅 빈 방에 니가 있다.

텅 비어 있는데 어떻게 사람이 있을 수 있는가.

 

텅 빈 방이란 물리적인 공간이 아닐 수도 있다.

그러니까 진짜 사람이 있는 게 아니라

텅 빈 니가 있는 것이다.

 

 

텅 빈 니 눈 속에는 텅 빈 내가 있네

텅 빈 니 눈 속에 텅 빈 내가 있다.

공즉시색이 아니라 공즉시공이다.

텅 빈 방 속 텅 빈 너

텅 빈 니 눈 속 텅 빈 나

 

 

아무도 모르게 너와 내가 있네 지금

그러니까 아무도 이를 알 수 없다.

텅 빈 공간 속에 텅 빈 존재들이 있다.

아무도 모를 뿐만 아니라 몰라야 하는지도 모른다.

지금 우리가 텅 비어 있다는 사실을.

 

그러니까 텅 빈 마음으로 보는 것은 텅 빈 심연이다.

거기엔 니가 있고, 니가 바라보는(혹은 바라보았던) 내가 있다.

사랑 그리고 그 사랑으로 시작된 사건들이 거기 있다.

지금(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역시) 우리는 아무도 모르게 거기 있다.

우리가 서로를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우리는 우리의 존재를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어하지 않는지도 모른다.

지나치게 사랑하는 연인들은 사람들로부터 자신들을 숨기고자 하기도 하니까.

 

 

난 눈 감고 생각하네

기억 두려움 시간 슬픔

너는 눈 뜨고 되뇌이네

사랑 사랑 사랑 사랑

 

텅 빈 방에 있는 두 사람.

나는 눈 감고 생각한다.

기억, 두려움, 시간, 슬픔, 이런 것들을.

너는 눈 뜨고 되뇌인다.

사랑, 사랑, 사랑, 사랑이라고.

 

 

함께 있어도 나는 생각하고

너는 느낀다(느끼는 걸 되뇌인다.)

이성과 감성이 교차하는 지점일 수도 있다.

 

나는 사랑에서 비롯되는 것들을 생각한다.

기억과 두려움과 시간, 슬픔 따위를.

그러나 너는 사랑만을 느끼고 그것을 되뇌인다.

너는 마치 생각 따윈 중요하지 않다는 듯이 그저 사랑만을 되뇌인다.

 

 

누런 달빛 아래서

왜 누런 달빛일까. 노오란 달빛이 로맨스에 어울리지 않을까.

누런 달빛은 이를 닦지 않아서 누렇게 변한 이(치아)를 떠올리게 한다.

누런 달빛은 우리의 사랑이 환상으로 가득 찬 로맨스가 아니라

지지리궁상을 떠는 현실의 사랑이라는 걸 암시하는 듯 하다.

 

 

텅 빈 술병을 들고

술을 다 마셔 빈 술 병일까.

아니면 텅 빈 방에 있기에 사람도 술병도 텅 빈 것일까.

사람도 사물도 모두 텅 비어 있는 블랙홀 같은?

 

오늘의 운세를 볼 때에

우습다.

사랑에 빠진 사람도 운세를 볼까.

연인들은 그 자체로 행운 가득한 오늘을 사는 것이 아닐까.

 

 

맑은 바람이 분다

누런 달빛 아래에선 왠지 후텁지근한 바람이 불 것 같다.

그런데 맑은 바람이 분다.

푸른 청춘이어서 어떤 바람도 모두 청량한 것일까.

맑은 바람이 분다, 라는 구절이 있어서

이 노래가 우중충하지 않고 조금은 산뜻해진다.

 

이윽고

너와 나는 사라지고

텅 빈 방에서 혹은 텅 빈 마음 속에서

텅 빈 존재로 존재하던 너와 내가 사라진다.

눈앞에서 사라진 것일까.

마음에서도 사라진 것일까.

텅 빈 방과 함께 사라진 것일까.

텅 빈 방은 그대로 있는 것일까.

 

새로운 어떤 사람이

어떤 사람이 나타난 것일까.

너와 내가 사라진 뒤 나온 사람은 내가 상상 속에서 그린 사람일까.

아니면 진짜 새로운 사람이 사랑의 대상으로 떠오른 것일까.

사랑은 정녕 움직이는 것일까.

새롭고 신선하고 낯선 존재 욕망의 대상?

 

뜨거운 기계를 만지작거리다

불쌍한 사랑기계라는 어느 시집 제목이 떠오른다.

사람이란 사랑하는 기계일지도 모른다.

최인호의 타인의 방에서처럼 육체의 한 부분일지도 모른다.

어른들의 사랑에선 그것은 늘 뜨거운 감자니까.

사랑기계를 만지작거린다.

혼자 남아서일까. 아니면 새로운 상대와?

 

다시 되뇌여본다

사랑 사랑 사랑 사랑

사랑 사랑 사랑 사랑

아무튼 다시 되뇌인다.

사랑, 사랑, 사랑, 사랑을

이번엔 사랑이 여덟 번이나 반복된다.

 

 

니가 되뇌이고, 나도 따라서 되뇌이는 것일까.

아니면 이번엔 나 혼자서 되뇌이는데 니가 사랑을 되뇌이던 걸 추억하며

사랑을 반복해서 되뇌이는 것일까.

이렇게 사랑을 되풀이해서 되뇌이는 것은 아무리 되뇌어도 사랑이란 알 수 없다는 것일까.

 

 

이 노래는 영화 <경주>의 주제곡이다.

 

 

영화 엔딩에 울려 퍼진다.

생뚱맞다.

더 여리게 들려야 하는 게 아닐까, 이런 생각을 하는 찰라

이 노래의 가사가 모든 걸 휩싸고 무화시켜버린다.

그 어떤 생각도 들지 않는다.

 

그냥 갑자기 멍해진다.

뭐지?

이 노래?

 

뭔가 아는 사람이 뇌까리는 도통한 자의 독백 같다.

이 노래를 만든 사람들과 같은 '방백' 같다.

모두 다 듣고 있지만 아무도 듣고 있지 않는 것으로 여기는.

 

이 노래는 인간의 존재에 대해 중얼거린다.

인간은 텅 빈 존재라고.

 

그리고 사랑에 대해서도 말한다.

하지만 사랑이라고 되뇌일 뿐 사랑에 대해서 뭐라고딱부러지 정의하지 못한다(?).   

 

텅 빈 존재에게 사랑이란 무엇일까. 

어쩌면 거꾸로 생각할 수 있다. 

 

사랑이 없으면 인간은 텅 빈 존재이다. 

인간이 텅 빈 존재이기에 빔을 채워줄 사랑이 절실히 필요하다. 

 

사랑은 텅 빈 마음을 채워줄 생명수인지도 모른다. 

사랑이 가득찰 때 인간은 텅 빈 존재에서 벗어나 충만한 존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 영화에서 주인공은 희미한 기억을 찾아 여행을 한다.

아니다. 기억은 생생한데 현실이 희미하다.

 

 

그리고 다시 찾은 기억은 현실이 아니다.

 

우리의 존재와 사건들, 그리고 기억, 모두 텅 비어 버린 것일까.

아니다. 그렇지 않다.

 

 

텅 빈 것은

잠시 멈추어 있는 한때이다.

 

시간은 강물처럼 흘러가고

인생은 늙는다.

 

다만 어느 순간

일상이 신화가 되고,

모든 장소가 텅 비어 버리는 때가 있다.

 

깊은 사랑의 시간

혹은 그에 대한 돌이킬 수 없는 기억의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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